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초가 발라야! (고전 3:9-17)

  • 잡초 잡초
  • 454
  • 0

첨부 1


기초가 발라야! (고전 3:9-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지난번 수요일 말씀에서 우리 모두를 농사짓는 사람들에 비교하면서 열심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되 겸손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 소명을 감당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섬기는 자로서 그 소명을 다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우리는 인생의 집을 짓는 자로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터 위에 그날에도 튼튼히 서 있을수 있는  믿음의 집을 짓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상가나 건축가가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것에 맞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이는 그 기초가 그 위에 세워질 사상이나 건물에 맞게 닦여 있어야 그 위에 세워지는 사상이나 건물이 온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믿음의 집을 짓기 위해서도 그에 맞는 기초가 필요하지요. 그 기초를 우리는 사도들의 터 즉 예수그리스도의 터라고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이 본문 10절과 11절을 한 번 살펴보면 첫번째로

사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집터를 닦는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교를 하면서 성도들을 향해 너희들은 내가 닦은 그 기초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초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도들의 터 즉 예수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믿음의 집을 지어가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터 위에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집을 지어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뜻은 예수라는 기초 없이 세워지는 어떠한 믿음의 집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집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기독교회에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성도들이 믿음의 집을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의지하던 샤마니즘적 요소의 믿음위에 기복적 요소로 믿음의 집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예수를 믿으면서도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누구에겐가 물어보기를 좋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면 무엇보다 먼저 교회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더 심해지면 교회를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소명을 수행하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에 교회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도 교회의 헌금도 그 일 즉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형식을 보이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의 기도는 대부분 무엇인가를 달라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 오직 한 방향 / 만사가 형통하고 / 자손이 번성하고 / 그 자손들이 출세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것 / 즉 본인의 신상의 부귀와 영화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내가 어찌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인가, 내가 어찌하여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바르게 수행하여 / 

그 분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라는 성화의 고민, 성도의 고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고민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의 오류에 빠지지 아니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기초에 반드시 사도들의 터 즉 예수그리스도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초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늘 상고해야 하지요.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바르게 수행하며 / 그 날까지 /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구로서의 삶을 /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별 구성원인 성도들이 / 영위하는 / 모든 삶과 / 모든 행위들 또한 /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격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들의 삶이란 / 단순이 도덕적으로 바른 생활의 삶,/ 윤리적으로 옳고 반듯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 성도의 삶이란 예수께서 구주가 되신다는 고백의 결과로서의 삶이요 고백의 열매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선하고 정직하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 기초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이 전제되어 있지 아니 한다면 그 행위는 단순히 인간적인 선행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선행을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행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의 터 즉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위에서 / 행하여지지 아니한 행위는 / 그 행위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요 / 희생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 마지막 심판 때에 자신을 구원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위에서 행하여진 성도의 행위들만이 영구한 가치가 있는 믿음의 행위로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바른 신앙고백으로부터 / 귀결된 믿음의 행위들만이 / 그날에 / 그 마지막 날에 /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것들, 믿음의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을 통하여 닦아진 그리스도의 터를 / 신앙의 기초로 받아드린 우리 각자는 / 그 터 위에 우리의 믿음의 집을 지을 차례입니다.

본문 12절로 13절을 같이 살펴보면 두 번째로 사도는 본문에서 믿음의 집을 짓는 재료로 / 여섯 가지의 / 재료들을 /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 종류는 불에 타는 재료이고, 세 종류는 불에 타지 않는 재료입니다. 믿음의 사람인 성도가 어떠한 재료로든지 그리스도의 터 즉 믿음의 터 위에 믿음의 집을 세우면 그 성도의 / 믿음의 공력이 지어져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날에는 그 공력을 보기위해 주께서 불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베드로 후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로 13절을 찾아 살펴보면 여기서 주의 날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이지요. 본문은 바로 그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은 바로 불로 인한 심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불 심판이 있는 그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무릎을 꿇어 자기가 행한 모든 일들 심지어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한 것까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서14장10절로12절을 과 고린도후서5장10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말씀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행위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믿는 자들 까지도 선 악 간에 자신이 행한 모든 일과 행위에 대하여 상벌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치 있는 재료로 믿음의 집을 지은 성도는 우리주님 심판대 앞에 서서도 주님을 만난다는 그 기쁨으로 인하여 두려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설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러한 사람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초대교회 성도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 스데반이 돌을 맞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보라 !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일어서신 것입니다.  감격하셔서 일까요?  아니면  화가 나셔서 일까요? 여하튼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보좌에서 일어서게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주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온 성도라면 비록 최후의 심판 날이 되어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지요

본문은 이러한 사람들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합니다. 이들이 믿음의 집을 지을 때 사용한 재료가 바로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좋은 재료입니다. 이러한 재료로 공을 들여 집을 지었다는 의미는 성도가 이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혜 즉 하나님의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희생의 삶, 헌신의 삶, 순종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산다는 것은 / 사람이 오직 /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 능력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임을 자부 하면서도 / 실제 / 일상의 생활에서는 / 세상의 지혜를 따라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산다는 것은 / 믿음으로 / 하나님의 능력으로 / 예수의 사랑으로 / 사는 바른 신앙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십자가의 복음에 나타난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 뜻대로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성도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놓여지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에 있습니까!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분은 물질을 축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 여러분 스스로 내려 보시고 / 그것이 여러분 / 일신의 부귀와 평안함을 위한 것이라면 / 여러분의 신앙을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불에 타지 아니 할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반드시 천국에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 보상이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고린도 전서 4장 5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칭찬일수도 있고 야고보서 1장 12절 말씀대로 생명의 면류관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급은 구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상급을 받을 자격을 처음부터 상실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상급을 받는 사람치고 구원의 선물을 받지 못할 사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의 믿음의 집을 짚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불에 탈 무가치한 재료로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 15절을 살펴 보면 본문은 성도가 열심히 믿음의 집을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공력이 그날에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교사로서 / 그리고 집사로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교회의 장로로서 / 목사로서 /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날에 그분 앞에 섰을 때 우리의 공력이 불에 타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건축자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평생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동분서주하면서 열심히 믿음의 집을 세우려고 뛰어 다녔으나 실제는 무가치한 것들을 세우기 위해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일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하려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 끼리 분파를 조성하고 눈에 보이는 인간지도자를 추종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의 불순한 동기를 좇고 세상적인 불순한 동기를 따라 명예와 인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믿음의 집을 지어갈 때 이렇게 무가치한 재료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를 사도들의 터,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둔 사람들이기에 비록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성도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부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 이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신앙의 기초로 받아들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인하여 구변과 지식의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이며 스스로는 지혜와 성령을 소유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지요. 아직은 육신에 거하여 신령한 젓, 즉 성화의 삶이 더 필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구원만은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비록 마지막 날에 그 공력은 불에 다 타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두를 백성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구원을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이르는 날 / 우리의 신앙은 주님 앞에서 양파껍질 벗겨지듯 벗겨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얼굴이 붉어지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겉보기에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여겨지는 / 우리 믿음의 행위들이 / 하나님으로부터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도록 / 말씀으로 / 우리의 삶을 / 자주 / 매우 자주 /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겉모습보다 우리의 속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던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 그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대낮에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기억합시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서 내장이 보이는 공어와 같은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그리하면 주님 앞에서 조금은 더 순종적인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들의 터,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우리믿음의 기초로 확실하게 받아들여 그 터 위에서 우리들의 신앙을 세워갑시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그리고 믿음의 집을 짓는대 가치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말씀 묵상하기를 그치지 맙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일생동안 세워갈 믿음의 집에 필요한 재료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