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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의 선포 (요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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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선포 (요 1:1-18)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는 저와 듣는 여러분 가운데 운행하셔서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요한은 신약 27권 가운데 5권을 지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록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요한 1,2,3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리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닮아 사랑하며 살아야 함을 전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장 31절의 말씀을 통해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된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내용은 1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2장부터는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인 20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본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의심하며 믿지를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십자가에서 찢기신 손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상처 부위를 만져본 후에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신앙을 고백하는 사건을 기록한 후에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복음을 쓴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읽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요한복음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은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본문 1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에 ‘태초에’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성경이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라는 말은 ‘처음에’라는 말입니다. 모든 우주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시작과 요한복음의 시작은 상당히 흡사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이 세상의 상태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어두움과 무질서한 세상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며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질서의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세상을 만드시면서 ‘보시기에 좋아더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신약의 요한복음의 첫 번째 단어가 ‘태초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말씀하면서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죄와 사망의 어두움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는데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서 생명의 빛으로 사탄이 뿌려 놓은 죄의 어두움을 물리치시며 인류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곳에는 믿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입니다. 연회장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전의 더러움이 정회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 지역에서 살았던 창녀가 변화되었습니다. 혈루증으로 12년 동안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깨끗하게 낫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리로 악명을 떨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는 사람은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가정의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바울 자신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장 많이 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질 만큼 놀라운 변화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믿음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놀라운 축복의 변화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가운데 가정과 우리들이 머무는 모든 곳에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는 3월 1일이면 94회 3·1절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3·1절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3·1운동의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두움이 주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일제의 억압과 탄압의 어두움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배워야할 기독교 정신이고 삶입니다. 3·1 운동 당시에 기독교인의 인구는 전체 인구수에 1%밖에 되지 않는 20만 명이었습니다. 

그 기독교인들이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독립 운동을 했습니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사람들의 놀라운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의 정신으로 선한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데 도리어 변화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3·1 절을 앞두고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세상의 빛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며 빛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이 선택한 ‘말씀’이라는 단어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헬라 철학에서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최고의 원리와 힘을 말합니다. 즉 ‘로고스’는 우주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은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 계셨고, 그 분을 통해 모든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어두움이 그 빛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빛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서로 연결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말씀’ ‘생명’ ‘빛’입니다.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그 말씀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기 위해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빛은 어두움과 치열하게 싸우며 결국은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거하면서도 빛을 빛으로 알고 그 빛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 12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2절 말씀은 상당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주로 믿음의 결단을 촉구할 때 많이 인용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면 빨리 예수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을 보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9-11절에서 어떤 말씀이 있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은 알지 못했고,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일은 사람이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결단을 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일으키신 기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물의 결단과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개입하심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로 이뤄진 변화입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은 나의 의지를 가지고 내가 결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신 은혜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신앙생활의 기쁨과 헌신의 감사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주일에 많은 사람들이 놀러 갈 때 나는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니 그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쓰지 않고 헌금을 드리니 그 대가로 더 좋은 것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과 헌신의 삶에서 멀어집니다. 

신앙이 잘못하면 하나님과의 거래가 됩니다. 내가 이렇게 내 것을 포기했으니 거기에 걸 맞는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는 잘못된 신앙이고 병든 신앙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위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어질 때 그곳에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신앙생활 위에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와 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권리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범사에 감사가 있습니다. 헌신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은혜로 품어주시며 회복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허물을 그의 의지와 선택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보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의 복판에 주인으로 영접하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와 우리의 가정, 교회와 삶 전체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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