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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증거 장막의 성전 (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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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장막의 성전 (계 15:5-8)  

지난 주일, 계15:1~4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이긴 자들이다. 이 이긴 자들의 모습을 본 요한은 다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을 보았다. 요한은 계11:19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라고 하였다. 번개, 음성, 뇌성, 지진, 큰 우박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뜻한다. 그것을 덮어두고서라도 또 다시 하늘에 성전이 열리고 열린 증거 장막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사라졌다. 다만 일정한 기간 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대 사람은 제2마카비서 2:5~8, 바룩묵시록 6:5~10에 의해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함락될 때 예레미야가 이 언약궤를 느보산 동굴에 감추었다고 본다. 그것이 보였다는 것은 참 것으로서의 성전, 성전이 필요 없는 새 예루살렘 도성의 내려옴이 바로 눈 앞에 왔다는 말씀이다.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에 비한다면 하늘의 성소는 천막일 뿐이다. 그 예고 그림을 요한이 계11:19에서 보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본 것이다. 계15:5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1.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비밀이 있는가?  

① 구원 완성의 때가 눈 앞에 왔다는 것이다.

증거의 장막이란 말은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말이다. 출38:21, 민1:50, 9:15, 10:11, 17:7, 18:2 등에서 쓰여졌다. 이는 모세가 설계도를 받아서 광야에서 만든 회막을 일컫는 말이다. 이 회막은 성막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삶의 중심지다. 

여기서 장막이라 함은 원어로 오텔, 즉 텐트라는 뜻이다. 성막이라 함은 원어로 미쉬칸, 즉 거처라는 뜻이다. 증거막이라고도 불렀고 성소, 법막, 하나님의 집, 여호와의 집, 세상에 속한 성소, 하나님의 처소라고도 불리운다.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 행진을 할 때 광야에서 머물면서 항상 중심에서 움직여진 천막인 것이다. 이것을 보았다는 것은 참성소, 지상에 있는 것의 원형으로서의 성소를 보았다는 것으로 종말과 구원의 완성이 눈 앞에 왔다는 뜻이다. 임박한 끝날을 예고하는 것이다.  

②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요한은 성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전이 증거의 장막이라고 말하고 있다. ‘호 나오스 테스 스케네스 투 마르튀리우’라는 헬라어에서 첫 번째 소유격 ‘테스 스케네스’를 동격의 소유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거의 장막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출32:15, 신10:5의 두 증거의 돌판이 간직되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의 장막이 열린 것은 돌판에 적힌 계명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 십계명을 거역하고 무시하고 버려서는 안된다. 여기 증거 장막이 보인 것은 계명의 말씀에 대한 택한 백성들의 순종을 본다는 것이다.  

③ 새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장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장차 실체로 나타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렘31:31~33을 보면 지켜야 할 율법과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언약을 깨뜨려버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새 언약, 새 법, 새 마음의 법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을 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새 언약은 요22:20을 보면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다. 증거 장막은 오실 예수의 그림자로서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보여주고 있다. 

증거 장막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넘어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는 계시의 도구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증거 장막이 열린 것은, 증거 장막이 이젠 없어도 되는 완전한 성전으로서 오셨고 이제 구속의 완성자로 다시 오신다는 뜻이다.
  

2.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릴 때 무슨 일이 나타났는가?  

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왔다.

그들이 성전에서 나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곱 천사가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들, 즉 계명을 순종하는지, 거역하는 지를 다룬다는 것이다.  

② 네 생물 중의 하나로부터 금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에게 주었다.

천사에게 준 금대접 일곱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그릇이 아니다. 금대접에 담긴 것은 하나님의 진노다. 일곱 천사는 그 진노가 담긴 그릇을 받아들었다. 증거 장막에 있는 돌판의 증거대로 살지 못하면 진노의 대접을 들고 있는 천사들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니까 법을 어긴 죄는 진노와 심판이 대상이다. 

