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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로는 안 된다(No Hope In Us)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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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는 안 된다(No Hope In Us) (마 1:18-25)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He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1. 예수께서 30세쯤에 갈릴리에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그 이전까지 그분이 어떻게 지내셨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또한 권위 있게 말씀을 가르치시자, 그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부모는 누구이며,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고향이 나사렛이라는 것, 아버지가 목수였다는 것, 그리고 그분도 아버지와 함께 고향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돕고 살았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의 배경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에 대한 궁금증과 신비는 더욱 커집니다. 그분을 통해 터져 나오는 지혜의 말씀과 놀라운 능력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동네 사람들이 놀라서 한 말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마 13:54-58)

나사렛 사람들은 여기서 '사라진 고리'(missing link)를 찾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기 이전의 예수와 그 이후의 예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필요한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어떤 사람은 그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인디아를 수 없이 여행했습니다. 공생애(public ministry)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가 불교의 고승과 힌두교의 요기를 만났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노력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궁금해합니다. 도대체 그 연결 고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예수께서 활동하실 당시에 그분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했는데, 요셉이 문제 삼지 않고 마리아를 데려와 자기 아들로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로마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고도 했고, 숨겨진 애인이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자존심도 없느냐, 미친 거 아니냐, 혹은 진짜 성자(saint)라서 그러느냐고 수군거렸습니다. 요셉은 그 모든 의혹과 모욕과 오해를 감수하고 마리아와 결혼했고,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발설해서는 안 될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무 핑계도 대지 않고 부모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셉의 너그러운 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한 남자에게 그토록 사랑 받은 것으로 인해 마리아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었으니 이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었겠지만, 알 수도 없는 일이고, 또한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분이 놀라운 지혜의 말씀과 능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으니, 설사 그분의 탄생에 수치스러운 비밀이 있었다 해도,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나서야 제자들은 그 탄생의 비밀에 '사라진 고리'가 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나자, 그분의 탄생의 비밀에 다시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 즈음에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마음 속에 간직한 비밀을 털어 놓았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기 이전에는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비밀을 털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아, 그래서!"라면서 고개를 끄떡였을 것입니다. '사라진 고리'를 그 이야기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30여 년을 철저히 숨어 살았던 예수가 갑자기 나타나 온 갈릴리를 흔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그 동안 받은 교육이나 훈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이 땅에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초부터 그런 분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때가 올 때까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지냈을 뿐입니다. 


2. 그래서 '사도신경'은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다음, 이렇게 고백을 이어나갑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것을 보통 '처녀 탄생설'(Doctrine of Virginal Birth) 혹은 '처녀 잉태설'(Doctrine of Virginal Conception)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 잉태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임신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 잉태설'(Doctrine of Conception by the Holy Spirit)이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태나 누가처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고, 대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라고 기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육신(成肉身) 교리' 혹은 '화육(化肉)의 교리'(Doctrine of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들을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로 여깁니다. 사실,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생긴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고 하지만, 이 말을 곧이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대목에서 '이걸 도대체 믿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느 교우께서는 "한 평생 교회를 다녔어도 동정녀 탄생의 교리만큼은 믿어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도 똑 부러지는 대답을 드릴 수 없음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저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 잉태설 자체가 이성으로 납득하여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여러분에게 납득시킬 방법은 제게 없지만, 제가 이 교리를 믿는 이유를 말씀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을 존중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이 교리를 믿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에는 몇 가지 '거대 교리'(Grand Doctrines) 혹은 '근본 교리'(Foundational Doctrines)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무너진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진리들입니다. 저의 주관에 따라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절대자인 신(神) 즉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다 
•그분은 다시 오시어 온 우주와 인류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 여섯 가지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확신하는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믿어야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기는 해도 위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영어로 Seeker라고 부릅니다. 믿음에 대해 탐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아, 나는 탐색자로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시다면, 그로 인해 어색해 하거나 불편해 할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탐색자의 자리를 통과해 믿는 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다만, "내가 믿을 수 없으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야!"라고 단정하는 지적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저는 길지 않은 인생을 통해, 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깨이지 못함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해 왔습니다. 젊은 시절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은 아무 문제 없이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더 온전히 믿기 위해 힘쓰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다른 한 편, 여러분 중에 다수는 위에서 열거한 여섯 가지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믿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따져 보십시다. 무(無)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했다는 교리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교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믿기 어렵습니까?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지금도 성령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는 교리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교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말이 안 됩니까? 

여러분의 판단이 어떤지 모릅니다만, 저에게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 나셨다는 교리가 가장 쉬워 보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비하면 성육신의 사건은 별로 대단한 기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사도신경'의 기초요 근거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여러 가지 소문들을 듣고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마리아나 요셉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다면, 그들은 우리와 똑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정을 가리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뭔가에 홀려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나서야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두 번째 고백문 즉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고백을 하면서 마음으로 "그렇습니다. 제가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이성을 압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빛을 비추어주고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을 벗겨 주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주 담담하게, 무심해 보일 정도로 무뚝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첫 절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8절)

이 본문 안에는 원어로 읽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암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라고 번역된 문장 안에 있는 헬라어 '게네시스'(genesis)라는 단어에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창세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Genesis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탄생'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창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다"라는 문장 안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는 이러하다.

