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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사에 감사하라 (단 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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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단 6:4-10)


I. 도입

한국 초대교회 - 어떤 부인이 선교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책망하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겨 살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가서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타일러 보냈습니다. 얼마 후 이 부인이 다시 찾아 왔습니다. “선교사님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우리관계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 못된 시어머니 마음 고쳐달라고 기도했지요.” “아닙니다. 그건 기도 아닙니다. 정죄하는 겁니다. 감사하십시요. 축복하십시요. 고칠 것이 있으면 나를 고쳐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아졌으니 예화감이 되었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매일 같이 감사하며 살수도 있고 불평하며 살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불평거리를 찾기로 말하면 끝이 없고 한이 없지요. 당신은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만사에 불평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옥은 불평이 넘치는 곳이요 천국은 감사가 충만한 곳입니다. 

II. 배경

다니엘서 5장이 마쳐지고 오늘 본문 다니엘 6장을 시작하기 전에 짤막한 두절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 30절과 31절. 한 제국이 몰락하고 또 다른 제국이 등장하는 커다란 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속에 역사도 변했고 정치 지도자도 변했고 체제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언해 줍니다. 

이 역사의 흐름속에 등장하는 본문의 한 주인공이 6장의 문이 열리면서 계속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이제는 포로병 풋내기 어린 다니엘이 아닙니다. 시대도 변했고 상황도 변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그 신앙, 그 정신, 그 진실한 삶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이 직면한 위기로부터 그 문이 열려지고 있습니다.

① 3절 - 왕이 다니엘을 최고 총리로 삼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엄청난 음모가 시작됩니다.  성공이 위기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사탄은 우리가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그래서 방해작전을 펼칩니다. 임금외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는 사람을 사자굴 속에 던져 죽이기로 합니다. 

② 둘째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사형통해야 할 터인데 그것이 올무가 되어 사자굴 속에 던져집니다. 잘 믿어 보겠다는 것이 오히려 시험거리가 됩니다.

이 사건의 진행과 결론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다니엘과 함께 함으로 사자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임금은 못된 정치인들에게 당했다 싶었습니다. 충신 다니엘을 잃을까 밤새도록 밤잠을 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이른 새벽에 다니엘이 던져진 사자굴을 찾아옵니다.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아 다니엘아 하나님이 너를 살려 주었느냐?”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막아 주었나이다.”

왕이 심히 기뻐하며 24절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라. 그 처자들과 함께 저자들을 사자굴에 쳐 넣어라. 그들이 굴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입을 벌려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가족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앞발로 받아서 낼름낼름 삼켜버렸습니다. 그 뼈까지 부서뜨렸더라. 

이 사건으로 왕은 이 법령 조서를 바꾸게 됩니다. 그 내용이 가관입니다.(26-27절)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을 향한 이 놀라운 고백과 선포는 유명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이 아닙니다. 탁월한 신학자의 연구를 통해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방 왕의 입을 통해 고백된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한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III. 주인공 다니엘? 

다니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하나님께서 그를 그토록 아름답게 사용하셨더란 말입니까?

① 3절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른 번역서에 보면 “그 마음에 놀라운 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장 9절에 보면 이방 왕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하여 다니엘을 향한 고백이 나옵니다.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구나” 5장 11절 사람들은 말합니다.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 성령의 감동이 넘쳤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② 4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아무 근거가 없었다. 아무 허물이 없었다. 아무 그릇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경가들은 다니엘을 일컬어 삼무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③ 10절 - 자신의 생명보다 기도를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줄 알고도 그 무엇,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기도해도 될 터인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나는 성전을 사모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경건의 습관을 허물지 아니했습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변해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한 가지 가치가 있었습니다. “나는 내 주님과 가지는 아름다운 교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체질화된 기도의 사람, 체질화된 감사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 나의 신앙과 기도의 행복, 나의 경건을 잃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④ 다니엘은 그토록 절박했던 상황속에서, 생에 최고의 위기상황속에서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목숨을 구걸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차원높은 기도, 차원높은 감사가 아닐런지요. 

