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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요한복음 3장16절의 신학 (사 55:3-5, 요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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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16절의 신학 (사 55:3-5, 요 3:16-17)
  

사순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는 기간입니다, 오늘 세상은 사랑의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은 사랑을 빼놓으면 말이 안 될 정도입니다. 노래에 연속극에 영화에 모두 사랑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차고 넘치고 널려 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많음에도 꽃이 피지 못하고 열매가 맺히지 못하고 행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모두 자기 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 육신적인 사랑은 지극히 감정적인 사랑입니다. 감정은 생명이 짧습니다. 감정은 얼마 가지 못하고 식어집니다. 식어지면 후회를 남깁니다. 우정의 사랑도 있습니다. 

이 우정의 사랑도 이해관계에 얽히면 금방 변질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도 배반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있습니다. 이 부모의 사랑은 겉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도 속을 들여다보면 보답을 요구하는 약점이 들어 있습니다. 자식들이 조금 서운하게 하면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고 서운해 합니다. 보답을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조건이 없는 사랑이라는 뜻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아가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짧지만 성경 66권 전체 내용의 핵심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포함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복음서 속의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또 “작은 복음서”라고도 말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다 포함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넓음

하나님의 사랑은 우선 크기와 깊이와 범위가 넓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기 “세상”이라는 말은 “코스모스”(kosmos)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코스모스)을 강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은 광범위 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사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품은 넓고 크고 높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어찌 인간의 사랑과 비교를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사랑은 좁습니다. 자기 위주입니다. 옹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침에 뜨겁게 사랑하지만 저녁까지 유지하지도 못하는 사랑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과 비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애정은 우선 크고 넓고 광범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사랑이 코스모스적인 사랑이고 전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관심

“이처럼 사랑하사”, 여기 “이처럼”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사랑하겠습니까. 그것은 관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온통 이 세상을 향한 생각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구원할까, 멸망치 않게 할까, 믿게 할까, 복을 받게 할까를 생각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그래도 가까운 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향하여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부모님들 생각도 오직 자식들 생각뿐입니다.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걱정이 깊습니다. 뜨겁습니다. 애절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유독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습니다. 자주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곁에서 꼬박 밤샘을 하면서 물수건으로 열을 식히며 돌보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또 어렸을 때 목격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웃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의 어린 외아들이 학질로 죽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 아들 시체를 마당에 뉘어 놓고 밤낮으로 그 옆에 앉아서 파리가 앉을까 해서 부채를 들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이처럼 사랑하니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넓습니다. 관심이 깊습니다.

배려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 독생자라는 말은 “모노게네스”(m 

onogenes) “외아들”이란 뜻입니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하라고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유일무이 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즉 “독생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밖에서 낳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아들이 아닙니다.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구원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것이 배려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배려가 없는 시대입니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분하려면 배려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알려면 다급할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부사랑이 진정한가를 알려면 어려울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소 아무리 사랑한다고 많을 말을 해도 알 수 없습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였을 때 아내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 보듯 하거나 그 곁을 떠나갑니다. 그동안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막상 결혼하려고 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진정 행복할까 자꾸만 망설여집니다. 그때 상대방의 배려를 눈여겨보면 마음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결혼하려고 하는데 혼수 때문에 갈등하다가 헤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신앙이 열렬하고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 신앙이 진정한가를 알아보려면 이웃과 동료와 교우와의 배려를 눈여겨보면 그의 신앙의 척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평소 모릅니다. 내가 잘 나갈 때 가까이에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그때에도 가까이 하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요즘 자녀 결혼 혼수 풍속도 때문에 부모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 자식이 무시당할까봐 빚을 얻고 퇴직금을 다 털어서 혼수를 마련해 줍니다. 그 후 어떻게 살 것인가 막막한데도 다 털어줍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하면 부모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배려입니다. 

