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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민하여 죽게 된 예수님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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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여 죽게 된 예수님 (마 26:36-46)


오늘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최초의 여성대통령 시대가 됩니다. 여성 대통령은 미국 같은 나라도 없던 일인데 이제 대한민국의 여권 신장은 확실한 자리매김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문화는 급속하게 여성우월권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군사 훈련을 받는 ROTC 학군단이 우리나라의 각 대학에 110개가 있는데 군사훈련을 남자들과 여자들이 똑같이 합니다. 종합 성적 1위가 지난해 숙명여대였습니다. 금년은 성신여대입니다. 군 장교들이 나와서 점수를 매깁니다. 

그런데 남자가 있는 학교에서 하나도 그 두 대학을 따라가지 못하는 점수가 나와서 ‘이제는 다 남자들은 여성화 되고 여자들이 남성화 시대가 되었다. 대통령까지 여자가 되었으니 남자들은 뭐하고 사나?’ 이런 생각이 들만큼 여인들의 우월권 문화가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내가 심방 다니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 외출할 때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징역 5년이라고 하고, 몇 시에 들어올 거냐고 물으면 사형이라던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3년 동안 구원 사역 공식 일정의 마침표를 찍는 부분입니다. 사순절입니다. 이 기도 시간을 끝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시고 법정으로 끌려가서 재판 결과에 따라서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룟 유다의 노력에 정보를 얻은 행동대원들은 소란스럽지 않게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밤 시간을 이용하여 예수의 측근자들이 최소한 없을 때를 틈타서 기도드리는 현장을 급습하는 작전으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개 보면 전략가들은 머리를 씁니다. 

군사 작전도 언제나 그렇게 합니다. 진주만 공격이라든가 6·25 전쟁 다 새벽이나 한밤중에, 민중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해치우는 작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아주 꼼짝 못하고 골고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33세 청년의 건강의 몸은 이제 못에 박혀서 인류 역사의 가장 잔인한 제도인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당할 고난을 지금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긴박한 고통의 시간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가장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을 발표했습니다. 38절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렇게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고통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심리적으로 체념하게 되는데 그런 시간이 다가오는 시간이 더 불안합니다. 

아주 죽을 지경으로 심리적 불안이 조성됨으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은 그 고통의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오늘 기록이 성경으로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복음서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또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을 보면 “그때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철야기도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 “예수께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 다음에 산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라고 했습니다. 또, 기도하는 모습도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1절 “저희를 따라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 이렇게 되어 있고, 오늘 말씀에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본문 성경에 나타난 매우 중요한 몇 가지의 진리성을 밝히는 것이 사순절 고난의 의미라고 봅니다. 첫째로, 기도란 무엇인가? 지금 예수님의 기도 모습에 나타난 표현들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주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고민하고 슬퍼해서” 예수의 고민은 무엇이고 예수의 슬픔은 어떤 것인가? 그런데 그 고민이 얼마나 심한지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을 만큼 지금 고민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얼굴을 땅에 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긴박한지 얼굴이 땅에 닿았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대목의 기록을 더욱 진하게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지만 우리가 땀이 흐르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핏방울이 되는 기도는 안 드립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그렇게까지는 안 됩니다. 그렇게 진액이 마를 만큼 지금 열심히 기도드리는 내용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기도하고 계신가? 여기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 때문입니다. 10초 밖에 안 걸리는 이 짧은 문장 하나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나를 고통에서 멸하게 해주옵소서. 평안의 세계, 풍성한 소유적 성취, 건강하게 하시고, 성공적 삶을 환영하고, 전쟁이 그치고, 넉넉한 비를 내려주시고, 자녀들의 풍성한 번영을 약속해주시며, 목표의 충분한 도달을 주시고, 투표에 당선되고, 사업의 성취가 있으며 진취적 발전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 기도는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기도도 나쁜 기도는 아닙니다. 주님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드릴 때 얼굴을 땅 흙바닥에 대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희망 사항에 대한 하나의 요청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그러면 예수님이 지금 힘들어하는 그 기도의 목적이 뭐냐? 내 뜻을 버려야 되는 기도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뜻이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 만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는데 인간 구원하시는 방법이 내가 십자가를 져야만 가능할 수 있겠나이까? 얼마든지 다른 선하신 방법을 통해서 인류 구원이 완성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예수님의 뜻은 이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이 아닙니다. “네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가운데 자신의 뜻을 버려야 되는 것이 너무 힘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금은 너무 힘이 드니까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소시민적 삶의 과정에서도 제일 힘든 것이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도 넉넉히 좋은데 절대로 안 버립니다. 끝까지 독야청청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부부끼리도 뜻이 맞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위기가 오지 않습니까? 두 사람도 안 맞습니다. 교회, 사회기관, 국회 다 싸움의 원인은 내 뜻 세우기입니다. 

