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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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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 사이의 어떤 촌마을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 사람인지 본문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고 문둥병자였다는 사실뿐입니다. 

우선 사마리아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그리 실감이 가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끔찍한 저주의 의미를 가진 말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혼혈아, 속된 말로 ‘튀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과 같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기원 전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그만 철천지원수인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앗시리아라고 배우는 민족입니다. (이 앗수르 민족은 아주 용맹하고 또 잔인하기로 이름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할 때 한 성을 포위하고 경고를 합니다. 항복해라! 만약 순순히 항복하면 성을 정복한 후 그 성의 백성들을 노예로 삼기만 했지만 이 경고를 안 듣고 끝까지 저항하면 그 성을 쳐서 정복한 후에 그 성에서 지도자들과 군인이 될만한 남자들을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산채로 사람의 껍질을 벗기거나 끓는 솥에 삶아 죽이기도 했답니다. 또) 이들은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즉,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을 끌어다가 이 지역에 살게 하고 그들이 서로 피가 섞여서 혼혈아가 태어나게 했습니다. 민족의식이 사라져서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닌지라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땅에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과 한국사람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아주 멸시하고 놀립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단일민족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혼혈아인 사마리아인들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신약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한마디로 사람이 아닌 ‘개’라고 보았습니다. 하물며 이방인들보다 더 천대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은 얼마나 멸시를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방금 소개한 이 사마리아인은 저주스러운 “사마리아인”이라는 명칭 외에도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저주스러운 이름을 가진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둥병자”라는 이름입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은 성경에 안 나와서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를 저주스러운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바로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정확히 숫자는 모르지만 소위 이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나병,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센 씨 병에 걸린 사람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소록도에 모여 살지요. 이 병은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한 마디로 온 몸에 감각이 없어지면서 살이 문드러지고 점차 코와 귀, 손가락, 발가락 등이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우리들도 이 병을 문둥병이라고 부르면서 저주스러운 병으로 봅니다만 이스라엘에서는 이 병이 신의 저주로 내린 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벤허라는 영화에도 나오지만(벤허의 어머니와 누이) 문둥병자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에 격리되어 살면서 절대 정상인들에게 접근하거나 접촉 못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3장과 민 5:2 등에 보면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서 사람들이 피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 문둥병은 제사장만이 다 나았다고 확인을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다 나았다고 선언을 하고 정결케 하는 제사를 드려야지만 정상인으로서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이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문둥병자가 열 명이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이 사람 하나만 사마리아인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아홉 사람은 유대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열 명 모두가 문둥병자라는 불행한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나 이 사마리아인은 문둥병자라는 저주스러운 이름 위에 “사마리아인”이라는 저주가 하나 더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러운데 게다가 개만도 못하다는 사마리아인이라니요. 너무나도 불행하고 처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이 열 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라는 분이 가까운 지방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는 능력이 있는 분인지라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들은 용기를 내서 사람들이 사는 촌으로 들어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정상인인 예수께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성대도 약해져서 큰 소리를 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아마도 있는 힘을 다해 쥐어짜듯 간절한 소리로 외쳤겠지요.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대로, 아니 오히려 기대한 그 이상으로 즉시 문둥병을 고쳐주십니다. 

손도 안 대고 멀리 떨어져서 한 마디의 말로 이 끔찍한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14절에 나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이 말씀은 너희 병이 나을 것이니 제사장에게 가서 다 나았다는 확인을 받으라는 얘기입니다. 이 얼마나 듣기를 원하였던 말입니까? 이 얼마나 기대했던 순간입니까?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혀 이들은 앞 다투어 제사장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14절에 보면 그 열 명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어느새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 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순간이며 이 얼마나 기쁜 순간입니까? 

그런데 그 나음을 받은 열 명 중 한 명만 자기가 나은 것을 깨달은 순간 다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이 한 행동을 보십시오. 몇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15~16절에 보면 그는 자기가 나은 것을 ①보고 나서 제일 먼저 ②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다음에 ③돌아옵니다. 계속해서 ④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고 ⑤예수님께 사례(감사표시)를 합니다. 이 단계는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는 다섯 가지 단계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감사하려면 제일 먼저 ①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 베푸시는 것을 보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보고, 복 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②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나음으로, 문제가 해결됨으로 무엇이 드러나야 하느냐? 내가 드러나고 나 하나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③다음으로는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부러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무 때나 감사하면 되지, 제사장에게 먼저 보인 후에 감사하지가 아닙니다. 감사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감사할 제목이 생기는 순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감사의 능력도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할 그 순간,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④다음으로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야 합니다.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겸손과 복종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뻣뻣한 자세로 감사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와 간절한 태도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⑤마지막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표현하고 모든 방법으로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네 가지 단계를 잘 따라함으로 주님께 진실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예수님이 그를 쳐다보니 그는 유대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바로 저주스러운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몹시 실망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갔습니까? 본문에는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어디로 갔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 명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 열 사람은 가던 걸음에 계속해서 제사장에게로 달려간 모양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예수님께 감사할 마음이 없었을까요? 제 생각에 아마도 이 아홉 명은 우선 제사장에게 먼저 몸을 보이고 완전히 나았다는 판정을 받은 후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보면 더 합리적인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우선 확실하게 치유 판정을 받은 후 감사하자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사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동안 보고팠던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이제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 사람 대접받게 되었다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에게 먼저 달려간 아홉 명과 돌아온 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감사할 줄 아는 사람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머지 아홉도 틀림없이 나중에라도 감사할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종류 사람들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감사해야 할 바로 그 순간 감사할 줄 알았던 한 사람과, 제 할 일에 바빠, 제 일을 먼저 하느라 감사를 나중으로 미룬 아홉 사람들... 또한 감사한 마음을 입으로, 몸으로 그것을 표현한 한 사람과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표현할 줄 몰랐던 아홉 사람들... 이것은 작아 보이지만 너무나도 큰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오늘날 이 설교를 듣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 나머지 아홉 사람과 같이 감사의 순간을 놓치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까? 자, 이 시간에 먼저 여러분 자신이 감사할 제목에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물론 감사할 제목이 참 많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는 특별히 감사할만한 제목이 없는데요?” 하지만 찬송가 489장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받은 복들을 한 번 세어보십시오. 나에게 얼마나 감사할 일들이 많은지 한 번 세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얼마나 큰 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 직장에서 일할 수 있고 사업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아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등등, 그 동안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 온 이 사실들이 다 감사의 제목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당연한 것들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몸이 아파서, 너무 연로해서 이제는 더 이상 제 발로 교회에 올 수 없는 분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들, 직장을 잃고 사업을 잃고 괴로움에 잠겨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등등...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실들이 실은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제목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깨닫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감사의 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내 일에 바빠서, 너무나 분주해서 이 감사의 순간을 놓치고 만다면 감사의 효과는 몇 분의 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함을 늘 마음속에 잊지 않고 살아가되 마음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입으로, 기도로, 찬양으로, 봉헌으로, 헌신으로 한 번 표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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