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도리어 복을 빌라 (벧전 3:8-12)

  • 잡초 잡초
  • 1345
  • 0

첨부 1


도리어 복을 빌라 (베드로전서 3:8-12)

     
베드로는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과 주종관계, 가정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것도 나를 억울하고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부탁하는 말이 오늘 읽은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둘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첫째 내용은,‘마음을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입었으니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8,9절)  

베드로전서에‘부르심을 받다’는 말이 몇 번 반복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입니다.  부르신 이유는 이미 1:15에 분명하게 언급되었습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잠시 왔다가 떠날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산 소망을 두고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악하고 썩어지고 더럽고 사라질 것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재미있고 부족함이 없으며 더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면 그 사람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너무 많고 이 세상에 맺힌 한이 많아 그것 다 풀고 내 원대로 살아보겠다 생각하는 사람도 나그네가 아닙니다.  나그네는 그 땅에 소유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떠날 때는 잘 지냈습니다 하고 두고 가는 사람입니다.   임시로 머무는 동안 주어진 기회와 시간과 물질과 건강을 선하게 사용하여 가족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지혜로운 나그네입니다.  떠날 때를 모르고 욕심부려 손에 움켜쥐고 나도 남도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나그네임을 모르고 사는 어리석은 나그네입니다.  

베드로전서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는 이 세상 나그네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같은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주는 위로와 소망의 편지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 속에 시련과 고난이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편지가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교우들이나 핍박 당하고 불태워 죽임 당하는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이 이 편지를 읽는다면 우리보다 훨씬 감동적인 마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편지가 나에게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도록 하나님께 불같은 고난과 시련을 부탁하시겠습니까? 평온하고 안전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나의 환경을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난과 질병과 전쟁과 핍박이 고난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풍요와 편안함과 게으름이 그 영혼을 어두움과 멸망으로 이끄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셨을 때는 부르실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하나님을 본 받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며  도리어 복을 비는 마음으로 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삶이었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에서, 다윗이 지은 시편 34편의 일부를 인용하여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쫓겨다닐 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하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과 해결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고 이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지만 주의 낯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향하신다’ 하였습니다.   

이 찬송시는 다윗이 목숨이 위협을 받는 긴박한 상황을 벗어나 유대 광야로 도망친 후 지은 시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블레셋 지방으로 급히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알아본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 왕에게 고발하여 그곳에서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블레셋 왕 앞에서 갑자기 미친 체 합니다. 대문짝을 긁기도 하고 침을 흘려 수염에 묻혔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본 블레셋 왕은 이런 미치광이를 왕 앞에 데려온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죽을 뻔한 위기를 이런 방식으로 모면한 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지만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지만 사울에게 아무 보복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살려주었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 속으로 사울 왕이 잠간 쉬러 들어왔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니 사울의 목숨을 거두자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증거물로 잘라내고 그의 목숨에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왕의 옷자락을 벤 것 때문에 마음이 찔렸던 사람입니다 (삼상 24:4,5).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군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쫓던 사울이 밤에 잠을 자는 사이에 다윗이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천막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다윗의 부하 아비새가 깊이 잠든 사울을 보고‘내가 사울을 창으로 찔러 땅에 꽂아버리겠으니 허락하소서’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해치지 말라고 말립니다.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고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들고 나왔습니다(삼상26:7-11).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이방인들 앞에서 미친놈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분하구나 당장이라도 칼을 들어 끝장을 내겠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믿고 맡겨드렸습니다.  

베드로 역시 주의 복음을 전하며 다윗처럼 억울한 일을 만나고 수모를 당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들,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도리어 복을 비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 베드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베드로는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싫어하고 언제나 머리가 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제자들끼리 경쟁을 하면 언제나 일등이 되고픈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 본문처럼 그런 말을 절대 하지 못했을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이른 새벽에 대제사장이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호신용으로 품고 다니던 검을 빼어 순식간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보면 그가 한 성질 하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빰도 돌려대라’(마5:38, 39) 하신 주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들었지만 절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이지도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성격에 어떻게 양쪽 뺨을 다 내주며 바보처럼 맞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억울한 일 당하면 가만이 앉아 참고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 욕을 먹으면 갑절로 혹은 몇 갑절로 갚아주려고 벼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예수님을 닮고난 후 영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지만 세상의 법칙은 그렇지 못합니다. 악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야 속이 후련하고 용기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나를 욕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야 상대방에게 밀리지 않고 아무도 나를 얕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웃으며 당하고만 있으면 더 당하게 되고 바보취급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헐리웃 액션 영화나 중국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세요.   정의를 위하여 복수의 칼을 멋지게 뽑는 영웅들입니다.   악당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은 부모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아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무술을 갈고 닦아 드디어 무림의 고수가 됩니다.  부모의 원수를 찾아가 시원하게 복수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스토리들이 제가 어릴 때 즐겨 보았던 만화나 영화들이었습니다.  요즘도 거기서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겠지요?  

