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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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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마 5: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야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만 이 세상에 계실 것이고 그 뒤에는 승천하실 것이므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떠나도 기독교가 제대로 남게 될 것인가에 대해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것에 대한 것을 가르치셨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산상수훈이고,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이 여덟 가지의 복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란 어떤 종교이고 기독교를 가진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오늘은 두 번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애통하는 사람 즉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이 정말로 이해가 되십니까? 여덟 가지 복 중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 애통하는 사람은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기독교 신자들까지도 이것만큼은 잘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여덟 가지 복 중에서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우리 주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누가복음에서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눅6:25).. 웃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5) 라고 웃음을 좋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의 웃음입니다. 다른 사람은 힘들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고,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등록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억울함에도 돈이 없어서 제대로 재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고 내가 편하고 넉넉하다고 웃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우리 주님은 웃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웃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성경 기록에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대신 분노하셨다는 기록은 곳곳에 나옵니다. 슬퍼하셨다, 곤욕을 당하셨다, 괴로워하셨다, 고통을 당하셨다 이런 것은 곳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우셨다는 기록도 여러 군데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 누이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우리 주님께서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죽어서 썩어져 가야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린 과부가 슬퍼하였을 때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같이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살았는데 앞으로 얼마나 외로울까 그것을 보시고 우신 것이었습니다.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좋다고 웃고 즐기고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웃고 있는 그 사람들이 너무 딱했습니다. 멸망할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남정네들은 죽고, 여인네들은 온갖 곤욕을 당할 그 일을 두고 주님께서는 우셨습니다. 구원받을 길이 있는데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슬픈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의 겉모습은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53:3~4)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든 괴로움을 대신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7).. 곤욕과 시험을 당하고 끌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그림으로 그린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어쩌면 오늘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돌아섰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이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당신이 아직 나이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어떻게 옛날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말하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갓 서른이 넘었는데 갓 서른이 넘은 사람에게 쉰이 덜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이보다 상당히 더 늙어보였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람과 달리 애통과 고뇌로 말미암아, 탄식으로 말미암아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인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기독교의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마음대로 상상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기독교 신자,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하면서 성경과 관계없이 세상 사람들이 상정해놓은 멋있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를 훼손시킨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들도 애통하며 슬퍼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슬픈 모습이었습니다. 괴로운 모습이었고 고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선배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경건한 분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선배입니까? 그분에게 무슨 죄가 있으며, 얼마나 악이 있었겠습니까? 물론 죄가 있고 악이 있었겠지만 얼마나 큰 죄가 있으며, 얼마나 큰 악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죄와 악을 슬퍼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고백하며 탄식했습니다. 참으로 많이 괴로워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8).. 선을 행하고 싶은데,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이런 자신을 보면서 탄식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이 끊임없이 악으로 죄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죄를 잘 이겨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이 이겨내지 못하는 죄 때문에 너무도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8:20)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속에 죄가 있는지 몰랐는데 자꾸 죄를 짓고, 죄를 지으려는 경향이 있고, 죄가 자기를 끌고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죄가 있고 악이 있어서 끊임없이 죄로 악으로 끌고 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장탄식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웃을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병을 치료하고 낫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치료되었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웃을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유쾌하게 웃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탄식하며 고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5:2)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는 탄식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이 땅에 사는 것이 매우 긴 시간 같지만 탄식하는 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삶입니다. 영원한 세월이 있는데 여기서는 잠깐 탄식하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는 영원히 웃으며 살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만 본다면 상당히 긴 인생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점 하나에 불과한 인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꼭 마음껏 웃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습니까? 즐기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영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즐기겠습니까? 여기서 웃고 거기서 덜 웃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거기서는 영원토록 참된 기쁨과 참된 즐거움과 참된 복락을 누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어서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고후5:4) 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 기독교 신자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늘날에도 참된 신자는 이것까지 예수님을 따라하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웃고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인간인지라 그 본성 속에는 웃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참된 신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애통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우는 것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아서가 아닙니다.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따라가는 우리의 구주,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그렇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자는 나가서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자신의 일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닌 것을 잘 압니다. 세상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자기를 생각하는 자기 마음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도 애통해합니다. 세상의 죄 때문에 애통해합니다. 구조적인 죄 때문에, 국가의 죄 때문에, 정부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들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여 억울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압제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최근에도 정부기관의 특채에 대해서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대기업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사실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데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기관에서 그럴 수 있는가? 라고 언론은 말합니다. 어떤 기관에서는 서류전형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특채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피해 입을 우리의 젊은 아이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손바닥만한 고시촌에서 죽으라고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특채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특채를 한다고 하면서 악이, 죄가 다 빼가고 맙니다. 그것 때문에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눈물 흘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또 최근에 보도된 바 있는데,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들이란 철이 없지 않습니까? 연예인이라면 무조건 좋아서 따라가는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철이 없는 그 아이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연예인이 되게 해준다고 하여 온갖 못된 일을 다 시키지 않았습니까? 성상납 하게하고, 나중에 그걸 거부하자 부모에게 이른다고 협박까지 한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죄입니다. 구조의 죄입니다. 

