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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이신 그분을 바라볼 때 (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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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이신 그분을 바라볼 때 (히 3:1)

[히브리서 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Therefore, holy brothers, who share in the heavenly calling, fix your thoughts 
on Jesus, the apostle and high priest whom we confess.)

거룩한 형제들아!
데이비드 플랫은 그의 책 [래디컬 투게더]에서 말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다면 주님의 말씀을 교회에서 전하는 모든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그밖에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천하에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우리 교회를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의 이름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왜 불림을 받은 존재인지를 분명히 안다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개성시 북쪽 16Km 지점에 솟은 천마산 아래에는 박연폭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 폭포를 향하여 가는 길에 두 절벽이 마주 보며 만나는 곳이 있는데 그 간격은 약 1미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1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건너뛰는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지에서의 1미터라면 어린아이도 건너뛸 수 있지만,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건너뛰자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위를 ‘결단의 바위’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밑을 바라보지 말고 평지라고 생각하며 앞에 있는 목표만 바라보고 결단을 내려서 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이 1미터의 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뒤를 바라보지 말고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실천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결국은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오늘의 이 말씀도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는 거룩한 형제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어떻게 하면 최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유독 “우리” 그리고 “…하자”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크리스천 공동체에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형제들아!”
바로 이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는 것이죠. 무엇을 생각할 수 있나요? 당시 크리스천 공동체는 주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아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할 때,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저희 교회에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간혹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거나 바꿔야 할 사정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쁜 이름으로 개명하는 것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이 그 이름을 빛나게 해야 합니다.

항간에 유행했던 “김복남”이라는 이름을 아시지요? 故 앙드레 김의 이름이 김복남이라는 것이 뭐가 어떤가요? 이미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생각하면 그의 이름은 어때도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이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꼬이는 겁니다.”라는 말을 듣고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병(炳)자 돌림에 하필이면 왜 삼(三)자를 붙였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적이 있지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여 그렇게 지었노라고, 그래서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대개 개명하는 집이나 점집에 가면 “이름을 바꾸세요.”라고 합니다. 절대로 “당신의 태도를 바꾸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문제고, 신앙은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주는 것이지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대가 무속인들을 찾아가면 어김없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액이 끼었어, 이때 위기를 지나가게 되어 있어, 그런데 굿을 하면 액땜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어려운 시기를 견디라거나 잘못된 일에 관하여 책임을 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에서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형제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요? 영어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네요.
“holy brothers, who share in the heavenly calling”

하늘나라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형제들이 거룩한 것은 그들의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거룩한 것은 인격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하늘의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거룩함” 앞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욕망과 야망인지 거룩한 사명인지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자 하는 동기에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 어느 토론을 보면서 참 인상적이었던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소중히 여기며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대한민국의 헌정사를 부인하고 나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주셨습니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없는 욕망을 주셨냐는 것이죠.
때때로 우리가 “화”를 내는 일들이 분노로 끝나느냐, 아니면 거룩한 분노로 바뀌느냐는 것 역시 “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화나게 하는 동기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장사하는 무리와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시며 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노의 동기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더럽히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조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 그 당시 장사하는 이들은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물은 꼭 유대 돈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들이 오면 그 돈을 바꾸면서 폭리를 취하고, 재물로 드려야 할 것을 사고팔면서 폭리를 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이용하는 자들,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언젠가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고 나서, 저희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대하여 성경적이냐는 논쟁이 붙었습니다. 주일에 커피를 파는 것은 장사하는 소굴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일에는 장사를 하면 안 되고 평일에만 괜찮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거룩을 잘못 이해하면 이분법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동기를 생각하지 않고 행위를 보면서 세속적이냐 거룩한 것이냐를 규정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던 것은 “장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장사하는 그들의 동기가 잘못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또 하나의 논란이 무엇이었나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규례에 의하면 병을 고치는 것도 “노동”으로 분류되어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동기가 우리 인간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본질이 있기에, 고통당하는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강조할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과 미신의 차이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어나는 일들이고, 미신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강도의 소굴”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득을 취하는 욕망으로 변질되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하고 병을 낫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하나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누군가 이득을 취하고, 감사를 가로채고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해 예물을 드리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지만, 의무로 변질되는 순간 “예배”가 하늘의 일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선물”과 “뇌물”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선물이지만,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은 뇌물입니다.
제가 종종 심방을 가면 돈을 주는 사람들이 있죠? 제가 기본적으로 목회자들이 심방을 할 때, 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심방과 주례, 장례 등이 목회자가 해야 할 마땅할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례를 해야 마음이 편안한 사람들이 있고, 그렇게 부모에게 배웠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가면서 받는다 안 받는다 하는 것도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런 행위들이 정말 기뻐서 하는 것이면 괜찮지만, 부담이 된다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돈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
누군가를 돕기 위한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필요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돈거래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돈거래를 하면 신앙을 잃고, 사람을 잃습니다. 본질과 동기를 잃어버린 그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지키지 않으면 얼마나 독선적이 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주일에 가끔 바자회도 하고, 어려운 교회에서 요청한 것들을 때로 선별하여 팔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인데 하나님께서 싫어하실까요?
우리 교회의 파구스가 교인들의 교제의 장을 마련하고 남는 수익금들이 다시 필요한 곳에 쓰이는 일을 하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실까요?
하늘나라의 부르심 가운데 살아가는 거룩한 형제들은 거룩한 생각으로 그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제 거룩한 형제들을 위한 권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들을 향한 권면이 무엇입니까?
“fix your thoughts on Jesus”

