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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우리는... (사 49: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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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우리는... (사 49:14-21)

어떤 사람이 아침 출근길에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옆 차가 바짝 붙어 지나가면서 문짝을 찌익 긁어 놓고 말았습니다. 차를 멈추고 내려서 살펴보는데 상대편의 차에서 얼굴빛이 사색이 된 젊은 부인이 허겁지겁 내립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운전이 서툴러서요. 변상해 드릴게요.”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는 자기 차 앞쪽이 부서진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이틀 전에 산 새 차를 이렇게 찌그려 트려 놓았으니 남편 볼 면목이 없다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전석 옆의 사물함을 열고 서류봉투를 꺼내면서 “이건 남편이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필요한 서류들을 담아 둔 봉투예요” 하면서 서류를 건네려다가 봉투의 겉에 적힌 글을 보고 또 한 번 울음을 쏟아 놓습니다. 봉투 겉에 굵은 펜으로 커다랗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만약 사고를 냈을 경우 꼭 기억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평소에는 자동차를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줄로만 생각했었던 남편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 줄 몰랐는데 감동해서 눈물을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가끔씩 남편의 사랑을 못 받고 산다고 생각하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은 나에게 너무 무뚝뚝하고 정이 없다고 푸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자들의 사랑 표현이 여자들과 달라서 대체로 오해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뚝뚝한 것 같으나 자상하고, 정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 넘치는 사랑이 있습니다. 속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 남편은 안 그래!’ 하지 마시고 세상 어떤 사람과는 다른 내 남편의 사랑이 있다고 믿으십시오. 거기에 행복이 잇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불행은 고독하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독 중에도 스스로 자처하는 고독이 문제입니다. 결코 외롭지 않은데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곁에 사람이 많은데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모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데서 절망과 낙심이 옵니다. 그 깊은 곳에는 언제나 불신이 있단 말입니다. 분명히 사랑이 있는데 자꾸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확실한 사랑인데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하는 말도 위로로 들리지 않고 조롱하는 말로 들립니다. 급기야는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나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남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나 자신이 스스로 나를 버린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내가 버렸고, 내 존재를 나 스스로 버렸기 때문에 고독해진 것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서 여기에 또 하나의 깊은 문제가 따릅니다. 이 고독이 깊어지다 보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에 다다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결국 인간 스스로의 고독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깁니다. 

사실은 이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오느냐를 잘 생각해 보면 수평적 관계에서 옵니다. 즉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왜 이것이 수직적 관계인 하나님과의 관계로 끝을 돌리고 마느냐 말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란 대부분 일이 잘 되고, 형통하고, 명예가 있고, 인기가 있고, 평판이 좋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나라는 존재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는 이것이 진실인데 이 진실을 잃어버리고 속된 표현으로 붕 떠서 삽니다. 위선에 빠지고, 거짓에 빠지고, 허영에 빠지고,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기우상을 섬기느라고 하나님 앞에 겸손 하지도 못하고, 진실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바로잡는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권고하시고, 감동하게 하시다가 그래도 안 될 때에 마지막에는 그가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십니다. 건강도 빼앗고, 물질도 거두어 가시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빼앗아 가십니다. 홀로 남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꼼짝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무릎 꿇도록, 자기진실을 찾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마침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역사인데 이 사랑을 알기까지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 전에 이 사랑을 알아야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그 사랑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겪는 큰 환란이 있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고난을 겪게 됩니다.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 민족이 희생을 감당하는 아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한 이스라엘이 외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는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이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는 하나님께 그 아픔의 원인을 돌리며 절망하는 이들의 불신앙이 들어있는 외침입니다. 

보세요. 결국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가 사실 얼마입니까? 도덕적인 죄, 종교적인 타락... 말할 수 없는 자기들의 죄를 먼저 돌아보았다면 하나님이 버릴만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섭섭한 게 많은 모양입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내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은 이해를 해 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속에도 있단 말입니다. 

결국 오늘 이스라엘도 그 어리석음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약속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스스로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49장1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하여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그 약속을 상기 시킵니다.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는 약속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 는 불신앙적인 스스로의 절망이 문제입니다. 마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 받지 못한다고 하는 스스로의 절망과도 같습니다. 분명히 사랑인데 자꾸 사랑이 아니라고 스스로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데 믿지를 못해서 사랑이 없다고 비판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아는 것 같고, 앞장서서 잘난 척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의 결과는 신앙적 열매이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처럼 떠들면서 불신앙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지한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잊지 않았고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숱하게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실수해도 절대로절대로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잊어버리는 부모가 없는 것이 정상이지만 혹시 수천만 분의 일 어머니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잊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이자 오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실수투성이고, 실패의 전문가들인지 모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고,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여전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영원히 기억하리라.” 문신처럼 우리의 이름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겠노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사랑이자 약속입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Life is semi-final(인생은 준결승이다)” 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결승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결승점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하며, 절망하기도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결승선에 우뚝 서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교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준결승에서 우리가 실패했다고, 우리가 절망하고 있다고 우리를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언젠가는 결승에 도달할 인생이라는 것을 기대하며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잊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어떻게 바뀌어도, 상황이 어떻다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생각하고 있다.” 는 그런 사랑입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알고, 이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생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낙심되더라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약속입니다. 그 사랑과 약속 앞에 정작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어떤 신앙입니까? 이 약속 앞에 스스로 절망하거나 고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인도 부정도 하지 말고 약속만 바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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