내 뜻대로 하면 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고통도 멀리 가고 성취감의 행복도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어디를 가나 우대받고 앞날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나와 반대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럴 때 내 뜻을 버릴 수가 있을 것인가? 부부간에도 다툼이 생기니까 내 뜻대로 안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내 뜻을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까? 부부간에도 안 되는데 교회 공동체, 국회, 여당, 야당, 유엔….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부인이 남편에게 “당신은 내 말을 듣고 꼭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러며 소리를 질렀더니 남편이 “당신은 두 귀로 듣고 입으로 나온다.” 말했다고 합니다. 싸움의 원인은 내 뜻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게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앞에는 지금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 회복의 자리와 골고다 십자가라는 두 갈림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골고다입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내 뜻을 버릴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이 시간 나에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립니다. 기도란 내 뜻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려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사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해주옵소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힘을 이 시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게 기도입니다. 그래서 피땀이 흐르는 것입니다. 진액이 마르고 뼈가 상한다고 했습니다. 내 뜻을 굽히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 일이 힘드니까 기도의 동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합심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불쌍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세 번이나 똑같이 함께 한 시간만 기도하자고 측은하게 요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기도에는 동지가 필요했음이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고난스러운 일을 만날 때 함께 기도하자는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은 가장 힘든 일을 함께 나누자는 의미가 되는데 예수님도 이 기도 훈련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 방법론까지 가르쳤습니다.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시작하는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는 120명의 다락방 합심기도로부터 출발하는 역사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찰스 알렌 박사의 미국 교회 상대 연구 설문조사를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등록한 교인 가운데 20퍼센트는 교회 출석을 안 합니다. 35퍼센트의 신자들은 가정에서 한 번도 성경 안 읽습니다. 25퍼센트의 신자들이 기도 생활 전혀 안합니다. 

40퍼센트의 신자들은 성경에 약속한 헌금생활을 안합니다. 75퍼센트는 한 번도 전도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100퍼센트가 있습니다. 다 천국가기 원합니다. 오늘 주님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기도의 협력자로 삼기 위해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너희들만 내 고난에 동참해서 기도를 해주면 좋겠다.” 그런데 못했습니다. 왜 못했는가? 예수님도 여기 인정하고 계신 합리적인 이유가 나타납니다.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한계성을 초월할 수 없는 육신의 약함 때문이다. 육신의 피곤이 이 안식의 시간, 밤 한 시간을 견딜 수 없게 했다.” 인정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목사들이 만나면 목회 경험의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새벽기도를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례식이 나고 바쁘고 그래서 12시 넘어서 잠 잘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급합니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목사님 한분은 저에게 “이 목사는 그런 경험 없어?” “뭐요?” “새벽기도 알람이 울어서 하도 곤하게 자다가 부랴사랴 넥타이를 매고 양복 입고 강대상에 섰는데 아랫도리가 서늘해서 보니까 파자마만 입고 나온 거야.” 그분 일생에 잊어버리지 못할 실제 일입니다. 육신이 피곤합니다. 저를 가르친 은사 목사님은 하도 급해서 뛰어가서 강대상에서 펴보니까 성경 대신 국어사전을 들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이것도 실제 일입니다. 저도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전도사 때인데 옛날에는 강대상 밑에 강대상이 또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기서 설교를 했습니다. 추우니까 전기장판을 따뜻하게 펴놓았습니다. 저는 전도사니까 뒤에서 안내할 거 아닙니까? 목사님이 나오셔서 따뜻한 장판에 앉으셨는데 집사님께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아무개 집사님! 공중기도 좀 하십시오.” 기도를 시켜놓고 목사님은 잠드셨습니다. 코를 고시는데 “드르렁 드르렁!” 그 분은 잠이 많으십니다. 그때 전도사인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나가서 대신 설교를 해야 하나, 목사님을 깨우나?’ 어떻게 상황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기도하시고 가십시오.” 목사님은 그냥 주무셨습니다. “육신이 약하도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현대 문화의 특징은 만성 피로입니다. 육신의 약함은 기도 시간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를 안 하면 시험에 빠진다.”입니다. 육신의 약함은 인정하시면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약한 육신을 이기고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자고 마음을 결정하면 성령님이 나를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기 일 년 내내 새벽기도하시는 분들!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 조건, 생활 조건이 더 좋으십니까? 좋은 사람 없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조건에 같은 건강을 가지고 하려는 사람과 안하려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새벽기도 한 번도 안 나오면서 교회 일의 주장만 열심히 하면 시험에 빠집니다. 

