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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요 12: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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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믿지 못한 것은 (요 12:37-43)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1960년대 실존했던 미국의 천재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프랭크 애버그네일은 뛰어난 위조 기술과 남다른 임기응변으로, 21살이 되기도 전 비행 조종사와 의사, 변호사, 교수의 자격증 위조와 2백 5십만 달러를 횡령하여, 1960년대 FBI 최연소 지명수배자가 된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일찌감치 베스트셀러가 된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동명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된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의 삶을 유쾌한 사기극으로 40년 만에 스크린에 그려냈습니다. 바람둥이 기질과 10대의 순수함, 그리고 자기 과시적 치기를 동시에 가진 천재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를 쫓는 21년 경력의 우직하지만 속 깊은 FBI 베테랑 요원 칼 핸러티(톰 행크스)의 쫓고 쫓기는 유쾌한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이 영화는 실존 인물 프랭크의 극적인 삶과 기발한 사기 행각,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진실한 드라마가 생생히 살아있는 동시에, 스필버그만의 허를 찌르는 유머와 두 주인공의 치열한 머리싸움이 시종일관 관객의 머리와 마음을 사로잡는 명작입니다.

특히 시선을 끄는 장면은 칼 형사가 비록 범죄자지만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주인공을 믿어주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돕는 모습입니다. 주인공이 희대의 사기꾼에서 세계 최고의 위조 수표 방지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칼 형사의 주인공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믿어주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믿고 있는 것 같습니까? 믿음이야말로 서로가 성장할 수 있는 촉진제이며 영향력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나의 모든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우리가 성공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해 있을 때에도 우리를 변함없이 믿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때때로 가족까지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심지어 우리의 실패까지도,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품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든지, 실패로 좌절하고 있든지 관계없이 우리를 다시 세우셔서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 역전은 허황된 로또 복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으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께 진정한 인생 역전의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신기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을 혼동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가치 없는 것은 따르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라는 세계적인 마술사가 있습니다. 비행기를 사라지게 하고 만리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놀라운 묘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훌륭한 마술사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술 실력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이 다음에 커서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은 사람이 되거라” 하고 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기한 구경거리이지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아니하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린 일로 인간에게 영광을 얻었다면 그때 당시 순간적인 스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2천 년 뒤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구주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한 가짜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하러 왔음을 마음 깊이 새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인 삶의 목표를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또 가르쳐 주시고 또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서 숨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오셨는데 어째서 숨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다음에 기자 회견도 하고 신문에도 내고 방송도 하고 그럴 거 같은데 그거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래야 복음이 빨리 전파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어째선지 병을 고치신 다음에는 대부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당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사실이 마가복음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제 마가 복음의 별명 가운데 마가복음을 많이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마가복음은 뭐 베드로 복음이라고도 하고 또 마가복음의 별명 중의 하나가 비밀의 복음이라 하는 그런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역사를 이루실 때마다 이렇게 비밀에 붙여 달라고 당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의 복음이라고도 하는데요. 또 요한복음 6장 15절에 보면 “억지로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저들을 피해서 혼자 산으로 들어가셨다. 다시 산으로 들어가서 혼자서 기도하셨다.” 그러니까 피했습니다. 왕을 삼으려고 할 때에 피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고 또 요한복음 11장 54절에 보면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시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으로 가셨다.” 역시 유대인들 속에서 떠나서 이렇게 빈 들판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외에도 여러 곳에 저들을 피했다는 말이 있고 또 숨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배신당하는 것이고 두 번째 어려운 것은 오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대로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또 그렇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 교육학자는 그런 말을 합니다. 아무리 말 잘하는 사람도 어떤 말을 했을 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17 프로만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성공적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또 말한 것 말한 대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내 속에서 끓기만 했지 상대방은 그걸 알아들은 게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때 답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자 이거 새 술인데 이거 아주 폭발력이 있는 새로운 진린데 이것을 낡은 부대에다 넣어 놓으니깐 영 받아지지도 않고 다 터져 나가고 만다. 그래 하는 말씀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근데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고 예수님의 병 고친 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행사가 그 모든 사역이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병 고치니까 의사로 생각했지요. 

