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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의 계절 (신 16: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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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계절 (신 16:13-17)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른 네 명이었다.' 여러분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 69일간 지하 700M에 갇혀 있었던 칠레 광부들이 구출 된 후 60억 온 세계 인구를 향해 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것에 ‘하나님께 대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감사다.’ 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이것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찬양한 적이 있겠습니까? 온 세계 사람들이, 온 세계의 뉴스 카메라가 칠레에 집중했는데 그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의 계절, 추수감사절입니다. 정기적으로 기념하고 기억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제도가 절기이고 명절인데, 이 절기, 명절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날을 정기적으로 기념하는 것인가요? 우리나라에도 명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명절, 세상 명절과 기독교 절기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명절은 사람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기념일, 독립기념일 등이 세상 명절, 절기인데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절기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는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할 일도 많으실 텐데 어떻게 감사하고 언제 감사하라는 등 이런 것까지 다 정해주시는 것일까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잘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특별히 좋지 않은 일은 잊고 싶은데도 잘 기억합니다. 좋은 일은 잊어버리고, 좋지 않은 일은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데, 이것을 하나의 상징물로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 그릇 앞에 채가 있어서 좋은 것은 걸러서 밖에 버려지고 안 좋은 것들은 걸러지지 않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불행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충분히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많고 상처와 아픈 것이 자꾸 남는 불행한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불행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어느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 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이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딱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좋은 것을 기억해주면 좋을 텐데 나이가 들어 사람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부모에 대해서 안 좋은 것을 기억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좋은 일은 기억하지 않고 상처만 생각하고 아픈 것만 기억하며 이것도 불평하고 저것도 불평하는 자녀들은 우리 부모가 보기에도 딱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게 해주고 잘해주는 사람에 대해서 처음에는 고맙다고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잘못해주면 잘못해준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 사람에 대해서 멀어지고 섭섭해 하고 서운해 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딱하게 여겨 강제적으로 우리들에게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절기 명령입니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생각하고, 과거에 이런 일, 저런 일, 좋은 것들을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즐기고 잔치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절기는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준비도 하고 헌금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권사님들도 평소에 입지 않은 것이라 쉽지 않을 텐데 저렇게 한복을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아십시오. 이것은 틀림없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행복한 인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을 시키고 부담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잘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절기를 정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나름대로 절기를 지키면 될까요? 아닙니다. 정하신 시간이 있고 지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즉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 기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하는지 또 절기는 어떻게 지켜야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힘껏 애를 쓰고서도 헛수고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바보 같은 노릇입니까?

첫 번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되 우리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잔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14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즐거워하라고 한 이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레위인까지도 추수감사절과 같은 잔치를 즐길 기회가, 그럴만한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땅이 없습니다.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추수가 없습니다. 노비는 물론이고 나그네도 그렇고 고아가 그렇고 과부가 그렇습니다. 이 중에는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토지가 없어서 일정한 소득이 없는 사람, 의지할 곳이 없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들도 여러분들처럼 즐겁게 해주라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해야합니다.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즐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금년에는 이미 준비가 다 되었지만 내년 또 다음 해에 생각할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레19:9)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대단한 말씀입니다. 곡식 하나가 아까운데 버리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레19:9-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얼마나 자비가 있으시고 배려가 있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도 잔치할 때 항상 뒤편에 따로 상을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거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따로 준비했는데 이들은 어느 집에 잔치가 있으면 당당하게 들어가서 먹었습니다. 모든 집에서 당연히 그렇게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정신을 잘 알아야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여기서 다시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잔치 같은 좋은 일이 있을 때, 우리처럼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 기쁜 일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나눌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이 절기, 잔치를 지내라는 것을 15절과 16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추수감사절이나 잔치 같은 좋은 일이 있을 때 어디서 잔치하고 어디서 즐길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인데, 우리가 여기서 하면 좋겠다, 저기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추수감사절이나 기독교인들의 잔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영어 성경은 이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at the place the LORD will choose'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그 곳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미래시제입니다. 앞으로 내가 정해주는 장소가 있을 텐데 그곳에서 잔치를 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곧 성전을 지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실 교회, 예배당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15절)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절기를, 명절을, 잔치를 즐기는데,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즐기는 것이 추수감사절이고 기독교인의 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또 영어성경은 ‘the feast to the LORD your God’ 여호와를 향한 축제, 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명절이고 절기인데 우리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즐거움은 우리끼리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거기에 덤으로 우리도 즐길 것이 있으면 함께 즐기는 것이 기독교 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제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사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다 가지고 가십니까? 제사를 다 드리고 난 뒤 나누어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생일을 즐기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생일의 개념이 좀 이상합니다. 물론 내가 태어난 날이므로 축하받고 스스로 즐거워해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일의 참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부모님 특별히 어머니가 나를 열 달 동안 태중에 두고, 또 낳고 기르는데 얼마나 많이 힘드셨습니까?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오히려 그렇게 수고한 부모가 생일을 차려줍니다. 차려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의 생일을 한 번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은 자기 생일을 마치 로또 당첨된 날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 저것 다 해달라고 하고 그 소원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세상은 모두 다 그러해도 기독교인들은 달라야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합니까? 

