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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대인들이 이혼에 대해 묻는 질문 (마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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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이혼에 대해 묻는 질문 (마 5:27-32)

 
오늘 다룰 주제는 제가 피하려고 애쓴 주제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제가 피하기를 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다뤄야 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피하려고 하는 한 예수님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결론이 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결론이 빤한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무슨 토론이고 해석이고 자시고 할 수 있느냐. 고무줄처럼 아무리 멀리 당겨도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 것처럼 이혼에 대한 담론이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결국은 원론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유념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천년 전에도 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천 년 전이면 한참 전이에요. 그것도 이스라엘 땅에서. 뭔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들에게도 이혼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초반부에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다루실 주제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점잖게 접근하지 않고 서론이고 뭐고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여기에서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내를 버리는 자는 아내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중에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이혼을 독자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간음과 연계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혼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다양합니다. 매주 TV에 방송되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혼이라는 주제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아마 시작한지 십년은 된 것 같아요. 한 주제만을 다룹니다. 소재가 떨어졌을법한데 떨어지지 않고 십년동안 매주 이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수백편의 드라마를 제작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처럼 결혼생활의 갈등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얘기인데 예수님은 거두절미하고 한 가지만을 말씀하셨어요.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와 장가드는 남자도 간음함이니라’ 마태복음 19장 9절에 추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성격차이 · 폭력 · 시댁 · 고부간의 갈등 · 돈 문제 · 종교 갈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오로지 성적인 죄와 연결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내를 내버리는 자는 아내가 간음하게 하는 것이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사방에 간음이 있어요. 

이 시점에 여러분이 앉은 자리에서 꿈틀거리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할 수 있다면 이혼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하겠습니까. 저는 이런 질문을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 안 하셔도 저희는 충분히 이혼에 대해서 고민하고 사람들이 쉽게 이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혼을 생각하더라도 이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러나 다른 이유 때문에 이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냐. 
첫 번째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혼하기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한데 이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실패자가 되기 싫어서 이혼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혼을 인생의 가장 큰 실패 중의 하나로 여깁니다. 가장 큰 부끄러움 중의 하나라고 여깁니다. 당사자만 그러는 게 아니고 이혼한 자녀의 부모도 부끄러워하고 이혼한 부모를 둔 자녀도 부끄러워합니다. 교인 중에 누가 이혼을 하게 되면 교회를 옮깁니다. 교회를 잘 나오던 사람이 별안간 잘 안 나오면 이혼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심지어 이혼을 한 후에 나라를 옮기는 사람도 봤습니다. 

외국에 사는 제 친구 중에 이혼을 하니까 대한민국으로 건너오더라구요. 또 대한민국에 살다가 이혼하니까 외국으로 가더라구요. 직장을 바꾸고 친구까지 바꾸더라구요. 그 이유는 결혼생활에 실패했다는 수치심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아주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의 얘기입니다. 어떤 종교를 가졌던 간에 사람이 이혼을 하게 되면 자기의 인생의 중대한 역할에 실패했다는 실패감, 부끄러움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혼에 대하여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이혼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자식에 대한 배려 때문에 사람들은 이혼하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별로 못 보지만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자식에 대한 배려가 끔찍한 우리나라일수록 이 현상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부부는 가깝지 않더라도 자식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참고 살겠다든가,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참고 살겠다는 부부가 많이 있습니다. 