또 오천 명을 먹이니까 예수님 따라 다니면 배 안고프겠다. 이거 경제의 해결자에요 이거는요. 또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 잘하시고 하니깐 심지어는 예수님을 재판장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아요? 두 형제가 재산을 가지고 싸우다가 예수님께 가서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누구는 마술사로 보질 않나 어떤 사람은 정신병자로 보지 않나 그저 여러 가지로 예수님께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오해를 합니다. 근데 그런 오해 중에도 제일 무서운 오해가 뭐냐 하면 정치적인 오햅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예수님의 역사를 자기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든단 말입니다. 

오늘도 심지어는 사업하는 사람들 혹은 정치하는 사람들 혹은 교육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교회를 이용하려고 드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희한한 능력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욕망을 이루어 보려는 사람들이 제자들 가운데도 있어서 예수님이 보좌에 앉게 되면 그 좌우편 자리를 우리 형제가 차지하게 해 달라고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통해 부탁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숨고 피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이유로 인해서 시기를 기다리려고 한 겁니다. 그때를 잘 맞추어야 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그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우리는 흔히 표적을 보면 쉽게 믿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오늘 본문은 많은 표적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이 병만 낫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말들은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다 해결이 되고 병이 낫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니더란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달라고 흔히 말들을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이지 이렇게 많은 표적들을 행했는데도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지 정말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려내신 나사로가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이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가 죽었던 것 무덤에 장사 지낸 것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는데 지금 예루살렘에 보인 사람들 중에도 그 빵과 물고기를 먹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장님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주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가서 씻었더니 눈을 떠 보게 된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네가 바로 그 동냥하던 그 장님이었던 자가 맞느냐 심문을 하면서도 그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보면서도 왜 안 믿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될 게 있습니다. 표적이 모자라서 안 믿는 건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 많은 표적을 보면서도 계속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표적 또 다른 표적 계속 표적을 구하는 거예요. 그리고 보면 안 믿을 사람은 끝까지 안 믿어요. 안 믿기로 결심했는데 그거 뭐 되나요? 믿음이라는 거 그거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도 그렇지 않아요? 저 사람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한 번 마음에 저 사람 정말 믿을만한 사람 맞아 하는 마음이 들고 난 다음에는 믿으려고 들지를 않아요. 더군다나 그 사람에게서 작은 허물이라도 보았다 싶으면 그거 봐 내 말이 맞았지 한단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마음을 딱 닫아 버리니 믿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많은 표적이라는 것이 사실은 공개적인 표적이었습니다.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했다고 했습니다. 눈으로 보았단 말입니다. 멀리서 듣기만 한 게 아니고 보았습니다. 먹었습니다. 만나 보았습니다. 눈을 떠 보게 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나사로가 멀쩡하게 살아서 눈앞에 있어요. 표적을 분명히 경험했으나 이것으로 믿어지지는 않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이상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요 진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그 완악한 마음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믿음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아주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불행한 게 어디 있고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안 믿을까요? 그건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같은 때 모든 사실이 다 잘 알려져 있는 이때 예수 안 믿는 사람 그거 이상한 사람 아닙니까? 물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답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고 뭐 여러 가지 구실을 붙일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앞에 놓고는 이게 안 통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틀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할 때 사람들은 말을 못했습니다. 당연히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든요. 그래도 다음 날도 있는데 그게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닌데 안식일에 그러는 것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 믿는가 하면 그 대답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초대 교회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하나의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가룟 유다 사건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가 가룟 유다에게 팔렸냐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제자에게 팔리다니 이게 말이 되느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해서 성경에 일찍이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고서 해답을 얻습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시편 73편 17절에 보면 왜 악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그래 고민을 하다가 그 다윗이 하는 말 가운데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만나는 때에야 이것이 왜 있어야 했는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1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했으며 이사야서 6장 10절에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한 두 성경 구절을 딱 읽고 인용하면서 여기에 안 믿을 사람이 있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진다고 다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도 꼭 그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저 전도하면 다 믿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다 되겠거니 그러는 거 아닙니다. 어떤 때 보면 문제가 있을 때 그저 찾아가서 권면하고 찾아가서 설득 하고 심방 가서 얘기하고 그러면 될 거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할 일 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그러나 내가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내가 전한다고 다 믿고 내가 설득한다고 다 되고 내가 봉사한다고 다 되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전도를 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은 표적을 보였지만 그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수고를 다 하되 전하기도 하고 정성껏 베풀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내가 잘해서, 내가 봉사해서 됐다는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도 하고 온갖 수고도 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전하고 수고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라고 해서 믿지 못했다 하는 말이 여기 나오는데 믿지 않는다 그럴 적에는 자기 임의로 믿고 싶으면 믿을 수 있고 믿고 싶지 않으면 안 믿을 수도 있다 하는 뜻이 어느 정도 내포가 되어 있습니다. 믿으려면 믿을 수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믿고 안 믿는 결정권이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암시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해서 37절에 유대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오고 39절에서는 믿지 못한다 하는 얘기로 연결이 됩니다. 

