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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불신앙 (막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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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불신앙 (막 6:1-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울고, 웃고, 탄식하며, 기뻐하고, 유모어를 사용하는 것 까지 여느 사람과 동일하게 희로애락을 나타내십니다. 드문 경우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놀라기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초두에 보면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직접 집에 오시지 않고 말씀만으로도 고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7). 백부장의 믿음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놀랍게 여기셔서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예수님은 우리와 다름없이 희로애락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본문은 또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절).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배척하는 것을 예수님은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는 예수님의 이적 기록에 대한 해석을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그가 가지신 엄청난 능력들은 참으로 놀라웠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동시에 이를 시기하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장차 당할 배척을 미리 시범 보이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2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으나 배척받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마지막 고향 방문 기사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나사렛 방문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은 갈릴리 선교 초기에 있었던 사건이나, 본문은 예수님의 선교 사역이 대략 2년 경과했던 시점에 일어난 일입니다. 

특히 앞선 방문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하였음에도(눅 4:30, 31) 또다시 이곳을 찾은 것은 거듭되고 있는 배척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열심을 잘 보여줍니다. 

1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본문은 제자들도 함께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현장을 목격하며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양 측면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랐음 (= 믿음 없는 자에게도 보이는 말씀의 능력) 

2절=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회당은 유대교의 교리가 가르쳐지던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유대교와의 단절을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사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충돌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참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써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막 7:7).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넘어뜨릴 기회만 엿보았습니다(3:1-6).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치기 시작하니 회당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여기 ‘놀라다’는 표현은 ‘압도되다’, ‘깜짝 놀라 충격받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롭고 권위 있는 말씀에 압도 되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천한 목수 정도로만 알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부할 수 없는 능력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도 보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믿고 따르는 자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주님의 말씀의 능력은 우리에게 전달되어 올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능력과 가르침을 눈으로 확인하고 놀라기까지 했지만, 결국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예수님에 대해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 능력과 교훈의 탁월함에 대해 입으로는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 가운데서도 그분의 능력과 교훈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감탄과 존경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를 진정한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 없는 자에게도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해 단순한 감탄이나 존경, 혹은 두려움을 진정한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그 권세와 능력을 보고 놀라고 감탄하면서도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인정하면서도 얼마든지 불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정하는 것과 믿고 영접하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심지어 귀신들조차도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외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다고 귀신들이 진정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모셔 섬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노라고 하면서 단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정하고 감탄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들이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육적 배경을 잘 안다는 이유로 배척했음 (= 신앙적 고정관념을 깨야 함)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육적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은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난 그들이 서로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전에 지녔던 직업 뿐 아니라 가족 관계에 이르는 모든 신변에 대해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지식들이 오히려 그들을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4절). 

이것은 당시 헬라 세계와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격언을 인용하여 나사렛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친밀함은 경멸함을 낳는다(Familiarity breeds contempt)”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욱 예의와 존경심이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가깝게 지내면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이 이미 그어놓은 고정관념 속에서만 그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의 섣부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전혀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적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 말씀이 주는 신선한 생명력을 상실해버리기 십상입니다.  

고정관념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를 들면, 스스로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교만에 빠져 웬만한 말씀이나 설교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으레 눈을 감고 다른 상념에 빠져 있으면서 은혜가 안 된다는 등의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신앙이 퇴보하게 되고 심하면 신앙을 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 2, 3절에 보면 나사렛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다섯 번에 걸친 질문 속에서 마리아의 아들 목수를 깔보는 듯한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이 사람이··· ” 

‘목수에 불과한 주제에’, 그리고 ‘여인의 아들인 주제에’ 제까짓게 무슨 대단한 사람이겠는가 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지혜와 그 속에서 나오는 경이적인 권능들을 목도하고 일면으로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나사렛 사람들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별로이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 가깝고, 너무 잘 알고, 너무 익숙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형식화가 진행됩니다. 

모태신자들, 교역자 자녀들, 혹은 교회 직분자들의 자녀들은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위대한 설교가의 주옥같은 말씀을 매 시간 듣고 즐기는 성도들도 비슷한 위험에 처하기 쉽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유진 브라이스(Eugine Brice)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고난주간 금요일 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8세된 아들이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 수난의 영화”였는데, 브라이스 목사님에게는 해마다 방영되는 그 영화에 별로이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20여 년간 고난주간에 십자가 설교를 해 오면서도 특별한 감동이 없었는데, 무심코 아들을 보니 어린 아들이 화면에 나타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날 브라이스 목사님은 자신의 구태의연한 신앙을 돌아보며 크게 반성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형식화 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무력하게 하고 실패하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적 고정관념을 깨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3.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음 (= 불신은 영적 질병) 

5절=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본절을 직역하면, “예수께서 몇몇 병자만 안수하여 치료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거기에서 아무런 권능도 행하지 않았다” 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3:58에는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로 기록되어 있어서,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이 예수께서 능력을 행하시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즉 예수님은 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신으로 인해 많은 권능을 행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권능’의 헬라어 ‘뒤나미스’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는 사실(고전 2:5, 엡 3:7)을 고려해 볼 때, 본절의 말씀은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불신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권능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살펴서 스스로 성결케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나 은혜를 사모하는 겸손한 자에게는 넘치도록 은혜와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벧전 5:5) 우리의 준비된 마음 그릇을 보시고 때에 맞춰 적절한 은혜를 넘치도록 내려주실 것입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배척하는 자를 보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의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왜 그리 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의 존재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일 뿐 아니라 주님의 능력 있는 사역이 이를 확증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이적으로 눈을 뜬 소경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요 9:30-33). 그 소경은 자신의 체험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할 때 이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일생을 투신했던 한 사회주의자는 어느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을 가지고도 이렇게 확신이 있는데, 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데도 그토록 확신이 없습니까?” 

사도 바울의 자신 있는 외침이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은 오직 아담의 자손들에게만 있는 영적 질병입니다. 천사들도 믿고, 먼저 간 성도들도 믿고, 심판을 기다리는 영혼들도 믿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불신은 사실 오만방자한 자세입니다. 주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보십시오. 도대체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기에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목한단 말입니까?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살펴보십시오. 지난 2,000년 교회 역사를 공부해 보십시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 속에 그대로 녹아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결심했다가 다시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계시의 빛 앞에서 이를 믿지 않는 인간의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워하셨고,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불신에 주님도 놀라워하십니다. 불신의 현장에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나 온갖 좋은 것들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불신은 주님의 은혜를 방해합니다. 

성도 여러분! 차라리 우리의 믿음으로 주님을 놀라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장인 마가복음 5장에는 혈루증 환자를 고치시는 모습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은 두 경우 모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과 예수님 배척하는 모습은 혈루증 여인이나 회당장의 믿음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봅시다. 혹시 여러분에게 편견은 없는가요? 귀를 막아버리거나 소용 없다는 등의 부정적인 태도는 없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한줌도 안 되는 지식을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는 독단이나 교만은 없습니까? 예배나 기도나 교회생활의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하여 형식화된 신앙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원대한 사역은 이제 우리 손에 주어졌습니다. 사역에 나선 우리 앞에도 긍정적인 반응 뿐 아니라 부정적인 반응이 있을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에게 온갖 반대의 소리를 토해낼 것이고, 때로는 배척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제2, 제3의 나사렛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실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놀라시던 수준의 믿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시며 이상히 여기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도의 믿음의 행위에 놀라시며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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