IV. 감사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주인공으로 다니엘을 선택했습니다. 11월 감사의 달 첫 번째 주일 아침 설교제목이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말했는데 여기 누군가 나에게 한가지만 더 하라고 말한다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감사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감사를 넣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으로 우리를 저주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한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한정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심령으로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무엇이 진짜 신앙이냐? 여러분에게 감사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합니까? 여러분의 감사의 차원이 얼마나 높은 데에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원은 있으나 감사가 없고, 축복은 바라나 나눔이 없는 신앙은 샤머니즘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노래는 불리워질 때까지 노래가 아닌게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랑은 표현될 때까지 사랑이 아닌게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진정한 축복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인생에서, 특히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이토록 중요한 것인데 왜 이토록 감사가 힘든 것일까요? 그것은 감사의 조건을 잘못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차원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 조건적인 감사만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1차원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사업이 잘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감사하고 자녀들이 성공하고 만사가 순조롭게 풀렸기 때문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조건적인 감사 - 이유가 있는 감사입니다.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당연한 인간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이 당연한 감사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유로운 환경을 주었습니까? 그 환경을 감사할 때에 그 환경은 내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내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내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내 조국 땅에서 살아가는 것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이 조국이 바로 나의 조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경배하고 우리가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삶을 감사할 때에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걸음 걸음 함께 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무엇 때문에만 하는 감사라 한다면 그건 감사신앙이 아닙니다. 만약 그 무엇 무엇 때문의 조건이 사라질 때 결국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주어진 조건 때문에만 감사한다면 그것은 초보적인 감사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적인 감사란 언제나 상대적으로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고 감사했다면 사람을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있다고 감사했으면 없다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병 나았다고 감사했으면 다시 아프면 원망할 것입니까? 사업이 잘 되었다고 감사하면 그 사업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를 원망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지혜를 배워야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곧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V. 범사에 감사

오늘 본문 다니엘을 보십시요.

억울한 모함을 받고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처참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적인 감사였습니다. 신령한 감사였습니다. 감사의 차원이 다릅니다.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세르비아 출신의 신실한 목회자인 아버지 보리스와 어머니 두쉬카 사이에서 장남이 태어났습니다. 8세 이후 세 번이나 장애를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 아래 양육 받았습니다. 팔도 다리도 없는 아이가 부모의 교육 철학으로 정상인이 다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장을 지냈고, 오스트레일리아 로건 그리피스 대학에서 회계와 경영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고, 드럼을 연주하고, 골프공을 치고, 컴퓨터를 합니다. “허그(Hug)”라는 책을 쓴 닉 부이치치의 얘기입니다. 

왜 책의 제목이 HUG(포옹 -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꿈을 주는) 인가?

강연 중에 손을 들고 나와 “허그 해도 되나요?”라고 묻고는, 그를 포옹하며 오늘 그의 강연이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 십대 소녀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나아가 세상을 허그하게 되었습니다. 

“팔도 없고 다리도 없습니다. 또한 걱정도 없습니다.”
(No Arms, No Legs, No Worries) 
“내 삶에 더 이상 한계는 없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넘어져도 좋습니다!”

‘팔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싱글벙글할 수 있을까?’