여러분,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낳아준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고 엄마한테 뽀뽀 한 번 해라” 이렇게 가르쳐야합니다. 이것을 미리 알고 하는 것과 그냥 다 해줘서 고마워서 뽀뽀해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이들이 용돈을 모아서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나서 아이에게 더 큰 것을 주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고 우리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생일이 되면 “하나님, 저를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시고, 이렇게 저렇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에 대한, 부모에 대한 감사를 드러내는 감사의 날이 바로 생일이지 않습니까? 무언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만이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늘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맞은 것인가? 고민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이 흘러가는 것과 같이 흘러갈 것인가?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 이것을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이 다 그렇습니다. 16절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 이라고 세 가지 명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세 가지 명절입니다. 

먼저 무교절이 무엇입니까? 무교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스트가 없는 빵을 먹는 ‘무교’입니다. 에집트에서 도망을 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관해서 먹어야했으므로 이스트가 있는 발효를 시킨 음식이면 빨리 상하므로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트가 없는 딱딱한 빵을 먹는 무교병을 만들어서 먹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집트의 열 가지 재앙 때 급히 출발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때 먹기 위해서 무교병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은 잔치이지만 하나님께서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칠칠절은 무엇입니까? 일곱이 일곱 즉 사십구일입니다. 오순절을 이야기합니다. 이때부터 50일이 되면 곡식이 익습니다. 이때 광야를 지나면서 언제 만나가 떨어질까, 저것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하루밖에 음식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하루 생각하게 됩니다. 곡식이 익은 것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손으로 이렇게 농사를 지었는가를 생각하며 흐뭇해했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들에 나가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냥 배가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로 하여금 자유민이 되게 하셨는가? 우리에게 어찌 구원을 주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연세 드신 분들은 아마 감회가 새로우실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까? 정말로 노예 같은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이 제대로 없었는데 어떻게 얻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고 이 풍요를 주셨습니다. 이 감사가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라는 17절 말씀입니다. 

다음 초막절 즉 추수감사절인데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장막이란 무엇입니까? 가나안으로 갈 때 이들은 광야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텐트에서 살면서 곡식을 다 거두어들이고 난 뒤 들로 나가서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주시고 풍요를 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전부다 하나님과 관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추석도 지내고 설 명절도 지내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장만영 시인의 ‘감자’라는 시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조려 두고두고 밥반찬으로 하기로 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할머니가 보내신 감자를 보고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고 늘 할머니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명절에도 늘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명절이고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끼리 잘 놀고 잔치를 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감사의 이유가 아주 특별합니다. 본문 15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라고 미래시제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언제 감사하기 시작하는지 잘 기억해야합니다. 받고 난 후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상담할 때 항상 드리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제가 한참 어려울 때 일일이 달라고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주시면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쓰고 저것은 이렇게 쓰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들과 상담할 때 늘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건강을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해지기를 얼마나 소원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바라십니다. 그런데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면 제가 이제 인생을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런 저런 좋은 일도 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온갖 건강에 필요한 말씀을 다 인용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른 신한테 가서 한 번만 봐달라고 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잘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중에 건강해질 것을 믿고 미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들을 돌보고 과부들과 고아들을 모아 실컷 먹게 하십시오. 특별히 전철을 타게 될 때, 천 원 짜리를 많이 준비해서 하모니카나 피리를 부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씩 나누어 주는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잠실역이나 서울역에 가면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 원짜리 하나로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천 원짜리를 많이 준비하여 세뱃돈 나누어 주듯 이 사람도 나누어주고, 저 사람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면 이렇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벌기 전에 이미 행복합니다. 건강해지기 전에 이미 건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는 미리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감사입니다. 세상은 좋은 일이 있을 때 고맙다고 하는데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금방 없어지고 맙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나중에 생기면 감사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단단히 준비를 해도 잘 안 됩니다 .

이 말씀을 드릴 때 저에게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힘들게 대학 공부까지 다 하게하셨습니다. 그 때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도 했고 앞으로 이렇게 살자는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바로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없는 사람을 이렇게 돌보고 부모님께 또 우리 하나님께 이렇게 하면서 살겠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뵈옵지 말라(16절) 라고 예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넉넉하십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자라서 여러분들에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구체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혀 마음 없이도 입만으로도 별 것 다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입으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얼마나 잘 합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이 있을 때는 물질도 함께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17절)라고 하나 더 말씀하십니다. 똑같이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각각 형편대로 달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잘 알아야합니다. 헌금할 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했다 적게 했다는 것은 정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금액, 우리 인간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상당한 금액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될 수 있고, 아주 적은 금액도 대단한 금액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헌금함 앞에 데리고 가서 가르치셨을 때,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아주 적은 금액을 넣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12:4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귀를 열어 함께 들어야합니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4).. 하나님께서도 계산을 다 하십니다. 

또 하나 더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17절에서 ‘그 힘대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헌금은 대강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눈길도 주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정이 이러하니 이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각자 자기 형편에 힘이 자라는 대로 힘껏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한 푼이라도 주기만 하면 주는 대로 다 기쁘게 받으시지는 않습니다. 

말라기 1장 7절과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재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은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라고 한 마디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물은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지 않을테니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 우리 정성을 다할 때 정말로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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