그럼 정확하게 말하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믿지를 못하느냐? 왜 믿지 못하느냐 하면 믿고 싶어도 믿지를 못한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얘긴데 왜 믿지 못하느냐 하면 그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고 해서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해 놓고 마음을 닫히게 해 놓았기 때문에 믿고 싶어도 사실 그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다.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어려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도 참석을 하고 예배도 참석을 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타락해서 신앙과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모나카가 그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지마는 어거스틴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 어머니 모나카는 아들의 회심을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거스틴이 로마서 13장에 있는 “이제 너희가 이때를 알지니 너희가 마땅히 자다가 깰 때라”는 음성이 들려 왔고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그 심경에 변화가 와서 믿음으로 끌려 들어가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안 믿고, 믿고 안 믿는 것이 인간의 결정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로마서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냥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사실 불신앙 불신앙이라고 하지만 믿지 않는 것도 또 다른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 정욕대로 그 욕심대로 그 생각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길가와 같은 마음 돌짝밭과 같은 마음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갈아 없고 돌을 치워 버리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되는데 그게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아니 내가 색안경을 끼고 있는데 어떻게 색깔 없이 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색안경을 벗기 전에는 안 되는 것인데 스스로는 벗을 수가 없어요. 그거 하나님께서 벗겨주셔야만 됩니다. 

그러면 다 믿느냐 하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깨우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부리면 그래서 믿지 않으면 그 결과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이 깨지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의 견고함이 깨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뜨겁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려 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더 이상 전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수고하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 앞에 간구하여 표적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한 생명 생명이 주님 앞에 나오게 되고 우리의 굳어진 마음들이 녹아지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두려움 속에서도 이미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그 마음이 완악한 대로 그냥 내버려 두셔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심지어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 때문에 출교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숨어서 믿을 뿐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못됐다는 것인데 왜 그러냐 하면 자기들이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게 되면 자기들에게 출교라는 제재가 가해지지 않겠는가 그것이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정상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길이 막힌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땅에서는 출교를 당하게 되면 누구도 그와 상대를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갈 길이 막히는 겁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오늘날 중동의 아랍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고 저 이북 땅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공개하게 되면 이건 사실 죽음입니다. 아니 죽는 것은 차라리 낫습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 겉으로는 아닌 척 하고 숨어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이 관원들 가운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 시체를 장사지내기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달라고 한 아리마대 요셉이 있고 또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온 니고데모가 있지를 않습니까? 한데 죽으면 죽었지 뭐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어보면 결코 그렇게 쉬운 일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거기다가 솔직하게 말해서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라고 하는 말처럼 세상일도 그냥 놓치고 싶지는 않다는 그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세상 영광을 취하려면 하늘 영광은 포기를 해야 되고 하늘 영광을 내가 취하려고 하면 세상 영광을 포기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양손에 떡을 쥔 것처럼 세상 영광도 갖고 하늘 영광도 가질 수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 영광은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마땅할 것인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영광을 위해서 하늘 영광을 멀리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있기는 있는데 힘이 없고 용기가 부족하다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신앙은 있겠지마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리해 보면 첫째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거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마는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는 싶어하나 믿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을만한 여건이 충분히 됐는데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럼 누가 믿지 않는 사람이냐 하면 야박한 사람이 믿지를 않습니다. 