양팔과 다리가 없이 얼굴과 몸통만 뎅그러니 있는 그를 보고 갖는 궁금함입니다. 인생을 감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자, 자기 몸뚱아리 밑에 꽁지 같은 작은 발과 거기 붙은 발가락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세상 누구보다 커다란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이 발가락 두 개로 지금 세상 누구보다 멋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닉, 왜 그렇게 행복하세요?”라고 묻는 이가 있을 때마다. 그는 솔직하게 답합니다. 그런 자신에게도 한 없이 절망했던 때가 있었다고. 태어날 때부터 외모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괴물”이나 “외계인” 같다는 놀림으로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에게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그는 “땅을 치며 슬퍼했고 끝없이 우울했습니다. 늘 마음이 아팠고 항상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렸습니다. 어디를 봐도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절망 가운데 행복으로 통하는 문을 찾았습니다. 그 후 그는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삶을 희망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는 숨이 막히도록 멋진 삶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하루는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쳐집니다. 내가 이토록 눈물겹게 감사할 수 있다면 세상 사람 누구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요.” 

그렇습니다. 크리스챤의 감사의 차원 - 다니엘의 감사는 바로 이런 감사였습니다. 의로운 고난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한 음모를 퇴치할 만한 힘이나 대책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흥망성쇠의 열쇠를 움켜쥐시는 분은 전능하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이 다니엘의 감사였습니다. 감사는 환란의 사자의 입을 봉했습니다.  고통의 사자굴로부터 자유함을 허락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짧은 시간동안 교회를 섬겨 오면서 제 마음속에 분명한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 희생을 두려워하는 사람, 헌신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역사의 개척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통해 새 역사의 지평을 열어 가신다.”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는 영광, 교회에는 늘 위로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의 감사는 다른 사람들이 한번 감사할 때 두번 감사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의 차원의 문제입니다. 시공의 문제가 아니라 삼차원 사차원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어서 감사하는 시시한 감사가 아닙니다. 땅문서를 손에 쥐고 하는 감사가 세상 사람들의 감사라면, 호화 주택이 없어도 땅문서가 없어도, 새벽마다 정발산 언덕을 오르며 “등기가 안되었을 뿐이지 삼천리 금수강산이 다 내 땅이다. 정발산이, 호수 공원이 내 집 공원이다. 내 집 공원에 사람들 산보들도 많이 왔구나.”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신앙인의 마음입니다.

남들 가지지 못한 것 - 내가 가진 것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국 나도 불행해지고 너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가 값비싼 다이야몬드 끼고 가난한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게 한다면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산다고 그걸 자랑하고 다니면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식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 앞에 내 자식 성공을 자랑한다면 그건 감사가 아니지요. 

이런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자신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정히 다른 사람 부러워하게 만들고 싶으면 내 인격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내 신앙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내 기도를 부러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비전을 부러워하게 하십시요. 전도하여 제자 만드는 내 비전의 능력을 부러워하게 하십시요. 

내게도 저런 평안한 얼굴, 주님 닮은 성품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환경을 자랑하지 말고 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며 살아
갈 때에 나도 행복해 질수 있는 것이고,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VI. 365일 감사

다니엘! 그는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여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어야 될 그 시간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범인들이 울고 있어야 될 그 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사자굴의 상황이 무엇입니까? 이빨을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찾아온 환란의 사자이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능히 그 입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서커스를 보니까 한낮 인간 조련사도 사자를 잘 조련시켜서 함께 가지고 놉니다. 공도 굴리게 하고 불 가운데 뛰어 넘게도 합니다. 인간 조련사 하나가 사자를 통솔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지 못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사자굴에서 건져주시고 여러분을 삼킬 듯 입벌리고 달려드는 사자의 입을 오늘도 막아 주실 것입니다. 원수의 이빨을 꺾어 주실 것입니다. 
낮에도 감사 밤에도 감사.
아침에도 감사 한낮에도 감사. 
어제도 감사 내일도 감사 - 365일 우리는 감사.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하늘 사자의 굴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천사의 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사자굴이 무엇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앞에 천사의 굴로 바뀌어 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성막세미나로 유명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의 간증글을 그대로 옮겨 보려고 합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준비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장로, 권사, 집사 등 임원들이 추수감사헌금을 5만원, 10만원 드리는 것이 몹시 거슬렸습니다. 일년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어떻게 신발 한 켤레 값도 못드리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맹장하나 걸리면 돈이 없어도 2백만원 꾸어서라도 수술하는데 어떻게 내 생명을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복락주신 하나님께 그렇게 드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앞서 추수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추수감사헌금은 한 가정에 최소 36만 5천원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께 일년에 한번 감사 드리며 하루에 1천원씩만 드린다 해도 일년이면 36만 5천원 아닙니까? 유명 상표 신발 한 켤레도 10만원인데 하나님께 드리는데 너무 인색하지 마십시오. 꾸어서라도 금년 추수감사절에는 36만 5천원을 최소 단위로 드리십시오.”