오른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도 돌려대며 또 때려주세요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속도 없고 배알도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십상입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당하실 때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뺨을 치며 누가 때렸는지 맞춰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오른 손에 갈대를 쥐어주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희롱하였습니다.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 모든 모욕을 잠잠히 받아들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신 다음에 비로소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으로 충만하였을 때 예수님의  말씀과 보여주신 삶을 나의 것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살기로 결심한 베드로는 전에 욕심 많고 경쟁심으로 충만하며 불뚝불뚝 혈기 부렸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한 방식으로 갚지 않고, 나를 욕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욕하며 이기려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리어 복을 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다시 묵상합시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칩시다.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맙시다. 우리의 혀와 입술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이웃을 칭찬하며 복을 비는 일에 사용하도록 주어졌습니다. 나의 언어생활은 깨끗하고 건강합니까?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모든 사람과 화평을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나에게 이득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선한 방법이 아니면 즉시 멈추어야 합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은 세상이 주는 속삭임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는 예, 아니요는 아니요가 되어야 합니다.    

악한 임금이나 까다로운 주인에게 순복하고 불신 남편에게 순복하며 불신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이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선한 행실입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형제와 이웃들에게도 선한 행실로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삶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비록 나를 비방하고 억울하게 괴롭히는 이웃들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복을 빌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을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굽어보시며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하셨던 주님처럼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도리어 복을 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반란군에 가담했던 안재선이라는 학생이 예수쟁이는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총살하였습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수가 되었을 때 손양원 목사님이 이 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탄원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됩니다. 이 학생을 양자로 삼아 회개시켜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간절히 탄원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였고 죽은 두 아들 대신 안재선을 양자로 받아들였던 손 목사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1950년 9월28일 공산군의 손에 죽임당한 지 올해로 순교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최근에 안재선의 아들 이야기가 교계 신문에 올라왔습니다. 그의 아들이 목사가 된지 20년 만에 손양원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여수 애양원을 방문하였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그러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손자가 되는 셈입니다.   안재선은 양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뜻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빈민촌 공부방 교사로 봉사하는 등 정말 열심히 살던 신학도였답니다.  하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의 족쇄를 견디지 못한 안재선은 괴로움에 방황하다가 신학을 포기하고 무인도로 들어가 양식업을 했지만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온 안재선은 가족들에게는 과거의 일을 함구하고 가난한 월급쟁이로 4남매를 키우며 살다가 48세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한 사람이 찾아와 내가 손양원 목사님의 작은 아들이라 소개하면서‘사랑의 원자탄’ 이라는 제목의 책을 주고 ‘내가 너의 작은 아버지’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 아들이 그 책을 읽은 후 손양원 목사님과 자기 아버지의 관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답니다.   아버지가‘신학교에 가라’고 남긴 유언의 의미를 그제서야 이해하게 된 아들은 과거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손양원’과 ‘안재선’이라는 이름이 목을 조여오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과연 살인자의 아들이 신학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의심하며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신학을 중단했습니다.   한쪽 폐가 썩어들어갈 정도로 깊은 병을 얻었지만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오기로 버티며 잔인한 운명을 가져다 준 신을 조롱하고 싶었답니다.  

결국 한쪽 폐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한 후 건강을 되찾은 아들은 다시 신학교로 돌아갔고 손양원 목사님의 양아들, 자기 아버지가 못다 이룬 삶을 자신에게 주셨다는 깨달음과 함께 언제까지 이런 고통의 굴레에 매여 방황하며 살 수 없다 결심하고 새 용기를 얻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 20년 만에 용기를 내어 손양원 목사님 순교 60주년이 되는 해에 손 목사님이  나환자들을 섬기며 목회하셨던 애양원을 방문하였다는 안경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글 속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성자라고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제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분들이 말하기를, 손 목사님이 재선이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는 돌맹이를 삼키는 것처럼 괴롭다고 마음을 털어놓으셨답니다.   그러나 재선이 앞에서는 언제나 의연한 모습으로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아니 하나님이 먼저 너를 용서하셨다’ 하고 위로하셨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칭송을 들으셨던 손양원 목사님도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신 분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 목사님의 놀라운 사랑은 안재선이라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사형장에서 구하였고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은 그 사랑을 힘입어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 목사님도 가셨고 그의 양아들 안재선도 떠났지만 안경선이라는 한 사람이 서로에게 남긴 사랑의 빚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갚기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움과 복수를 초월한 손 목사님의 용서와 사랑이 없었다면 안경선 목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두 집안은 두고두고 원수처럼 지내야만 했을 겁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 21) 했던 사도 바울의 말이나 오늘 본문 베드로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분입니다.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복수하고 싶고 용서가 되지 않아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오늘 말씀을 꼭 마음에 담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힘써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단의 수준이고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수준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수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항상 악을 선으로 갚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분도 공감하십니까?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 불쌍히 여기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며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 빈 그 복이 여러분의 복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복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고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