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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베소교회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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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교회 (계 2:1-7)

 
내 용 주후 90년대 기독교는 로마에게 아주 잔인한 핍박을 받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로, 그 사람을 비롯해서 네로 황제 등 대다수 황제들이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잔인한 핍박 속에서 요한계시록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상황에 의한 은유적 해석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셔야 합니다.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에는 로마 권력에 대한 비판이 은유적이 많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해 가면서 로마의 상징적 깃발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는 깃발입니다. 로마 정치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인데, 하나는 정치적인 안정으로 “로마가 가는 곳은 평화이다. 그러므로 로마에 항거할 생각하지 말고 위대한 로마의 힘에 의한 안정된 사회 건설을 이루어라.” 또 하나는 “그렇게 되면 경제적 풍요가 이루어져서 모두가 다 같이 잘 살게 된다.” 이러한 깃발을 내세우고 약소국가들을 점령해 나갔는데 요한계시록에는 바로 로마의 그러한 정책을 짐승과 음녀라고 로마인들이 전혀 모르는 은유적 기록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음녀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을 음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음행인가? 로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핍박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 황제 숭배는 기독교인으로서 음녀와 음행에 빠진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의 ‘팍스 로마나’ 철학은 과거 일본 제국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운 것과 똑같습니다. 아시아를 점령해서 “우리가 아시아에 한 나라를 만들어서 세계 강대국을 만들면 다 똑같이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이 일본의 정치 철학에 동조해 아시아의 최강대국을 만들어서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자고 한 것이 일본의 정치 철학이었습니다. 로마가 ‘팍스 로마나’ 정치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해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3장 4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이 짐승과 싸울 것인가? 로마와 싸울 자가 누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음녀인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음행자가 되었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음녀 로마를 대항해서 싸워 이길 힘이 오직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14장 4절에 보면 “구원을 받을 자는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순결한 자다.” 이런 말이 있는데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로마 황제 숭배, 로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황제 숭배를 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교회를 조명해 보면 갈보리교회도 가야할 방향이 나오는데 첫 번째로 오늘 에베소 교회를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성지순례하신 분들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의 흔적을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가 봤습니다. 일곱 교회는 다 망가졌습니다. 그 망가진 흔적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교회를 창립하고 목회하는 중에 에베소 교회에서 제일 오랫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아마 지금 세계 지도대로 말하면 터키 제일 서쪽 바닷가 항구 도시가 에베소였습니다. 바닷가의 항구도시로 발전했기 때문에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함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업이 발달했고 경제가 매우 활발한 도시입니다. 인구가 많아지고 외국인도 아주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또 종교적으로 역할이 컸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 7대 불가사이로 여기던 아데미 신전이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외국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던 관계로 자연히 유흥업소가 많아지고 향락 문화가 발달한 자유도시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성경말씀과 같이 교회도 활발했습니다. 다 잘되는 도시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도시에 있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지금 몇 가지 평가를 객관적으로 내렸습니다. 거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는 믿음에 있어서 수고와 인내가 있었다.” 당시에 기독교 운동은 지하 운동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이 책은 지하 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진 지하 문서입니다. 로마 황제라는 음녀가 큰 힘을 가지고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그것이 무서워서 그 음녀에게 붙어서 황제 숭배, 즉 음행을 일삼는 절대 다수의 대중 속에서 소수가 지하 운동을 펴가며 그 음녀와 싸우는 기독교인들이 암호 문서를 지하 조직으로 돌리면서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런 조직의 지하 운동은 위험합니다.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나라의 과거 독립 운동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에서 독립 운동 유공자들에게 다소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아는데 저는 그런 일을 정부가 아주 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런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독립 운동가들의 자손들은 하나같이 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너무 고난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예우는 국가가 잘해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러한 핍박 속에 이 로마의 세력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 말씀에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였다.”라고 나옵니다. 어느 민족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는 두 가지 필수 과목이 따라옵니다. 아픔과 고난은 다 겪었습니다. 어떠한 아픔과 고난이 있었는가? 이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이 식량 배급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굶어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인간을 향한 가장 무서운 고문이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왜 공산당 국가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를 도입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배급 제도를 실시했는가? 그 제도만 실시하면 국민을 가장 쉽게 길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말 안 들으면 먹는 것을 안주면 끝납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고” 황제 숭배를 하고 “그 백성들이 음행을 하면서 마신 포도주에 취해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에베소 교인들은 배고픔을 견디면서 인내했다는 겁니다. 그 고통과 그 고난과 아픔을 견디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수고와 인내라고 했는데 헬라어 원문의 뜻은 “피곤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항상 피곤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국가 공무원에서 쫓겨났고, 정당한 시민의 권리에서 제외 되었으며, 식량 배급에서 중단되고, 사회생활은 극심한 왕따 문화에서 살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참고 견디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이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에베소에는 도미티안 황제의 숭배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더 핍박이 많던 곳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에베소 교회가 잘한 것을 여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들을 드러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그치지 아니하는 교회에 침투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 이단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했고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 이단교파의 교주들은 거의 똑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도 경계하셨고 바울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지라도 믿지 말라.” 이렇게 강한 표현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웬 재림주가 그렇게 많이 내려오셨는지 수백 명입니다. 이 에베소교회는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침투해서 어지럽게 하는데 이 니골라당이 바알종교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바알의 전쟁터 같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바알을 싫어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무자비성 심판이 나타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 지도자들과 싸울 때 450명 모조리 현장에서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모압 평지에서 모압 여자들이 바알에게 예배드리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와서 남자들이 다 가서 바알에게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2만3천명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자비성 심판이 나타나는 게 바알에 대한 우상 숭배인데 에베소 교회에 니골라당이란 이름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구분해서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영적 지혜는 아주 훌륭했다.”

