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당신의 자아상은 건강합니까? (출 3:11-12 ; 출 4:17)

  • 잡초 잡초
  • 504
  • 0

첨부 1


당신의 자아상은 건강합니까? (출 3:11-12 ; 출 4:17)


미국 동부 펜실베니아주에 가면 아미시 마을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독일 계통의 사람들 중에서 문명과 담쌓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급한 전화는 있지만 학교도 정식 학교가 없고 지금도 검정색 옷에 수염 기르고 마차 차고 다니는 마을입니다. 여기는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느 남편이 아내와 아들을 두고 사는데 아내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몸매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요. 어느 날 남편이 아들과 함께 큰 도시에 나와서 백화점 구경을 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신기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중에 더욱 신기한 것은 엘리베이터였습니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아들과 함께 가만히 서 있는데 조그마한 회색 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들어갔다가 문이 닫히고 난 다음 가만히 보면 위에 숫자가 있는데 그 숫자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합니다. 한참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너무너무 신기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어느 못생긴 부인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몇 층까지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한 참 있다가 내려 오더니 문이 열리며 25세 정도의 어느 멋진 여자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남자와 아들은 너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야 너무너무 신기하지? 야, 집에 가서 엄마 데리고 와라.” 했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못생긴 여자가 몇 층 올라갔다 내려오면 멋진 여자로 바뀐다고 생각해 자기 아내를 데려올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굉장히 자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우리 국어사전에 보면 자존감이라는 말이 어떻게 표현이 되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 이런 것을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자존감이 없습니다.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부모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못났기 때문에 자기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 자기처럼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어떤 일을 맡아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자존감이 없으니까 자식들에게도 커다란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말도 많이 하지요.   

우리나라 말 가운데 좋지 않은 속담이 있습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이것은 저주지요! 절대로 우리 부모들이 사용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고 칩니다. 못날 수 있지요. 공부도 못할 수 있고, 지금은 못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지금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 아이를 저주합니다. “넌 안돼.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자녀를 포기합니다. 자녀에 대해 낮은 자존감을 갖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부터 그런 저주와 욕을 듣고 자라기 때문에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잘 되는 게 기적이지요. 

4살 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하도 사고를 치니까 아들을 부를 때마다 “망나니”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이가 한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늘 망나니 소리를 들으니까 이 아들은 자기 이름이 망나니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 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이 아들이 나가서 문을 열어줍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 손님이 묻습니다. “이름이 뭐니?” 그랬더니 이 아들이 “망나니 입니다.” 늘 아버지가 망나니라고 하니까 자기 이름이 망나니인줄 알았지요. “망나니 말고 네 이름이 뭐야?” 그랬더니 “예, 제 이름이 망나니 입니다.” 아버지가 왔습니다. 아들과 이 신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얼굴이 시뻘개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아들이 자기의 이름을 망나니라고 사람에게 소개를 했을까요? 이 집에 방문했던 사람이 돌아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도 망나니가 될 것이다. 망나니라고 불림을 받은 사람은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존감, 이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한 존재로 만드셨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셨다고 믿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망나니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낮은 자존감은 갖는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자세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이렇게 못난이로 망나니로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가진 것 없고 배경 없고 배운 것 없고....... 여러분 만약에 이런 것이 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낮은 자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고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낮은 자존감을 갖는 실패한 인생으로 우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높은 자존감 건강한 자아상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말 대로 모세가 가졌던 그의 낮은 자존감!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높은 자존감을 갖는 건강한 자아상으로 만들었을까를 보여주는 아주 귀한말씀입니다.  

