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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땅에 희망을 선포하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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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희망을 선포하라. (행 3:1-10)


오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 앞에 나온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붙들고 모든 무력감을 벗어 던지고 힘있게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무력감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겁니다. 인간은 의욕을 상실할 때에 두려움과 편견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욕이 자꾸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합리화하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편견을 합리화하고, 두려움을 합리화하고, 불평과 원망을 합리화합니다.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무엇 때문에, 환경 때문에, 건강 때문에, 나이 때문에, 지식 때문에, 병이 들어서….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에게 의욕을 대신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른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가진 사람 속에 무서운 의욕을 주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임할 때에 그들 속에 놀라운 의욕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무력감을 벗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로, 골목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랬더니 3천명, 5천명이 주께로 돌아오는 위대한 믿음의 역사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사탄에게 잡힌 사람들은 무기력해집니다. 무기력해지면 의욕 상실을 낳고, 의욕상실은 우울증을 낳습니다. 우울증은 좌절을 낳고, 좌절은 절망을 낳습니다. 절망은 패배를 낳고, 패배는 파멸을 낳습니다. 그리고 파멸은 결국 사망을 낳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공식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무기력함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이 시간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다고 하는 선언을 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어제까지의 불가능이였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내 생각과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셨기에 가능했고, 그것이 지금의 업적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선언을 해버리십시오. 

삶의 버려진 곳, 삶의 그늘진 곳에 아직도 다른 기회가 있습니다. 문제라고 물러서면 안됩니다. 문제는 정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방향을 다시 잡으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자기를 자성할 수 있는 기회일 뿐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영혼을 모욕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인생에는 연습 라운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가 안 되면 다시 살아보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한 번 살고 끝나는 인생입니다. 다시 올 수도 없고 오지도 않는 인생을 그렇게 의미 없이 살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믿는 사람에게 계속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가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내 영혼을 모욕하는 저 골리앗에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존재를 확인시켜 주시옵소서." 이 선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도 이런 믿음의 선언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을 모욕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기를 바랍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믿음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붙잡고 믿음의 선언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넘치는 의욕이 있습니다. 그의 삶에는 열정이 있습니다. 원래 삶의 열정이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의욕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의 삶에 열정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자주하는 말이지만 제발 목적 없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순간을 살아도 의미 없이 살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을 살다가 가더라도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더라도 의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먼 훗날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후배들이 저와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은 정말로 정열적으로 뜨겁게 주 앞에서 살다가 간 분들이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서 브랜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자기 개성의 시대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생각으로는 시대에 앞서나갈 수가 없습니다. 남들처럼 그렇게 믿어서는 하나님 앞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믿음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믿음의 소유자가 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복의 소유자가 되셔야 합니다. 다른 교회와는 다른 교회가 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상처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 모진 말 한마디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행한 실수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내게 상처를 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힘들지만 그것보다 정말로 더 힘든 것은 그런 실수에 대해서, 그런 행동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어리석은 자기 반응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반응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를 준 행동 앞에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 저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반응하라고 하십니까? "너희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반응하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반응할까? 온유와 겸손한 마음으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온유하십시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겸손하십시오. 겸손한 자가 하늘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면 반응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온유함이 온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던 우리 주님께서도 인생 여정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내게로 와서 온유함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세상을 정복합니다. 모름지기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의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부드러운 눈과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보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좀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성품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들처럼 재물이 없는 사람입니까?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순간엔가 사라질 수도 있고, 어느 순간엔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일 수도 있습니다. 있다가도 없는 것이 재물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이 불행합니까? 이 땅에 건강을 잃어버려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솔직히 육체적으로는 건강하면서도 정신이 잘못된 인격 장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습니까? 서울대 의대 정신과 교수팀이 서울지방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20세 남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 가량이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는 인격장애 가능성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지나치게 자신에게 집착하고 대인관계가 서툰 강박성이 49.4%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과 대인관계를 꺼리는 회피형이 34.7%였고, 자신밖에 모르고 변덕이 심한 히스테리성이 25.6%, 남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편집형이 22.6%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까? 비전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게으른 사람이 이 땅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생각만 바꾸면 행복이 보입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주는 기적이 아닙니다. 주의 제단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에 생명을 걸고 변화하고자 몸부림치는 그 영혼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겁니다. 10년, 20년, 일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종교놀이만 하고, 종교장난만 하는 그래서 변화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은 종교꾼입니다. 그 사람 속에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종교꾼이 되지는 마십시오. 