네 번째로 추가로 언급할 것은 요즘의 젊은이들은 쉽게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결혼을 기피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남녀가 얼마동안 살아본 다음에 결혼을 합니다. 주로 서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결혼생활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섣불리 결혼을 강행하기 전에 먼저 살아보고 맞을 것 같으면 결혼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럽 같은 데는 이런 일이 아주 흔하다고 합니다. 이게 옳으냐, 그르냐를 말하기에 앞서서 젊은이들이 부모의 경험을 보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저렇게 어렵구나. 나도 잘못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그럼 내가 부모님의 세대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저지르기 전에 먼저 잘 살펴봐야 되겠구나. 그러니까 서양의 젊은이들이 혼전동거를 하는 이유가 물론 도덕적으로 문란한 이유도 있겠지만 이혼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굳이 이혼을 금하지 않으셨더라도 사람들은 쉽게 이혼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특히 남자들이 이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박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타이거 우즈가 이혼하면서 지불한 위자료가 천문학적이었지요. 몇 번만 이혼했다가는 거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대면해서 이혼에 대하여 여쭤볼 수 있다면 이런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굳이 이혼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이혼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혼을 꺼리고 실패로 여기고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우리가 추가로 여기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오신 것이 아니고 만일 21세기에 오셨다면 그래도 이혼에 대해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에도 예외 규정을 인정하셨다면 오늘날도 예외규정을 인정하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것에 예외규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혼을 금지하지만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이혼이 가하다는 뜻입니다. 음행한 연고 없이 배우자를 버리면 이건 오늘날 모든 나라의 법이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을 때에 그것이 이혼의 사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21세기에 오셔서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추가의 예외 조항을 포함시키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폭력이에요. 맞아 죽는 것보다는 이혼하는 게 나아요. 폭력이 자행되는 경우에는 아마 예수님도 이혼이 가하다고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외에도 종교적인 갈등이 예외조항으로 포함됐을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느냐.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다시 말하면 안 믿는 배우자가 믿는 아내와 같이 살기를 좋아하거든 같이 살지만 나는 이 종교 갈등 때문에 못 살겠다. 

우리 갈라서자고 요구하면 이혼해도 된다는 말씀이에요. 다만 그런 경우에도 참고 살다보면 배우자가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바울이 덧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외규정, 이것은 상식인데 배우자가 먼저 죽으면 이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은 사람이 자유해집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의 부인 루스 그레함 여사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남편과 살면서 이혼을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루스 그레함이 대답하기를 ‘이혼을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살인은 생각해 본적이 있다.’고 했어요. 뼈 있는 농담이지요. 

하나님에게 상식이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상식이 통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라고 병자를 안 고쳐 주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실 때 어떤 규범이든 전통이든 율법보다도 인간의 귀중함을 먼저 인정하셨어요. 

마태복음 12장 11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만일 결혼생활이 사람에게 구덩이와 같다면 율법의 규례를 이유로 그를 구덩이에 방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행위가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판단의 기준은 사람이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전재할 때 판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원칙이든 어떤 윤리든 어떤 규칙을 이유로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 고통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이혼은 죄기 때문에 안 된다고 금지한다면 그 사람을 구덩이에서 죽이는 행위와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이 원칙에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평소에 간과하는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혼이 나쁘다든가 이혼하면 안 된다든가 이혼 자체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신다기 보다는 이혼을 하는 자는 간음을 저지른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도 간음함이라 ’이혼에 대해서 예수님이 반대하신 이유는 거기에 정절의 배반 · 성적 문란함 그리고 배우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말하기를 지금 이 시대에도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동시적인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아닌 순차적인 일부다처제, 다시 말하면 한 사람과 살다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살고 살다가 이혼하고 또 다른 사람하고 사는, 동시에 여러 배우자와 사는 게 아니지만 순차적으로 여러 사람과 산다는 의미에서 오늘날도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존재한다는 얘기인데 이러한 유혹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도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내를 버리면 저로, 다시 말하면 여자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이 유혹이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혼의 동기가 이런 것이 된다면 이것은 분명한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선남선녀끼리 결혼했더라도 살다가 싫증이 나서 나는 다른 여자가 좋아 보이고, 다른 남자가 더 예뻐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더 호기심이 가고, 다른 사람을 갖고 싶다 이런 이유로 이혼한다면 이것은 이혼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간음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성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이건 무리가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결혼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독신으로 사셨겠습니까. 사실 결혼하신 분들은 예수님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결혼에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혼자 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결혼한 자에게는 고난이 있으리라 결혼한 사람에게 고난이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아예 결혼을 피했어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과 사도바울도 해보지 못한 것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예수님은 충분히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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