한 시간 합심기도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한 제자들은 그 사건이 있자마자 무슨 일이 터집니까? 가룟 유다를 앞세운 군병들이 들이닥치는데 그렇게 기도하자고 해도 영 못 일어나고 잠만 자던 제자들은 군인들이 왔다는 말에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나지 않습니까? “뭐야? 군인들이 왔어? 왜 왔어?” 잠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자기 방어에 순발력 있는 행동을 하는데 군인의 귀를 칼을 가지고 깎아 버렸습니다. 마음가짐에 따라서 영적인 것을 하고 못하고 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와서 같이 좀 기도하자고 세 번씩이나 처절한 요청을 했는데도 응답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180도 정반대 순발력 있는 경각심을 그대로 가지고 나타났는가? 죽고 사는 문제가 닥쳐오니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더니 베드로는 어떤 시험에 빠집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본 어떤 노예 신분의 계집종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때 베드로가 해야 할 말이 무엇입니까? “맞다. 나는 예수와 함께 있었던 베드로라는 제자이다. 뭐 어떠냐?” 이렇게 대답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그 사람 모른다.”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도 안 해서 시험에 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질문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점점 더 강력해집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한번 시험에 빠지면 마음이 돌이키지 않습니다. 끝까지 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래서 끝까지 갔지 않습니까? 조금의 곁에 섰던 사람이 나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는 그의 당이다. 한 패거리지?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너는 북쪽 갈릴리 지방의 사투리 악센트를 쓰는데 뭐가 아니라고 하느냐?” 마지막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게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후에 베드로는 이때를 생각하면서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일어나서 기도했다는 초대교회 전설이 있고 아시아에 흩어진 박해받는 성도들을 향해서 기도와 권면을 할 때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 권면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의 기도 요청에 동참하지 못했던 후회감이 반영된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온 가장 괴로운 시간에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아버지가 인류 구원을 위해 마지막을 주시는 십자가의 사명을 훌륭하게 마감하셨다는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은 무엇인가? 나의 뜻을 안 버립니다. 저는 경험이 많습니다. 끝까지 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작업을 계속 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일기를 점검해보면 40일 금식기도로 시작해서 겟세마네 철야기도로 끝났습니다. 왜 내가 그토록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도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내 뜻일 뿐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고 참된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요청하는데 내가 그것을 안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그 뜻을 따르고 내 뜻을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정면으로 만났을 때 핏방울을 떨어뜨리면서 “하나님! 이 어려운 시간에 내 뜻을 버리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희생해야 합니다. 피 흘리고 창피 당하고 벌거벗고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싫은 것입니다. ‘이겨야 돼!’ 하면서 자기 뜻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영화 한편을 보면 그 감동이 인생 교훈이 될 수가 있는데 참 섭섭한 것은 제가 청년시절에 좋아했던 영화는 지금 미국이나 한국이나 한편도 안합니다. 그 영화 좀 다시 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서부활극 영화입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청년 때 저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그 영화 장르가 휩쓸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때 젊은이들이 얼마나 서부영화를 많이 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영화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언제나 봐도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어느 평화로운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악당들이 나타납니다. 와서 물건을 빼앗고 여자들 성폭행하고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리고 총을 쏩니다.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 평화롭던 마을은 아주 쑥대밭이 됩니다. 힘이 없는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처절하게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이 필요한 마을에 남모르는 사나이 하나가 슬며시 나타납니다. 말을 타고 모자를 쓰고 천천히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그 마을이 겪고 있는 어려운 고난의 역사를 보면서 ‘이것을 내가 해결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그 사람이 나서서 그 악당들과 싸움을 합니다. 

그 사람은 말도 얼마나 잘 타는지 위에 올라갔다 배 밑으로 들어갔다 하면서 권총도 쌍권총을 가지고 쏘는데 이 사람이 쏘는 것은 다 맞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은 그 사람의 노력으로 평화를 되찾습니다. 그러면 그 동네 사람들은 이제 얼마나 좋습니까? 그냥 그 사람을 동네에서 같이 살자고 왕같이 모시겠다고 하면서 돈도 거둬서 주고 금덩어리가 있는 사람은 금덩어리를 주기도 하고 왕 같이 추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아무 소리 안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네! 내가 총질을 하도 많이 해서 마을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다 수리하고 평화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꾸질꾸질하게 뭐나 얻어먹으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면서 말을 타고 시가 하나를 물고 석양이 지는 산마루턱을 외로이, 외로이 넘어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습니까? 와! 멋있습니다. 그때 청년시절에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남자답고 멋있어서 ‘아! 그래! 저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 선한 일을 하고 진리에 사는 사람이 꾸질꾸질하게 얻어먹을 것을 챙기면 안 된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왕 되라고 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가 왕으로 모시겠나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여러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비아 돌로로사’ 골고다 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가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외롭게 다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제자가 되었지 않습니까? 금년에 제자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사순절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그 정신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을 믿고 있나이다. 그러면서도 예수의정신은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내 뜻만 세우기 좋아하는 우리들이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세우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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