요즘 시쳇말로 미친 짓 하는 세 가지 유형의 부모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명절 때 집에 올 아들 손자들을 위해 큰집을 장만하는 부모이고 둘째는 일찍 재산을 물려주고 용돈 타 쓰는 부모이고 셋째는 퇴직금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서 자식 사업밑천 대 주는 부모입니다. 오늘도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자식이니까 자식을 사랑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려입니다. 사랑은 배려입니다. 사랑은 따지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따지지 않고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배려입니다. 배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배려는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신 일이고 오늘 우리들 편에서의 배려는 하나님 이름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베푸는 작은 관심이 배려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베푸는 것은 곧 주님께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나눔은 하나님을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유리조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냥 놔두면 아이들이 다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버렸습니다. 내가 치웠기 때문에 다치지 않은 사람이 누군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배려한 것뿐입니다. 또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떤 나라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한 번도 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TV 화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저 북녘 땅의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밥을 먹을 때 마다 가슴 아파합니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길을 가다가 언덕에 걸려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달려가서 땀을 흘리며 도와 길에 올려 놓아줍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느 노모가 서울에 와서 길을 묻고 있습니다. 길을 알려주고 나니까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 바쁘지만 그를 데리고 알만한 곳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배려입니다. 사랑과 배려는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고 집을 팔아 나누어주는 것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마음을 나누는 행동 그것이 배려이고 사랑입니다. 그때 마음 아파하는 내 마음속에 계신 주님의 영이 내 마음속에 감추어두셨던 사랑을 밖으로 탈출시키시는 순간 그것이 사랑으로 배려로 관심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작가 펄벅이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갑니다. 어느 날 가까운 한국에 와서 시골 문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1960년 10월 한국을 방문하여 자동차를 타고 안동에 갑니다. 밖에 지게를 진 농부가 소를 끌고 같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눈에는 아주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서양인인 펄벅의 눈에는 진풍경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지게를 진 농부는 지게 위에 볏단을 지고 소를 걸려서 짐을 싣지 않고 몰고 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 같았으면 소가 밭을 갈고 힘이 들었건 말건 지게와 볏단을 소에게 짊어지게 하고 사람까지 타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농부는 소의 짐을 덜어주려고 지게도 짐도 자기가 지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펄벅은 짐승을 배려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한국을 표현하기를 “고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이 사랑이고 배려입니다. 

옛날 가난한 집 아버지가 아파서 누워 있습니다. 추운 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대번에 누군가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이야기가 대번에 동네를 한 바퀴 돌게 하였습니다. 그때 너나없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서 나무 한 짐씩 지고 와 텅 빈 광을 채워줍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옛날 우리 시골에서는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에도 감나무 곁가지에 감 열매 몇 개는 그냥 놔두었습니다. 

누구든지 따 먹을 수 있게 말입니다. 그것이 배려이고 예민한 사랑입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이 서양인 펄벅의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피셨습니다. 살펴보니 이 세상은 심판받을 세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려야 합니다. 세상을 살리려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배려입니다. 이 짤막한 성경 구절 속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선 넓고 크고 깊습니다. 관심도 크고 배려도 큽니다.

큰 뜻

하나님의 사랑은 국한이 없고 제한이 없는 사랑입니다. 왜 독생자를 보내 제물로 죽게 하셨는가 하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고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여기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든지”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선민의 하나님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그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누구든지’는 흑백을 불문하고 유대인 이방인을 불문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동서양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모두가 해당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영생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볼 때 구원론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영생은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어 하는 신학이고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에만 17회 등장합니다. 영생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고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현재적인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분이 없습니다. 벽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코스모스적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 벽을 치고 선을 긋고 울타리를 쳤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묶어 놓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 즉 코스모스적인 사랑인줄도 모르고 이 아가페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인생의 연약함과 죄 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시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은 안돼” 하고 줄을 쳐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과는 상대도 배려도 인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만용이 어디 있습니까. 또 유대인들은 세리는 죽일 놈이었고 도적놈이었고 세금을 떼 먹은 놈하고 줄을 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나는 떼먹은 것이 없다, 나는 정직했다, 만일 내가 떼먹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고 내 재산의 절반을 내 놓겠다”는 항변의 호소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는 의당 도적놈이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최진실은 자기가 사채업을 했다고 해서 억울하다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몇 번 더 자살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큰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라고 울타리를 쳤습니다. 이 세상 문제들은 대부분 이 집착에서 발생합니다. 남녀의 사랑 문제도 집착에서 발생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자녀문제 발생도 집착에서 강제함에서 발생합니다. 분가해서 살고 있는 아들 집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고 옷장과 화장품을 검열합니다. 아들 내외가 불쾌해 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고 서운해 합니다. 이것이 집착이고 소유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나를 안 믿느냐고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자유를 주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주일날 놀러 가면 그랬다고 즉시 보복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고 배려이고 관심입니다. 그렇다고 방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예를 하실 뿐입니다. 시간을 주십니다. 깨닫게 여유를 주십니다. 알고 스스로 돌아오도록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을 짚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범위가 넓습니다. 코스모스적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그리고 관심이 큽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만큼 관심이 크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배려가 크십니다. 뜻도 크십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독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유감없이 표현 된 것이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기간입니다. 체험하는 기간입니다.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기간입니다. 이 사랑을 크게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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