여러분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하십시오!
아마도 “거룩함”을 유지하는 방법을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한 목수 아버지가 어느 날 못질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들이 그것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큰 망치로 작은 못을 ‘탕! 탕! 탕!’ 박는 것이 재미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못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얘야, 못질을 잘하려면 네 시선을 고정해야 한단다. 못만 쳐다봐라. 그러면 처음에는 못이 작아 보이지만, 나중에는 점점 크게 보인단다. 그렇게 해서 못대가리만 때리면 되는 거야. 그런데 만약 네가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한눈을 팔면 손가락을 찧고 말 거다.”

우리가 왜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해야 하나요?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의 본성이 욕망 때문에 빗나갈 수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룩한 형제들아!”라는 말씀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는 권면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말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께 생각을 집중해야 할까요? 그래야 하늘나라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누군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보지 못한 하늘나라를 보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향해 달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제나라에 도둑이 있었는데 대낮에 금방에서 금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관원이 “사람이 많은데 왜 금을 훔쳤느냐?”라고 묻자 도둑이 대답하기를 금덩어리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금에 현혹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신을 바로 차리고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62: 5)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먼저는 거룩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기 위해, 시편 기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며 나에게 나오는 소망 때문에 말입니다.

“fix on”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뭔가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한 단어로 보이지 않나요? 흔들리는 세상과 물결 가운데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고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들림 가운데 고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땀을 흘려야 합니다. 흔들리는 마음과 세상 가운데서 균형을 잡고 시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가운데 우리의 생각을 고정하기 위해서는 “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을 좀 더 닮기 위해
예수님을 더 기쁘시게 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고 애써야 합니다.

스펄전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이 자기의 생애에 깊은 회의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길을 다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시골 길을 가다가 이름 없는 감리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람이 대여섯 명밖에 안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목사도 없어서 구두를 깁기도 하고, 수선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는 구두 직공이 일어나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그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을 보고는 큰 소리로 설교단에서 “저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에 스펄전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거성 같은 위대한 설교자인 스펄전이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 바른 믿음의 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더욱 진실하고 성숙된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학교 밖 선생님 365]라는 책에 이런 간단한 글이 있습니다.
젓가락 한 짝을 잃어버리면
남은 한 짝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다.
실연을 나 혼자 우뚝 서는 기회로 만드는 건 당신의 몫이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섭고 비극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우리 삶에 닥치는 어려움, 질병이 아닙니다. 지금을 피해 가는 것 같으나 언제든지 우리, 우리 가족에도 찾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무서운 것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테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집중하면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나에 대한 사람의 평가가 나의 삶을 좌지우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생각이 집중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삶을 움직여가기 시작합니다.