첫째로, 모세의 성장과정과 그 후의 배경(참조/출2:10-21)  

먼저 우리는 모세가 어떤 배경에서 자랐으며 어떻게 지내게 되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그 때 당시에 히브리 여자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낳자마자 아들을 살리려고 바구니에 담아서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바로의 딸 공주가 나일강가에서 목욕을 하다가 바구니 하나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이 바구니 안에 있는 아기가 잘 생겨서 자기 아들처럼 데려다가 기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로 자랍니다. 성경에 보면 약 40년 가까이 이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 교육을 받습니다. 부귀영화를 다 받지요. 언젠가 바로의 뒤를 이어 바로가 될 수도 있는 위치까지도 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모세가 바깥을 거닐다가 이집트 사람이 같은 동족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바로의 궁정에서 이집트 식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자기 자신은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농락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것 같아 그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이고 모래 속에 묻었습니다. 며칠 있다가 또다시 밖을 거니는데 같은 히브리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찾아 갔습니다. “어찌하여 같은 동족끼리 싸우느냐? ” 그랬더니 히브리 민족 두 사람이 싸우다 하는 말이 “당신이 며칠 전에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더니 지금은 우리를 때려죽이려고 참견하느냐?” 이 말을 듣고 모세는 자기가 며칠 전에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났다고 생각해 그 길로 도망을 갑니다. 모세가 그런 일로 도망 간 것을 안 바로는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왕자에서 살인자로 이제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이집트 궁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숨어 들어가 거기서 방황을 합니다. 그 때 나이가 약 40세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요즘 나이로 30세 정도 되는 청장년이었지요. 모세가 그곳에서 방황하고 있던 어느 날 우물가에 웬 여자들 몇 명이 와서 이 양떼나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이 여자들을 내쫓고 시비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가서 이 여자들을 구해줍니다. 이 여자들을 가축에게 물을 다 먹이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어찌 그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느냐? 집으로 데리고 오라.” 모세가 그 집에 와서 묵는데 자기도 있기를 원했고 그리고 그 집의 주인 미디안의 제사장인 르우엘이라는 사람, 출애굽기는 그 사람의 다른 이름이 이드로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집에 머물게 되지요. 그 집에 큰 딸 십보라와 사랑을 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이라고 불렀어요. ‘게르’라는 말은 추방하다는 뜻이고 ‘솜’이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아들을 낳고 난 다음에 이름을 지은 것이 ‘그곳에서 내가 추방을 받았다.’ 다른 뜻으로 이야기 하면 내가 객지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모세는 도망자가 되어 이제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의 일생을 가만히 보면 계속해서 추락을 합니다. 얼마나 자존감이 낮았겠습니까! 내가 왕자였었는데 이제는 살인자가 되고 도망자가 되고 지금은 들에서 양이나 치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나머지 아들의 이름을 ‘내가 객지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그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낮은 자존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이런 현실을 가만히 보면서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그가 낮은 자존감을 인생을 포기하며 살아왔는가를 보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옛날에는 내가 잘 났었는데 잘 나갔었는데 괜찮았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너무 너무 볼 것이 없다고 해서 마음 아파하고 자존감이 너무너무 낮아 좌절과 절망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모세 같은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두 번째,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심 (출 3:4)  

이렇게 좌절과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출애굽기 3장, 4장에 보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가 가축들을 데리고 호렙산 근처에 갑니다. 가만히 보니 산 중턱에 어느 한 나무가 시뻘겋게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이 번지지 않았습니다. 하도 이상하게 생각해 양들을 놔두고 그 나뭇가지 근처로 같더니 떨기나무 하나가 불이 환하게 붙었는데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해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니까 그 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으라.” 모세는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야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지금 400여년 가까이 종살이 하느라 그들이 고통당하고 아파하고 신음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그러니 내가 내 백성을 이제 해방시키려고 하는데 너를 민족 해방자로 삼겠다. 네가 가서 내 백성을 데리고 나와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지금 모세는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Nobody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도망자요 살인자요 목동이요 이름도 없이 살아가는 무명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고대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불러줬다고 하는 말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겠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내를 부를 때, 어이! 그러면 좋겠나요? 어이가 뭡니까? 소나 돼지인가요? 우리는 분명히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체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모세야! 모세야!”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모세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땅에 살아가시는 동안에 가진 것 없고 백 없고 지위 없고 배경 없어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낙심하며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곁에 다가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말은 여러분과 함께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의 현실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아픔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듯이 오늘날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여러분 곁에 다가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자 하심 (출 3:7-10)  