여러분들도 보셨겠지만 최근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공직의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군대를 가지 않고 위장전입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당한 이유로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고, 위장 전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빠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정상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1년 후에 비정상으로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검색해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 그렇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저도 화가 좀 났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고시 시험을 보았습니다. 1차를 본 후 2차를 준비하는데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자동적으로 휴학이 되어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어떤 연유에서 국군통합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군의관 소령이 너는 돈을 내고도 군대를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고시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인이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현역입영 명령서였습니다. 신체검사를 하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었습니다. ‘아야’ 소리도 못하고 군대에 끌려갈 판이었습니다. 병무청에 가서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신체검사 원본을 보았더니 2을로 판정 난 신체 등급이 빨간 줄이 그어진 후 1을로 되어 현역 판정이 되어있었습니다. 

군대 간 일로 나라 탓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군대 가서 저는 참 좋았습니다. 만약 제가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인생의 큰 손해를 보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수많은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정상을 비정상으로 바꿔서 혜택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없는 사람들을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어 기어이 군대에 집어넣었습니다. 33개월간 군대생활을 하고 돌아왔는데 저로서는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찌하든 사회의 병폐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착한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겠습니까? 남 탓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통탄하지 못하고 이것까지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서슴지 않고 하다 보니 그 죄가 점점 더 커져가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신자들은 내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사회의 구조적인 죄까지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기독교신자들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슬픔을 보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일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 눈에 보이는 사람의 슬픔 뿐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까지 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슬퍼하시겠다, 참 괴로워하시겠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다면 여러분들은 참된 기독교 신자에 상당히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그러했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보고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곧 망하게 생겼으니 참으로 슬퍼하시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2-3)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사1:5~6) 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거의 망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전부다 죄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었고 사람은 병들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니까 여기저기서 병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지만 얼마나 많이 괴로워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렘8:18-19) 라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께 오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데, 가정이 일어설 수 있는데, 나라가 일어설 수 있는데, 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데 왜 하나님께 오지 아니하는가?’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슬픔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친정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데 시집간 딸아이는 이렇게 미안하고 저렇게 미안하다하여 아버지에게 오지 않으니 아버지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하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먼 곳에서 굶주림에 떨고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픈데 이 아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이가 안 좋으면 치과에 가게하고, 눈이 안 좋으면 안과에 가게하고, 귀가 아프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아버지가 다 치료해줄 텐데 말입니다. 아버지가 가진 돈이 누구를 위한 돈입니까? 아들을 위한 돈이고 딸을 위한 돈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것이 다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의사를 많이 준비하셨는데 누구를 위해서 준비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 오기만 하면 다 누릴 수 있는데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레미야가 장탄식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 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렘9:20-22)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 탄식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이렇게 안타까워합니다. 내가 살만하다고, 나에게 어려움이 없다고 웃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편하고 나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함께 우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 사무엘은 이것을 알고 너무 슬펐습니다. 자기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도 슬펐지만 사울을 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세운 왕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다른 사람들 몰래 살짝 가서 사울에게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는데 하나님께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슬펐습니다. 자기의 슬픔이 아닙니다. 그렇게 귀하게 선택한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플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삼상15:35) 라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울을 슬퍼서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이 슬픔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삼상16: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마음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얘야, 너도 슬프겠지만 너보다 내가 얼마나 더 슬프겠니? 내가 선택한 내 사람을 내가 버린 나의 슬픔을 보고 너도 참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슬픔으로 보고 그것을 자기의 슬픔으로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이런 위대한 믿음의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이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세상의 죄를 슬퍼할 때는 여러분 때문에 이 나라에 은혜를 주시고,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현대 교회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참된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고 세상의 기쁨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셨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또 교회가 세상적인 기쁨을 선호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를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을 찾지 아니하는 피상적인 기쁨만 추구하는 기독교로, 피상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어가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천한 기독교, 천한 기독교 교회로, 아주 무능하고 권세도 없는 교회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교회에 사람도 많고 돈도 많습니다.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경받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존경받지 못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에 비해 2,000년 전의 사도바울 일행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몇 사람 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얻은 별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껏해야 두 세 사람 정도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어마어마한 교회들, 어마어마한 돈들을 가지고도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는 커녕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날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때는 두 세 사람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된 기독교인 그리고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존경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이 참으로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눈을, 발길을 교회로 돌리는 것은 교인들이 본래의 모습을 찾을 때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이 될 때, 참된 교회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눈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존경하는가? 세상이 기독교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는가는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오는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돈이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있고 없음에도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는데, 슬퍼하는데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슬픕니다. 그러나 병적으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비참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은 고귀한 슬픔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고뇌합니다. 그러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침울하게 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고뇌가 있는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애통함을 통해서 특별하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애통하면 우리 주님을 특별하게 만나는데 소망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데서는 희망도 소망도 없이 침묵의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애통하게 되면 소망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위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그 위로를, 정말로 깜짝 놀랄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그리고 세상은 절대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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