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눅 4:1-13)

첨부 1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눅 4:1-13)
   
오늘은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라고 하니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란 무엇이고,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이며, 시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선교회에서 한 분의 선교사 지망생을 시험 치르고, 면접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시험보고, 면접한다고 하며, 새벽 3시에 나오라고 합니다. 지망생이 선교국에 새벽 3시에 나갔으나, 감독관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침 8시가 되니 그제야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시험관은 퉁명스럽게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교(school)라는 단어의 철자를 말해보시오” 

그래서 선교사 지망생은 그 유치한 질문에 순순히 답변하였습니다. 그러자 시험관은 
“좋습니다. 그러면 숫자에 대해서 물어봅시다. 2의 두 배는 얼마입니까?” 
“네, 4입니다.” 시험관으로 오신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지망생에게 말했습니다. 
“참 좋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당신은 합격되었습니다. 
당신은 선교위원회의 시험에 합격했으므로 내일 아침 선교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시험관은 선교위원회에서 지망생을 극구 칭찬하며 그가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극기시험에 합격입니다. 추운 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이 왔습니다. 
둘째, 그는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그는 신뢰와 약속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셋째, 다섯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넷째, 어린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 한 번 짓지 않아 겸손의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선교사로서의 자격요건을 다 갖추었으므로 기꺼이 선교사로 보낼 것을 추천합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험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시험해보아야 그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요단강에 나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비둘기 같이 그 머리 위에 임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시고 광야로 들어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공생애의 사역을 놓고 기도하러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천국운동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누구라도 자기의 운동, 자기의 사역의 방법을 놓고 기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이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기도하시고 있었습니다. 매우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3가지의 시험이 차례대로 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40일 동안 금식기도하시면서 연속적으로 반복된 시험이요, 순서가 뒤섞이면서 엄습한 시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험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원문에는 ‘페이라조’라고 하는데,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련하다’, ‘실험하다’라는 말입니다. 시험하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서 Test 하는 것, 조사하다, 검사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시험의 긍정적인 면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유혹하다(tempt)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시험하십니다. 인간을 범죄하도록 유혹하기 위하여 시험하지는 않지만, 진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조사하고 검사하기 위하여 시험합니다. 아브라함이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지 알아보기 위하여 아들은 번제로 드리라고 시험하셨습니다. 

창22:1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검사하고 조사하고 알아보는 시험, Test하는 시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말은 검사하고 조사하고 알아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험은 충성과 불충, 믿음과 불신을 그대로 드러내시기 위함이지, 그렇다고 하여 죄악으로 유도하고 범죄에 빠지게 하려고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에게 더 귀한 믿음을 주시려고 시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약1:13 말씀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험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는데, 위협하고, 부담을 주고 부추기도 하고, 유혹하는 측면에서 그런 시험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마6:13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기도문에는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시험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런 시험은 실패로 유인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곳으로 이끌어가고 시험받는 자로 의심하게 하고 불신하게 하면서 죄악으로 유도하는 시험입니다. 

