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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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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5)
 

성령강림 주일 이후로 오늘까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령 안에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이상한 성령론으로 휘둘리지 마시고 성령 안에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오늘은 성령 안에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 목표는 예배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도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으로 그들이 제일 먼저 누리는 삶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얻은 백성의 처음 삶의 목표는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보다 우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성령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들었는데 이를 갈무리하는 입장에서 히브리서 본문을 택하여 우리의 예배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원얻은 삶을 예배로써 더욱 새롭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번에 히브리서를 강론할 때도 말씀드렸듯이 히브리서의 주제는 10:21-22절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럼 왜 이런 주제로 히브리서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독자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나 배경이 히브리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주제적인 권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런 것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10:32-39절을 보시면 어느 정도 히브리서에 나타난 교회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에 나타난 교회는 이미 큰 핍박을 받았던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고 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며 자기 소유까지도 빼앗기는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핍박을 기쁘게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소유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앞에 더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순교의 피도 각오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습니다. 12:4절을 보면 이런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더 큰 핍박으로 인하여 교회가 낙심하고 뒤로 물러서며 심지어 배교하려는 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10:37절 이하에 말하는 바와 같이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피곤하여 낙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계속되는 핍박과 박해에 이 교회는 낙심케 되고, 주의 재림은 지체되고 있으니 처음 열심을 버리게 되고, 결국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배역하는 자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다른 서신과 다르게 경고문이 매우 많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히브리서는 앞서 말씀드린 주제처럼 ‘우리에게 큰 제사장이 계시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아서는 이런 주제로 권면하는 것이 제가 생각해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엄청난 시련과 박해를 당할 교회에게 ‘제사장이 계시니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한다면 사실 잘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교회가 처한 상황과 권면이 서로 맞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박해에 맞서서 더욱 힘을 내 싸우자고 하면 더 낫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없이 이런 주제로 권면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 주제로 권면하는 것이 제일 적당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럼 히브리서의 저자는 어떻게 전체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그 흐름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주제를 따라 히브리서의 저자는 제일 먼저 아들로 말씀하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아들로 말씀하신 구원을 모세로 말씀하신 구원과 비교하여 ‘큰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맛보시고 죽음 가운데서 일어나사 큰 영광과 존귀를 얻으신 아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이끌어 자기 영광에 참여케 하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모세는 종으로 봉사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로 봉사했다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언약을 대비해서 말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약혼의 언약보다 결혼의 언약은 더 큰 언약인 것과 같습니다. 약혼의 언약을 등한이 여겨서 받는 상처보다 결혼의 언약을 소홀히 여겨 받는 상처가 훨씬 큰 것처럼, 아들로 말씀하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더 큰 저주와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경고합니다. 
  
이처럼 아들로 말씀하신 더 큰 구원에 대하여 말씀한 후에 4:14-16절에 큰 대제사장이 계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심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왜 히브리서는 주제말씀에서 대제사장이 계심을 말했던 것입니까? 고난과 박해 가운데 있는 교회에게 왜 이런 권면을 하게 된 것입니까? 그건 바로 때를 따라 돕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도울 수가 있습니다. 이 분이 죽음 가운데서 일어나사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만약 백혈병이 걸렸는데 그 병을 이기고 나은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구를 돕습니까? 같은 백혈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됩니다. 똑같은 병에 걸렸는데 나은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백혈병 환자들은 이 사람을 보고서 희망을 갖습니다.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질병과 싸워 이기도록 합니다. 바로 이런 도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이기신 분이 계시니, 이 분이 승리하고서 승천하셨으니 이 분을 굳게 잡고 나아가면 히브리서의 교회도 같은 승리를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능히 도울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의 탁월함을 아론의 반차를 따라 난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난 전혀 새로운 제사장이라고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7:4, 15절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족보부터 아론의 대제사장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기 약점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신약의 제사장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히브리서는 8:1-10:18절까지 이 대제사장이 계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이 무엇인지 그의 직무를 따라 설명합니다. 이 대제사장은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자기 죽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또 죄를 이기는 생명을 주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해마다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똑같은 제사를 반복해서 드린다는 것은 그 제사가 일년치의 속죄밖에 이룰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음 해가 되면 또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일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을 따라 같은 제사를 반복해서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영원히 온전케 되신 분이십니다. 다시 반복해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11-14절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성소를 봉사하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옛 언약의 제사장과 새 언약의 제사장으로 비교합니다.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는 제사장을 통해서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에서 우리에게 있는 제사장의 족보와 성소를 봉사하는 직무가 얼마나 탁월한지 말했습니다. 이 탁월한 제사장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큰 시험을 당한 교회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의 교제를 누리려면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어떻게 이루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의 큰 흐름을 몇 개의 부분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제를 잘 살펴보시면 됩니다. ①아들로 말씀하신 구원, ②큰 제사장이 계시다, ③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④나아가자. 위의 ①번과 ②번은 이미 히브리서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젠 설교본문 이후로 ③번과 ④번의 내용을 말할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다. 19절에 우리가 담력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무엇에 필요한 담력입니까?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담력입니다. 이 담력은 어디서 왔습니까?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그럼 어찌해서 예수의 피가 담력을 얻게 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은 구약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뿌려 일년 일차 지성소의 속죄소까지 나아갔습니다. 그 때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 끝에다 방울을 달기까지 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죽으면 갈고리를 집어넣어 끌어내야 하는데 그 죽은 것을 아는 것은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승천하신 대제사장을 따라 그의 피로 성소에 들어감은 죽음을 이기신 권세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이어서 두려움이나 떨림이 아니라 담력을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떨며 나아감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길로 들어가야 합니까? 20절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새로운 구원의 길입니다. 그 길은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휘장을 지나 일년에 한 번 나아갔던 구약의 대제사장의 길을 말하면서 새로운 길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휘장으로 가리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처럼 구원의 길을 성소의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길로 설명합니다. 우리 영혼이 자기 육체에서 빠져나와 저 하늘 우주 공간을 날아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소에 대제사장이 나아갔던 길을 따라 새로운 구원의 길로 하늘 성소에 나아가는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어떻게 들어가야 합니까? 제사장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큰 제사장은 앞에서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능히 도우시는 제사장이라고.
  