무슨 뜻입니까?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두 번째 창조, 즉 새로운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있었던 첫 창조 때처럼 두 번째의 창조 사역에도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온 인류가 새롭게 지어지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태초에 일어났던 일과 동일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처녀 마리아의 태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고백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성령을 통해 온 우주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마주합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두 번째의 창조 역사를 시작해야 했습니까?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슨 결함이 있었기에 또 한 번의 창조 사역을 도모해야 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한데, 간단하게 대답한다면,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의 계획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다는 것이 창세기 3장의 증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기 이전에 먼저 일부 천사가 타락했고, 타락한 천사인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서 그분의 돌보심과 보호 아래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 같은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질서는 깨어졌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흐려졌으며, 온갖 비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매일 씨름하는 죄의 문제와 뉴스에서 보는 온갖 사건과 사고와 비리와 범죄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4. '죄'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생각합니다. 법을 어겼다든가 혹은 양심에 가책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 관한 것입니다. '잘못된 행동'보다 더 깊은 차원, 즉 '잘못된 존재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

리의 존재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뒤엉키고 뒤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끊임없이 행하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롬 3:23)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존재가 망가진 상태를 가리켜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로 인해 인간의 존재에 영적 질병이 생겼고, 그 질병이 유전병처럼 모든 인류에게 퍼졌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지난 수 천 년의 역사를 통해 온갖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로 인해 철학이 발전했고, 수 많은 종교가 생겨났으며, 학문과 사상이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결국 실패로 판정이 났습니다. 인류의 정신 문명과 물질 문명이 최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에 오히려 죄의 양상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둔갑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개발된, 죄를 외면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죄'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과 다른 입장을 정죄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며, 모든 것은 존중 받아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시대에 이 생각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행동에 대해 '죄'라고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고 비난하거나 앞뒤가 꽉 막힌 근본주의자라고 공격합니다. 앞으로 '죄'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생길지 모릅니다. 

얼마 전, 국내 어느 일간지에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인터뷰가 실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 여성은 자신을 '성 노동자'라고 부르며, 당당한 직업인으로 대접 받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그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을 정죄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 어떤 논리를 갖다 댄다 해도 자신의 성(sex)을 파는 행위는 죄라는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성은 결혼의 제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입니다. 그것은 상품이 될 수 없고, 정상적인 노동으로 대접받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 '죄'를 '상처'와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죄를 외면하려는 경향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프로이트(Freud)와 융(Jung)에 의해 시작되어 우리 시대에 활짝 꽃을 피운 심리학 연구는 인간의 모든 이상 행동 즉 죄의 뿌리를 마음 속에 숨겨진 상처에서 찾습니다. 심리 전문가들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과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숨겨진 상처를 찾아내고 그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그 사람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심리학과 상담학의 이론은 실로 경청할 만 합니다. 저도 교인들을 상담할 때 심리학의 이론들을 참고하면서 도움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경향이 너무 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요즘 사람들이 대중적인 심리학 이론에 너무 깊이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한 탓을 자신의 상처에 돌리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누군가에게 큰 아픔을 주었으면서도,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으며, 책임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인간성은 더욱 악해지고, 인간의 양심은 점점 더 무뎌지고 있으며, 죄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함민복 시인이 쓴 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죄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5. 죄는 단순히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단절 즉 존재 전체의 죽음을 말합니다. 영과 혼과 육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죄는 이렇게 우리의 존재 전체를 망가뜨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민복 시인처럼 우리는 죄에 대해 무뎌지지 않도록, 죄를 죄로 깨닫고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캘커타에서 활동한 테레사 수녀가 살아 있을 때의 일입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거룩하게 삽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원래 거룩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왜 거룩하게 사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왜 거룩하게 살지 않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진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이 원래 거룩하게 살도록 지어졌다는 진실입니다. 그것이 첫 창조의 원리였습니다. 이 진실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 안에는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이 조금은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래 상태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거룩하게 살 수 없는 상태에 갇혀 버렸다는 진실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수양과 훈련으로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첫 창조가 깨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가 인간의 죄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훼손과 파괴의 악순환을 막을 방법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면, 하나님의 창조는 회복될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 천재가 나타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창조의 영이신 성령께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여 시작하신 일이 바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여 새로운 인류를 일으키려는 위대한 역사가 마리아의 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찾아 온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0-21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나심으로써 그 스스로 원죄의 굴레에 갇히지 않은 완전한 인간이 되셨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죄의 질병으로부터 치유하고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The Second Adam)이라고 불렀습니다. 첫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비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아담]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예수]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롬 5:18-19)


6.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따라 예수님에 대해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붙들려 정작 붙들어야 할 의미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는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성을 인정하고 죄의 굴레에 갇혀 있는 무력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어줍잖은 도덕률을 기준 삼아 자신이 의로운 사람인 양 생각하지 말 일입니다. 

우리 시대의 풍조를 빌미로 삼아 죄를 외면하거나 덮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맑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참담한 죄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 앞에서, 바울이 그 옛날 외쳤던 것처럼,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고 절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는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의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성령의 능력으로 철저히 다시 지어지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 창조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청했던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씻어 주시며 우리의 마음을 새로 지어주실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꾸준히,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새로 지음 받고 또한 새 사람으로 자라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새 창조의 역사는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할 때, 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지어지지 않고는 희망이 없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여,
나의 구원자시여,
저를 성령으로 빚어
다시 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죄로 인해 흐려진 하나님의 형상이
오롯이 회복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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