완악한 사람 그저 자기 생각대로 살고자 하고 자기 정욕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러므로 이들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가 않아서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쌍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믿지 않는 사람은 좀 괘씸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좀 딱합니다. 결국 같은 얘기지만 그래도 어떤 때는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 때가 있고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 번째 사람은 믿기는 믿는데 힘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믿기는 믿는데 술친구들을 끊어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 술친구를 끊어 버림으로서 자기가 당하는 희생을 자기가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 희생이 두려워요 그 희생이 자기로서는 너무 벅차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포기할 마음도 없고. 그래서 예수를 부지런히 믿지마는 거기에 따라오는 희생은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무력한 신앙입니다, 무력한 신앙 소극적인 신앙. 용기가 없는 신앙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이 어떤 계층에 많으냐 하면 지식인 계층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고, 또 부요한 층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고, 사회적인 활동 폭이 넓은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활동 반경이 좁고 자기들이 접촉하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서 크게 손해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신앙을 공식적으로 고백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지식 계층의 사람이나 부유층의 사람이나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 계층에 사는 사람들은 활동하는 분야가 넓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을 접촉하게 되는데 접촉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는 종교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비 종교인도 있고 또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종교의 사람도 있고 저런 종교의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자기 신앙을 딱 부러지게 고백을 하는데서 여러 가지로 곤란한 문제들이 따라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이제 우리 교회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가 그들을 너무 믿음이 없는 이방인처럼 낙인을 찍고 정죄하면 그것 또한 곤란한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 사람들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는 것을 이해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그 신앙이 점점 성숙해서 능력있는 신앙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기다리면서 참고 밀어줘야지 그걸 그냥 바리새교인이니 무슨 형식주의자니 믿음이 없는 자니 해서 너무 몰아치는 일은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잡아 주셨지 그런 사람들은 박쥐마냥 두 마음을 품었으니까 얼씬도 말라고 이렇게 내치는 일은 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약한 신앙 드러내어 성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하면서 비난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도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강한 믿음으로 무장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끌어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 지금 겉으로는 안 믿는 척하고 있지마는 속에는 믿는 사람이 오늘날도 없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고독해 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자기 혼잔 줄 알았습니다. 한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가 칠천이 있느니라.” 이 칠천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는 안 믿는 거 같아도 속으로 믿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잘 안 다니는 거 같아도 속에는 일찍이 예수님이 들어가 앉아있는 그런 감추어진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인해 어떤 이유로 인해서 지금은 그저 우리 눈에는 시원치 않으나 깊이 벌써 숨겨진 신앙인이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을 볼 때도 그래요. 이 세상이 험악하기만 한 그런 세상만도 아닙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법 없어도 살 사람 많이 있습니다. 경찰서 무서워서 죄 안 짓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경찰서 없어도 죄 안질 사람은 안 져요. 얼마든지 이 세상이 그런 거예요. 법이란 원래 죄인 때문에 있는 거지 나쁜 사람 몇 사람 때문에 있는 거지 그게 착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단지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것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 동안 내 왕의 보좌를 내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왕의 보좌를 내놓기가 싫어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 그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자기 사랑 자기 교만 이 자아가 무너져야 비로소 예수를 믿을 수가 있어요. 오늘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기 교만과 자기 욕망, 자기 생각, 이 자기 자랑이 완전히 무너져야 비로소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 욕망 그대로 두고 예수님의 능력만 구하는 기적만 바라는 그런 신앙은 바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풀고 충만한 복을 더하여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세상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과 땅의 모든 복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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