그럼 제사장을 통해 어떻게 들어갈까요? 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것도 구약의 제사장이 성소에 나아감을 따라 말한 것입니다. 번제단을 통과하여 물두멍에서 씻고 나아갔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을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바꾸어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같으면 온전한 제물을 드려 나아가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흠이 없는 어린 양이나 짐승을 잡아 드려야 온전하게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더 이상 반복해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제사를 드려 완성하신 그 길을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 이것은 또 어떻게 나아가는 것인가? 23-25절에 이에 대하여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11장과 12장에 말합니다. 그리고 13장에 그 나아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먼저 23-25절을 보십시다. 그 나아감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그 미쁘심은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본문과 가깝게는 20절의 말씀으로 그 몸을 찢으시고 새로운 살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심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옛 언약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미쁘심을 얻으셨습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함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격려한다는 말을 조금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자극하자는 말입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사랑과 선행을 자극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신약백성의 새로운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약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은 것 때문입니다. 자주 모이기를 폐합니다. 그냥 모임이 아니라 ‘모이기’입니다. 어떤 정기적인 모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모이기를 폐합니까? 히브리서의 교회가 갖고 있는 배경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교회에 닥치는 큰 고난과 시험 때문입니다. 
  
로마의 박해 아래 있었던 초대교회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들이 동굴을 파서 모였던 것은 박해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북한의 신자들이 모이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공산주의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북한의 신자들이 남아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볼 때 그들이 그 신앙을 어떻게 지켜냈는가 생각해 보면 압니다. 아마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을 것입니다. 
  
모이기를 게을리하거나 폐하기를 습관적으로 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길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로마의 박해도, 공산주의의 핍박도 없는데도 아주 쉽게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게으르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의 날에 모일 때 생명을 걸고 모이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조금만 몸이 좋지 않아도 모이기를 폐하고, 무슨 사정이 조금 생겨도 쉽게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큰 박해를 앞두고 있는 히브리서의 교회에게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11장과 12장에 말합니다. 먼저 11장은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합니다. 그럴 때 히브리서는 믿음의 온전함을 굳은 결심이나 의지로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두고 설명합니다. 11장은 앞에 나온 믿음의 증인들보다 오히려 그 끝의 39-40절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은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집을 살 때 계약금을 치렀다고 저 집이 내 집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잔금을 치르고 집문서를 손에 받게 되면 확실히 그 집은 내 집이 된 것으로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 백성들은 아직 확실한 부활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증거를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약백성은 확실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럼 누가 더 확실하게 믿음으로 걸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까? 구약 백성입니까? 아니면 신약백성입니까?
  
더구나 히브리서는 신약 백성의 믿음이 아니면 구약백성의 믿음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마치 릴레이 경주에서 마지막 경주자가 제대로 달리지 않고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앞에 달렸던 자들이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처럼 구약의 믿음을 이어받은 신약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제대로 경주를 다하지 못하고 배역하거나 시험에 물러서면 그 믿음의 경주는 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3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경주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두껍게 걸치고 나서는 선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해야 합니다. 그 경주는 빨리 끝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달려야 합니다. 그 골인점은 어디입니까? 믿음의 주를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그 분이 믿음의 경주 신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목표를 보고 달려야 합니다. 
  
그 분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의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조롱하며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하였어도 그는 피곤하여 낙심하시지 않으셨고 참으셨습니다. 이게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전략으로 승리하셨으니 그 승리의 모델을 보고 우리도 끝까지 인내하며 달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온전한 믿음으로 달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그 경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나아감은 곧 제사입니다. 그리고 예배입니다. 이를 13장에 말합니다. 나아감의 구체적인 일들을 제시합니다. 13:1절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 나아감의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합니다. 13:12-16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주님처럼 고난을 지고 나아가십시다. 치욕을 짊어지고 나아갑시다. 왜 고난과 치욕을 겪어야 합니까?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올 것을 찾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에도 불구하고 항상 찬송을 부르며 나아갑니다. 이런 예배는 선을 행함과 나누어 주기가 따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나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흠향하셨던 그 제물과 제사와는 다르지만, 선을 행함과 나누어주기로 나아갑니다. 그게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의 참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좋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전쟁 통에 만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만났는데 전장 한 가운데였습니다. 근데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 모두 만나자마자 총을 맞고 마지막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서로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최대한 연인에게 가까이 가려고 손을 뻗쳐서 맞닿게 하려 애를 씁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의 예배에 참여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면서도 서로 만나고 접촉하려고 애를 쓰는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 바로 신약 백성의 ‘모이기’입니다.
  
그런데 이 ‘모이기’가 얼마나 헐값으로 매도되고, 이 ‘모이기’가 자기 만의 것으로 변질이 되며, 이 ‘모이기’가 얼마나 쉽게 폐하여지고 있는 것입니까? 형제사랑이 폐하여지고 있습니다. 선행과 나누어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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