시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긍정적인 면도 있어 시험은 시련으로 이어지고 성숙하게 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고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부정적으로 죄를 짓고, 의심하게 되고, 불신앙으로 치우칠 수도 있습니다. 시험은 반드시 이기고, 시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금식기도하시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사람은 은혜 받은 후에 큰 시험이 찾아옵니다. 시험하는 자는 마귀요, 사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 들어가 금식하시면서 40일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렇게 힘들게 시작하셨습니다. 흙먼지 날리는 사해 골짜기의 광야에 들어가 식음을 전폐하시고 메시아로서의 외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고, 풀이나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민둥산이요 허허 벌판이었습니다. 낮에는 내리 쬐는 태양이 대지를 불덩이로 달구었습니다.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두움과 냉기가 온 광야를 둘러 덮었습니다. 사람이 광야에 거한다는 것은 살인적인 더위와 얼어 죽는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40일을 산다는 것은 100% 하나님과의 의존관계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면 사는 것이요,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가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은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려주시면 나올 것이요, 생명을 받으시면 드리겠다는 각오여야 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광야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해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요, 만일에 할 수 없다고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주리시고, 배가 고팠습니다. 시험하는 자 마귀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먹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다가와 시험하였습니다. 옛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것과 같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잘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생각합니다. 잘 먹고 살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부럽지도 않습니다. 먹는 문제는 결국 돈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지금 악한 마귀는 예수님 앞에 빈정거리면서 대들었습니다. 악한 마귀는 인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들, 가장 필요한 것, 먹을 가지고 유혹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매우 굶주렸습니다. 인간의 굶주림을 이용하여 악한 마귀는 사람들에게 빵을 주라고 유혹합니다. 메시아로서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데, 인간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은 먹는 문제라고 속삭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쓴 이용규박사는 몽골에서 있었던 한가지 체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2005년 몽골의 이레교회가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개척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전혀 귀로 듣지 못하던 자매였는데, 선교사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듣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 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 찾는 것을 중단하고 들판을 가로질러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려고 교회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용규박사는 그 여자가 소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자매가 소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무엇을 원하시는 분이신지를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로 주인을 찾아왔습니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다 얻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예배 중에서 예배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인생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떡이 필요하지만, 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 항상 말씀이 들려져야 하고, 말씀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게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마치 자기가 소유한 것처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속삭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타협하자, 십자가를 지지 말고, 표준을 높이 두지 말고 세상과 타협하고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할 수 있게 하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가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 십자가 없이도 그 일을 이루라고 속삭입니다. “왜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려고 하느냐? 나에게 절 한번만 하면 될 것인데”라고 속삭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사탄에 입을 맞추거나 무릎을 꿇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사람의 방법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시험은 무엇입니까? 

마귀는 다시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탄, 마귀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까지도 적당히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험은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과시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날, 어떤 한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 올라서더니 수십 길 낭떠러지 기드론 골짜기,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죽지 아니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동방교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계통의 이단과 사교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에 한 부인이 동방교에 심취되었습니다. 남편과 시집에서 동방교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자기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막16:17-18을 보여주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쥐약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편이 보는데 쥐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에 엄청난 박해가 일어날 때에, 무슨 독극물을 먹였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 중에도 어떤 이에게는 능력을 보이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살려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시에 자기 스스로 독극물을 먹으면 죽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3절 말씀에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한번 떠나간다고 해도 그것으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의 틈만 보이면 다가와 미혹하고 시험합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마귀가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말로만 유혹하고 자기의 종으로 삼기 위한 술책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마귀의 시험이든지 우리 마음에서 일어하는 미혹이든지, 아니면 세상이 주는 유혹이든지 시험을 물리치고 이겨야 하고 합격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하고, 기도하여야 하고, 말씀의 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항상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말씀의 검은 휘둘러야 하지, 우리의 마음에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암송하여 외쳐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김운용박사가 기독공보에 실린 간증예화가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미국선교사님의 글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중국 접경에서 북한 선교를 위하여 힘쓰시는 분이었습니다. 북한 접경에서 밥을 나누는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언젠가 강을 건너 식사하러 오신 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온 그들의 옷은 남루했고, 옷이 얇아 많이 추워보였습니다. 신발을 다 떨어져 있었고, 얼굴은 검었습니다. 

그 중 79세인 김씨 할아버지에게서 일종의 경외감이 느껴졌습니다. 김씨 할아버지로부터 탈북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선교사님은 탈북하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 “찬송이나 마음 놓고 불러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이 되물었습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셔요?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선교사님은 순간 머릿속에서 비용을 계산하면서 그들을 안전하게 피하게 할 방법과 이동경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돌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중국공안은 어떻게 설득해야 하며,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제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그러나 길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의 땅에서 맘껏 찬송 한 번 불러보려는 것이 소원이라는 분에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김씨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가슴을 쳤습니다. “마지막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지요” 그리고 그 분은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거친 얼굴에는 눈물로 가득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디요. ‘저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우릴 돕겠다고 하는데 따라 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디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네다.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에 가서 찬송이나 실컷 부르고, 하늘 집에 가고자 했는데 이 땅에 남겨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가시자고 권하는 선교사에게 그가 말합니다. “나도 압네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도 예배당 종쳐봤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해봤디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자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디 안같소? 압네다 내도 압네다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게 얼마나 좋은 겐지... 허나 하나님을 앞설 수는 없디요” 

결국 작별 인사를 할 때 그 분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요” 

그렇게 헤어진 후 돌아오는 길에서 하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하나님 앞에 물어보고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가 정말 중요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고전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요16:31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시험을 이기셔야 합니다. 우리도 성령에 충만하여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사시는 이는 시험을 이기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