성도들의 추수감사헌금 드리는 자세를 바꾸려고 돈 이야기 잘 안하는 나는 나답지 않게 강력하게 설교하였습니다. 분위기를 파악하여 보니 온 교인들이 순종할 자세였습니다. 아름다운 교인들이었습니다. 아주 가난한 가정도 꾸어서라도 이번 감사절에는 36만 5천원을 드리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드디어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일주일 앞두고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다음 주에는 재정부원들이 고생을 많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보에 재정부 온라인 번호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광고하였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이번 추수감사절에 모두가 36만 5천원씩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를 보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 헌금하면 재정부에서 돈 세느라고 고생할 것 같습니다. 재정부 온라인 번호를 주보에 넣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수고스러워도 은행 온라인으로 헌금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재정부에서 셀 필요도 없이 헌금이 정리될 것입니다.”

순수한 우리 성도들은 주간 내내 은행을 드나들었습니다. 나도 은행에 갔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한 가정에 36만 5천원씩 하라고 하였지만 나는 목사로서 아무래도 적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식구별로 36만 5천원씩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은행에 갔습니다. 

입금전표에 기록을 했습니다. 

“강문호 36만 5천원, 아내 이예진 36만 5천원, 딸 강라미 36만 5천원, 아들 강희일 36만 5천원...” “목사님! 왜 36만 5천원씩이에요? 그리고 갈보리 교인들은 오기만 하면 36만 5천원인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미스 박은 몰라도 돼요.”

그리고 다 끝났다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성령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강문호야! 네 가정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 무엇이냐?’
‘딸 시집가는 것이 우리 가정에서 가장 큰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면 이번 추수감사절에 사위를 얻은 것으로 믿고 사위 이름으로 하나 더 하지.’
나는 이런 성령의 영감을 받고 입금전표를 썼습니다. 사위가 없으니 어떡하나?
순간적으로 ‘강사위’라고 썼습니다. “강사위 36만 5천원” 
재정부에서 통장을 정리하다가 ‘강사위’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내게 강사위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모두가 웃었습니다. 
몇몇 권사님은 뱃속에 있는 손주 몫까지 36만 5천원을 입금했습니다. 

온 교인이 목사님이 ‘강사위’이름으로 추수감사헌금을 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같이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바로 옆 아멘교회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5분 거리도 안되는 옆 교회인데 나를 강사로 모신 아멘교회 조창환 목사님은 정말 용기있는 목사님이라고 여기며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둘째 날 오전 성경공부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위해 일식집에 둘러앉았습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딸 시집 좀 보내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조화숙 여장로님이 어떤 딸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거침없이 딸 자랑을 하였습니다. 

장로님은 즉석에서 자기가 기도하고 있는 며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업가인 외아들 짝을 위하여 기도중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은 신비할 정도로 서로가 잘 맞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옆 교회가 나를 부흥강사로 부른 것은 이런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둘이 서로 만나 보더니 둘 다 한결같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초고속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사위감사헌금을 드리고 평생의 자랑거리 사위를 얻었습니다. 하루에 천원 감사하고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갈보리교회는 추수감사절 이후 365일 감사의 기적이 수도없이 일어났습니다. 
365일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분 모두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큰 소리로 “아멘” 하십시다. 아멘.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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