여러분! 이단 유혹 받으신 적이 없습니까? 저는 제가 목회하던 지역에서 이필재 목사를 아예 목표로 정하고 공략했던 일도 있습니다. 거기서 계획을 짜서 나왔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필재 목사만 이단에 물들게 하면 다 끝났다. 다 쓰러진다.” 그래서 얼마나 세밀하게 교인 가정으로 들어와서 접근했는지 모릅니다. 다 경험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 공부하기 전에는 이 지역에 교회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단이 들어와서 제 동기생은 거기에 빠졌습니다. 이단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명령했습니다. “이 지역에 교회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에 너희들 친구 이필재만 낚아 와라. 그러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래서 내 동기생 두 친구가 거기에 빠져서 저를 그곳으로 끌고 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 만나게 해줄 테니 가자.” 그 교주가 자기들의 예수님인 것입니다. “아무도 안 만나주시는데 너는 만나주신다고 우리가 약속받아왔다.” 그런 유혹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잘못했으면 재림주를 만날 뻔 한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아주 신학적으로 튼튼합니다. 니골라당이 다 물러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칭찬이 하나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첫째 조건이 부지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 많은 일을 하면서 교회 생활 하나를 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 때문에 다른 것에 손해가 나지 않게 하려니까 자연히 부지런해집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쉬는 시간 줄여야 하고, 늦도록 활동해야 합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 주일예배, 각종 모임, 봉사생활…. 이처럼 교회에 나와서 많이 활동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과 시간이 비슷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지런하게 일해야 합니까?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신자들의 생활은 보통 부지런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지가 힘듭니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개인 생활도 손해가 안 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만하면 에베소 교회는 객관적 평가에서 대단히 훌륭한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열심 있는 처음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어떻게 우리가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처음에 가장 귀하게 얻은 것이 있습니다. 영생의 진리는 있고 구원받은 감격을 말합니다. 인생에 가장 큰 진리, 인간됨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생명은 불변하는 영생의 진리를 우리가 얻고, 나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성 있는 삶을 가장 기쁘게 해나갈 수 있다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너무나도 감격해서 그 시절에는 이 하나의 조건만 가져도 나는 평생 행복하게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있다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신앙생활에 최선과 차선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최선의 축복은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감격 하나로 만족하며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한 기쁨이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최선의 복은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차선의 복에 훨씬 더 마음을 쓰게 됩니다. 차선의 복이 무엇입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들을 말합니다. 건강하게 살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의 일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만 관심을 쓰다가 가장 훌륭하고 좋은 최선의 축복인 영생의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하면서도 에베소 교인들은 처음에 ‘죽으면 그만이지! 안주면 안 먹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영생을 생각하면서 그 배고픔을 참고 견디고 인내했던 그 신앙은 이제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세상 기준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고 작은 일에 너무나 절망하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만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영광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성취도에 더 관심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좀 변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만 좋으면 되던 일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좋아져 버렸습니다. 

가끔 우리 목회자들 간에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목회에 성공했다. 저 사람은 목회에 실패했다.” 그러면 누가 성공한 목회자이고 누가 실패한 목회자입니까? 바로 그런 기준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소리에 기준을 맞추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앙이 세속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이 시간 저 두메산골이나 외딴섬에서 교인 몇 명을 모시고 목회하고 있는 목사는 실패한 목사인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가 더 성공자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목회자가 자신의 그 빈약한 목회 활동을 비관하며 좌절한다면 그 목사도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는 거의 똑같은 감격을 하면서 목사를 하고자 합니다. 