그러면 하나님은 왜 모세를 불렀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바로에게 보내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는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지요.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어떤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고 가진 것 많고 배경 있는 사람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가진 것은 없지만 능력 없지만 재능 없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불러서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변화시켜 위대한 사람으로 삼고자 사람을 부르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 능력이 있어서 재능이 있어서 배경이 좋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온 것이 아니고, 좌절과 절망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눈물 흘리고 인생을 포기하려고 했었으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저의 이름을 우리 모두의 이름을 부르사,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 사람의 인격과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어 그 사람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변화시켜 높은 자존감 건강한 자아상을 갖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이름 없는 존재, 낮은 자존감 때문에 절망하고 눈물 흘려가며 삶을 포기하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가 만나 그들을 일으켜 세워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게 하십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어서 상여가 되어 무덤으로 가는 사람들, 38년 된 병자,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모두 다 좌절과 절망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 곁에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절망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기 위하여 지금 오셨고 이 자리에 임재 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름을 부름 받는 사람, 하나님이 부르는 사람,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위대하신 사명을 맡겨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한 일생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유를 달아 거절함  

우리는 가야할 곳이 많습니다. 바로에게 가야합니다. 세상에 가야합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이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가야하는데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절합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에 모세는 끊임없이 이유를 달아 거절합니다. 하나님 나는 못갑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도망자고요. 나는 살인자고요, 나는 목동이고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혀가 뻣뻣해 말도 잘 못합니다. 무섭습니다. 사람들을 나를 보고 네가 만나는 하나님이 누구냐고 하면 내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모세는 수도 없이 많은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하여 끝까지 거절을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왜 부르셨나요? 여러분이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이 불렀습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워서? 더 잘나서 하나님이 부르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의 환경과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하나님께 핑계를 댑니까? 하나님, 내가 아닙니다. 나는 못해요. 저 사람은 할 수 있지만 나는 못해요.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어 우리를 부르시는 데도 불구하고, 사명을 주어서 세상에 보내시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핑계를 댑니까? 모세는 수도 없이 하나님께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사명을 맡기실 때에는 반드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함께 하심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다섯 번째, 모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은사가 없다고 주장

우리는 은사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사람 앞에만 서면 난 얼굴이 빨개집니다. 나는 목이 뻣뻣한 사람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내게 은사도 주시지 않고 무슨 사명을 허락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모세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던져봐라.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아라. 다시 잡았더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능력입니까? 손을 가슴에 넣어봐라. 넣어다가 뺏더니 나병이 걸렸습니다. 다시 집어넣어라. 다시 넣었다가 뺏더니 손이 다 나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가 뱀이 된 것도 나병손이 되돌아 온 것도 모세의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우리를 보내실 때에 우리가 능력 있고 자격이 있어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기적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주사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네 능력이 아니고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계속해서 거절을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 눈을 누가 만들었느냐? 네 입을 누가 만들었느냐? 누가 말을 잘하게 만들었고 누가 벙어리가 되게 만들었느냐? 내가 아니냐?” 
  

끝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건강한 자아상을 갖기 원하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모요?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위대한 능력을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조건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우리는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바로가 아니라 홍해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을 이기게 하십니다.  

왜 우리가 낮은 자존감을 가질 수밖에 없냐하면, 그것은 나만을 바라보며 인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순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는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기만 하면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이 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게 하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loser, 그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받고 난 다음에는 그는 더 이상 옛날의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움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조건과 환경이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만 바라보지 마시고 인간의 눈으로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고 믿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모든 능력과 은사를 받기만 하면, 여러분은 지금의 여러분이 아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아상은 우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한 존재로 만드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고 건강한 자아상을 가져서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