사31:2 여호와께서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 롬1:18에서 말한다. 그리고 롬3:5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불의하심이냐? 결코 아니라고 한다. 살후1:6~7, 1:9, 요3:36을 보라. 진노가 공의다. 불의하면 심판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 모든 증거 장막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피를 쏟아주시고 영생하는 떡이 되시는 살을 내어주셔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법이다.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를 믿지 못하여 내 공로로 살려하다가 율법을 어기고 율법의 요구를 외면한 죄인들은 진노의 대접을 들고 있는 천사들에 의해 재앙을 받는다. 일곱 천사는 재앙의 대접을 들고 있다. 그러니까 일곱 대접 재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참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성도의 미래요 운명이다.  

③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들어갈 자 없다.

계15:8下은 분명하게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 없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성전이 열려 있었음을 보았는데 왜 못 들어가는가? 능히 들어갈 자 없다는 것은 성전 문이 닫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심판이 마칠 때까지 재앙을 피하는 방안이나 인간의 노력은 허사라는 것이다. 아니 다른 방안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계15:8에 “가득 차매”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현존 앞에 사람은 자기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인 것처럼 재앙의 날에도 인간은 피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성전이 닫힌 것과 같다. 증거 장막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제사를 드려서 죄의 문제를 벗어던졌다. 지성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대제사장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것은 성전의 기능 중의 하나인 대속(代贖)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대도(代禱)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회개나 씻음이나 정결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위로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재앙의 심판을 중지시킬 땅의 어떤 성소의 기능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때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장소나 기회가 없다. 심판만이 반드시 수행될 것이다.
  

3.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들어갈 자 없다는 비밀을 깨달을 때 오늘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재앙의 날은 두려운 날이다. 일곱 재앙의 날이 오면 피할 기회가 없다고 탄식해야 하는가? 아니다. 먼저 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분이 참 성전임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님의 생명의 법으로 사는 자는 재앙이 상관없다. 

앞으로 전개될 이 일곱 가지 대접 재앙은 특별하다. 일곱 대접의 재앙이 믿는 자를 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하라’와 ‘하지 말라’는 증거의 계명을 어긴 자들에 대한 것이다. 다른 말로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을 모르기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한 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이다. 

요한계시록 16장을 펼치면 그 재앙의 심판은 앞으로 자세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사탄을 따르는 자들, 세상을 따르는 자들, 이런 불신자 심판에 대해 의심하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할 수 없다. 

계16:5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계16:6 “합당하니이다.”고 말하고 있으며 계16:7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하였다. 심판은 불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믿고 우리의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짐승과 사탄에게 속한 불신자들은 재앙의 심판이 진행되어도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계16:9, 계16:11에서 거듭 거듭 회개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돌이키는 자가 없다.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 없는 심판이기에 회개나 용서, 사면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일곱 대접 재앙의 시대는 최후 환난 시대란 말이다. 성령 시대가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다. 성령이 임하시므로 회개가 일어나고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 시대가 막을 내리며 회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가 계속되는 오늘 바로 이 시대가 성령 시대이고 회개할 때이다. 그러므로 오늘이 은혜의 날이고 구원 받을 날이다.   

먼저 ①내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그분의 것이 되라. 오늘 나의 삶을 회개하고 바꾸라. 정녕 대접 재앙의 진노가 나에게 부어지는 삶을 살지 말라. 증거 장막의 성전 기능은 끝났어도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어주신다.  

② 회개와 대속과 은혜 받음이 가능한 이 성령의 시대에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놓으신 예수님을 전하여 주라. 급박한 대접 재앙이 시작되기 전 사람을 주님께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마지막 사역이다. 예수를 믿고 전하는 일에 우리가 모든 것을 투자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이다. 요한계시록의 장막 성전이 열리는 비밀을 깨달을 때 신자의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는 일이다. 예수 안에 거하게 하는 일이다.  

③ 예수를 바라보는 일에, 예수를 높이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예수 닮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 없는 환난 시대가 지나가기 때문이다. 지금이 회심의 때다. 지금이 구원의 때다. 지금이 부흥의 때다. 지금이 대속의 때다. 지금이 심판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지는 때다. 때가 끝나기 전, 때가 사라지기 전, 예수와 동행하여 예수로 호흡하라. 그러면 환난은 지나가고 심판은 지나가고 어린 양의 잔치에 나아가게 된다. 그 거룩한 날을 위해 예수를 닮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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