종교꾼은 종교를 배워서 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물려받아서 하는 사람이나 배워서하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는 잘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흉내는 잘 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은 의욕이 없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열정이 없습니다. 영의 양식인 말씀을 들어도 의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꾼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꾼은 모험이 없습니다.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언제나 모험심으로 불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에든지 앞장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앞장서야 됩니다. 좀 얻어맞더라도 앞장을 서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밀고 나가서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일의 비전을 말하고 역사를 계획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앞장서서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내일의 교회를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모험심을 끝없이 칭찬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험심을 끝없이 축복합니다. 이 모험심은 끝없는 격려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 앞에 끝없는 모험심을 가지고 가 보십시오.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격려와 칭찬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격려와 칭찬입니다. 종교꾼은 매일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꼬집기를 좋아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시간 비판의 과녁을 바꾸십시오. 칭찬과 격려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심판관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 가는 희망의 등대가 되십시오.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실패했는데도 그들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들 한 영혼에게 모험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험을 걸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주님도 나를 격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서로에게 격려하고 칭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평하고 비난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칭찬하고 격려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이 납니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만나면 그에게 희망을 주고, 의욕을 북돋아 주고, 삶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그를 만나면 신이 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만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희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앞 뒤 좌우를 돌아보시면서 인사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만 보면 신바람이 나지요?"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뭔가를 자꾸 해 보십시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실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실수를 할지언정 일을 벌이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가만히 앉아서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실수를 하더라도 열정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결코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도 없지만, 어쩌다가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재미가 없습니다. 논어가 어떻고, 공자가 어떻고, 행동에 빈틈이 없는 사람은 고리타분합니다. 오히려 저는 사오정 같은 사람이 정감이 있고 사는 맛이 납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사오정 시리즈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앉아서 땅바닥에다가 글을 쓰셨습니다. 그 글을 보고서 흥분해 있던 남자들이 하나 둘씩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쓰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다가 그 여자와 관계를 가진 남자들의 이름을 쭉 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돌로 글을 쓰시는데, 갑자기 그 자리에 사오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쟤, 스데반 아녀요?"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이 시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힘입고 일체의 무기력으로부터 자유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항할 수도 없고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한번 정복당해 보십시오. 내 마음에 열정만 있다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이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주시는 마음의 열정을 가지고 환경과 세상을 넉넉히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일들을 저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저 사명은 내가 감당하리라!' 그렇게 자신에게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사명을 사랑하십시오. 주의 일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사명의 통로를 통해서 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무슨 윤리적인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이 삭막한 세상에 주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하고, 삶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명자가 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오순절 성령 충만을 체험한 주님의 제자들이 걸어간 믿음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한 사람들입니다. 낙심과 좌절로 주저앉아버린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도록 희망을 불어넣어 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구한 한 사람의 인생을 보게 됩니다. 그는 평생동안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만 했던 인생이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삶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린 인생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40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40여년의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베드로가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합니다. 이 희망의 메시지에 그는 40년 동안 주저앉아 있던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실 본문의 앉은뱅이는 평생을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나 본 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평생을 교회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성전 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와 같은 상태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은지 오래되었지만 교회 일에 관심을 갖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일에는 생명을 걸고 관심을 갖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예수를 믿어왔지만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시간은 아까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어떤 일들 앞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석하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줄도 모르는 영적인 앉은뱅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고 평생을 앉은뱅이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어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어야만 합니다. 관심의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바로 본문의 앉은뱅이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안타까운 사람들을 오늘 우리들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앉은뱅이 신앙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늘 교인들의 관심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늘 사랑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그의 신앙은 문제가 있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생 앉은뱅이 신앙으로 주저앉아 있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앉은뱅이에게 희망을 선포했던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희망을 선포하십시오. 사실 본문에 나오는 이 베드로, 어쩌면 그는 역사에 제일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배신했다고 하는 고통 때문에, 그 아픔 때문에 정말 가슴 아프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5천 명을 회개시키는 그런 위대한 믿음의 역사를 일으켰던 주인공이 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인격 장애인으로, 좌절과 낙심에 주저앉아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서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땅에 희망이 무엇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의 희망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들어가면 눈먼 자가 보게 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입니다. 영혼이 어두운 세력에 포로가 된 자들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망의 복음을 듣게 될 때 기쁨의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탄성을 누가 막으리요. 기쁨의 탄성을 누가 막으리요.