최고이신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가 이룬 것이 그렇게 위대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이루어 놓은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그분을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게다가 그분을 잃어버린 우리의 업적주의가 얼마나 치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피터 언더우드가 쓴 [First Mover]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한이 김일성 우상숭배를 하면서 가끔 소개하는 일화 가운데 하나인데, 1958년 처음으로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는 트랙터 ‘천리마 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북한이 선전하는 이 일화에 의하면 당시 김일성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핵심 농기구인 트랙터를 자국의 힘만으로 생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그해 11월 한 공장에서 시제품이 나오게 되었답니다.
김일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랙터 시험 운전을 했는데, 엉뚱하게도 이 트랙터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후진만 계속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당황하여 김일성의 눈치를 보는데, “우리 기술로 만든 첫 트랙터다. 뒤로라도 가기만 하면 됐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트랙터를 만들고 김일성은 감격했을지 모르지만,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중진국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인데, 문호를 개방해서 기술을 배우면 되는 것을 왜 자체적으로 만들면서 그렇게 애쓰느냐는 것이죠.

이와 같은 예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2007년 ‘KTX-산천’이란 불리는 고속열차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국산화율 87%로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에 온 국민이 가슴 뿌듯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014년 호남선에 투입될 KTX로는 산천이 배제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인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하죠. 안전이 생명인 고속열차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만든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먼저 개발한 나라에서 이미 경고를 했었다는 거죠.

1970년대를 지내며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모토 아래 우리는 우리 힘으로 만든 것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개발한 KTX-산천이 세계 최초나 최고도 아닌데, 조금 더 안전하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만든다고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세계 네 번째이든 다섯 번째이든 열 번째이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최고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성을 가져다줍니까?
그분 앞에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도움을 바라봅니다. 이미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그분의 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유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최고이신 그분을 바라볼 때, 바라보는 초점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감사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지금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이신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건강의 문제로 힘들어할 때, 절망하기보다는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떨까요?
지금 당장 직장을 잃고 힘들어할 때, 그 직장을 구하는 건강한 몸을 주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떨까요?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워 힘들어할 때, 자기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음을 생각해 보세요.
직장에서 화가 나고 분노로 힘들어할 때, 그 누군가는 당신이 있는 그 직장에 들어오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교회를 가기 위해 걸어야 할 때,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를 가기 위해 차를 타야 하는 시간 때문에 불평하기보다는 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머리가 희어지는 것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빠지지 않고 있음에 감사하고요.
감사야말로 최고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장 강력한 초점입니다.

지난겨울 아프리카 단기 선교를 갔습니다.
저도 12월에 가보기는 처음인데,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은 영상 18도의 온도, 맑은 하늘 그리고 우리가 막 지난 거리의 푸름이었습니다. 하루를 보내고 다음 일정을 시작해야 하기에, 아침을 먹고 시내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유명한 영화 “Out of Africa”의 배경이 된 “Karen's House”였습니다. 드넓은 정원에 멋진 집, 그리고 잠시 나와 멋진 정원 나무 아래에서 청년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좋은 곳에서 여유를 만끽하기보다는 청년들의 두려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오늘을 만끽하라고.” 내일 우물을 파러 가는데. 비행기 타고 차량으로 12시간을 이동해가면 진짜 아프리카를 만나게 될 거라고.

어떤 청년이 말하더군요.
“목사님 이거 당근이죠?”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하시더군요.
‘그래, 우리의 삶에는 당근도 있고 채찍도 있구나.’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당근은 좋아하지만, 채찍은 경험하거나 기억하기 싫어한다는 것이죠.

누구의 인생을 봐도 당근과 채찍은 반복됩니다. 그래서 지혜서 기자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결국, 그 어느 때나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생각을 고정하고, 채찍의 때에 기도하고, 당근의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
당근의 시간에 주님을 찬양하고, 채찍의 때를 예비하는 사람.
최고이신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의 시선을 집중할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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