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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덮어주는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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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신앙생활을 할 때 몰라서 병이 드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알아서 병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노아의 포도주 만취 사건이 주는 교훈이다. 물론 알고 있다고 모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다. 알아도 모르는 체하면 병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흉보며 까발렸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수치로 생각했다(창 3:7). 그런데도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의도적으로 까발리고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 결과 자손대대로 형제의 종이 되는 가문의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어주었다. 그래서 자손대대로 영적 축복과 창대한 물질적 축복의 조상이 됐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은 수치를 까발리는 실수 때문에 저주를 당했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치부를 덮어줘 축복의 조상이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함처럼 타인의 수치를 까발리고 즐기는 사람이 있다. 특별히 교회나 목사의 부정적인 면을 파헤침으로써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다. 수치를 고발하고 까발리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고 사명인 듯 생각한다.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부정과 비판, 어둠과 회의의 노예가 돼 참혹하고 피폐한 삶을 살게 된다.

내면은 열등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데도 외면을 프라이드로 치장하고 싶어서 상대의 허물을 공격하고 그것을 자부심과 자기만족으로 삼는다. 속은 마이너리그지만 겉은 메이저리그로 살고 싶어 평생 부정과 고발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덮어주는 영성을 가졌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사랑으로 덮어주기 때문에 카타르시스적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해도 말할 수 없는 영적 기쁨과 섬김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잘못도 덮어주자는 말이 아니다. 이단적이거나 의도적으로 주님을 모욕하는 행위, 교회 공동체를 오염시키는 요소는 반드시 도끼로 잘라 버리고 징계해야 한다(마 18:17). 그러나 연약함으로 인한 허물이나 실수는 덮어줘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신앙이다(벧전 4:8).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은 절대적인 것보다는 상대적인 것이 많다고 본다. 그러므로 되도록 서로 덮어주고 일으켜 세워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공동체에는 사실보다는 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립과 갈등의 벽을 넘어 덮어주는 영성으로 하나가 되자.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배려하자. 그 안에 축복의 은닉이 있고 교회 부흥의 위대한 원동력과 시너지가 숨쉬기 때문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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