기쁨의 탄성을 누가 막으리요. 기쁨의 탄성을 누가 막으리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망을 찾아 다시 일어나게 될 영혼들이 부르는 이 기쁨의 탄성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에만 나타난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 지치고 쓰러질 때, 그래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앉은뱅이 상태가 되었을 때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의 이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지친 많은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건성으로 성전 뜰만 밟으면서 교회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은혜 충만한 신앙생활을 욕심 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슴이 뜨거워지게 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이 땅의 지친 영혼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꿈과 희망을 안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주의 이름으로 가는 모든 곳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언제나 앉은뱅이 같은 모습으로 살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희망을 선포하고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제 저는 낮은울타리에 실렸던 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29세인 그는 교통사고로 응급실과 수술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입원한 그는 입원 당시부터 혼수상태였습니다.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숨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심박동이 정상적이고, 규칙적이라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언제 무호흡이나 심장정지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간호사인 우리는 늘 위태로운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지요. 이렇게 혼수상태에서 만 일 년여를 보낸 그에게 의사들은 회복불능이라는 선고를 내렸고, 가족들도 조금씩 지쳐 갔습니다. 간호사들 또한 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지요. 그저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간호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수정이라는 새로운 간호사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의 귀에 대고 항상 뭐라고 속삭였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손을 잡아주곤 했지요. 하지만 저를 비롯한 다른 동료 간호사들 그 누구도 그녀의 행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 저리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며 오히려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정말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 후 급격한 호전을 보였던 그는 일반 병실로 옮긴 후 한 달쯤 뒤 퇴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났습니다. 우리 병동에 웬 잘 생긴 남자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러 왔습니다."

단순히 환자의 보호자일거라 생각했는데, 그 남자는 다름 아닌 혼수상태에서 일 년여를 보낸 그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등장에 우리들은 어리둥절하고,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숙연함을 느낌과 동시에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교통사고 후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저는 항상 죽음에 대한 불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뭐라고 질문하고 이야기를 건네는데, 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눈조차 뜰 수가 없었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이었습니다."

비록 의식은 없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 친척들의 수군거림, 우리들이 때때로 내뱉던 농담들, 그리고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던 의사의 떨리던 목소리까지… 말입니다. 의사의 사형선고와 더불어 자신에게 들려오던 목소리의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는 죽음이라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공포에 늘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들려오던 낮은 목소리와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긴 터널로 빨려들어 가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던 그 목소리 때문에 그는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식사시간입니다. 미음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약 먹고 빨리 일어나도록 해요."
"욕창 생기지 않게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 드릴게요."
"어머, 큰 거 보셨네요. 그렇다고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치워 드릴게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큰 용기와 힘을 주는 메시지까지…. 늘 그에게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전신마비가 되어 비록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때마다 그 청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꼭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퇴원하면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라고…. 그는 그녀와 마음속으로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약속대로 건강을 회복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간호사가 혼수상태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용기를 주었던 것처럼, 40여 년을 앉은뱅이로 살아왔던 한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희망의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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