찬송가에 있잖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죽음인들 막으리까?” 처음에는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나는 이 길을 가야 돼! 어떤 조건도 못 말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이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주의 원리 문화에 젖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성공했고 나는 실패했다는 세속적 결론에 슬퍼하면서 울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오는 겁니다. 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우리의 모든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초심이 뭡니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남진 씨가 부를 때 얼마나 좋은지 “나는 좋아 나는 좋아” 그러더라고요. 그 초심은 얼마 안가서 간 곳이 없고 조건부에 의한 행복 추구만 계산하게 되니까 처음 사랑은 다 잊어버립니다. 교회가 부흥회를 합니다. 저도 부흥회는 많이 가는 편입니다. 왜 합니까? 처음 사랑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처음에 예수 믿고 성령이 충만하여 믿음이 주어진 그 하나의 조건, 인생의 최고같이 여겼던 영생의 축복에 대한 내 믿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이렇게 초라하게 내가 믿음이 식었는가? 이것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회복에 대한 믿음은 아주 많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처음 어디서 만나죠? 벧엘입니다. 거기서 뭐라고 그럽니까? 돌기둥을 세워놓고 “과연 하나님이 계시거늘 할아버지가 하나님이 있다고 말했고 아버지가 그랬는데 오늘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뭐합니까? 서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십일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 예배당도 짓겠습니다. 하나님 좋아하시는 것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지키지 않습니다.20년 만에 돌아올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창세기 35장 1절에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던 그 때 나와 만났던 벧엘로 와라.” 갔습니다. “여기서 네가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지? 나는 네가 기도한 것을 다 들어주었는데 너는 아무것도 안했지? 처음 사랑 어떻게 된 거야?” 그래서 야곱을 그때 벧엘로 불러서 처음 사랑 회복시켜 주시고 그때부터 야곱이 새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갈릴리로 오라 하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지금 예루살렘에 다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면 되는데 왜 나라의 제일 끝인 저 북쪽 지방인 갈릴리까지 걸어서 오라고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거기 가서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 이 자리에서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니?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죽음을 다 하고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니?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잘못하면 다른 것은 다 풍성하게 하면서 신앙생활은 가장 빈약하게, 하나님을 향한 것은 가장 인색하게 변합니다. 

제가 인도에 선교여행 갔다 오는 길에 비행기를 한국 모 재벌 총수와 같이 탔습니다. 내가 이름 말하면 여러분 거의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대한민국 신문과 TV는 그 재벌 기업의 형제들이 서로 싸워서 고소하고 난리 피운다고 막 떠들던 때입니다. 저는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형제들이 재벌이 되기 전 어린 시절 처음 사랑은 뭔가?’ 누구든지 그렇죠? 동생 매 맞고 들어와 보세요. “누가 내 동생 때렸어?” 찾아가서 “내 동생 건드리기만 해봐라.” 형이 없으면 못살 것 같고 동생은 나의 영원한 보호자이고 우애 있게 “형! 형!” “그래, 내 동생 이리 와!” 이것이 처음 사랑 아닙니까? 그러면 재벌이 되었으면 더욱 사랑해야 될 거 아닙니까? 결국 그 형제는 한 사람이 자살해서 끝났습니다. 처음 사랑 어디로 갔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오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가 예수를 믿고 가장 감격스럽게 주님 앞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가고 너는 지금 마지못해 가장 빈약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구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 촛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과 사명입니다. 이것이 촛대입니다. 도로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빼앗겠다.” 

여러분! 예수님이 마태복음 21장 4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열매를 제일 먼저 받았습니다. 택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왜? 너희가 이 축복을 온 세상에 다니면서 나눠주라고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빼앗아서 다른 민족에게 준 것이 기독교 2천년 역사입니다. 여러분! 빼앗기지 마십시오. 처음 사랑 회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삶의 원초적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촛대가, 그리고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사랑과 촛대를, 순결성을 잃지 말고 처음 사랑으로 항상 지켜나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가정도, 교회도, 나 자신도 모두 행복해 집니다.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 탕자 비유입니다. 탕자는 다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생각 하나를 올바르게 함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그 생각 하나가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끔 만들었고 돌아와서 제자리에 앉게 되는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만이 나의 갈 길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려서 믿음이 처음 감격으로 되돌아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사용하시고,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사랑의 사명 촛대라고 하는 기쁨을 가지고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같은 날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주님의 책망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처음에 은혜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는 내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은 이것이라고 주님 앞에 온갖 충성을 약속했지만 상업주의 원리 문화가 우리 마음에 유혹을 주어서 지금은 가장 인색한 주님을 향한 생활을 저희들이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처음 사랑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 국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축복의 며칠을 오고가면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데 만나는 장소마다 처음 사랑이 회복되는 축복을 내리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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