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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나는 아니라 (요 18:15-18, 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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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라 (요 18:15-18, 25-27)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18:15-18, 25-27)  


베드로가 주를 부인한 사건

오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부인했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부인한 것!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네 복음서가 공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성은 물론, 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부인하는지, 시인하는지?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그렇습니다. 거기에 내 인생 전체의 흥망이 걸려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이 사건에 대한 사복음서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다소간의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공관 복음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부인한 것을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은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세 번째 부인 사이에 안나스에게 심문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인한 장소도 요한은 첫 번째 부인한 장소는 제사장 문간이고, 두 번째, 세 번째 부인한 장소는 뜰이라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아래 뜰”(마태는 “바깥뜰”)에서 첫 번째 부인, “앞 뜰”(마태는 “앞문”)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부인한 것으로 되어 있고, 누가는 모든 것이 그냥 “뜰”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 부인한 시간적 간격에서도, 마태나 마가는 그냥 “조금 후”로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조금 후”(a little while)의 시간이 걸렸다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는 “한 시간쯤”(about one hour)걸렸다고 기록했습니다.(눅22:58절 이하) 

질문자에 있어서는, 첫 번째 질문자는 “한 비자”(마26:69,눅22:56), “대제사장의 여종”(막14:66), “문 지키는 여종”(요한) 등으로 기록했고, 두 번째 질문자는 “다른 여종”(마26:71), “여종”(막14:69), “다른 사람”(눅22:58) 혹은 “사람들”(요한)로 기록했고, 세 번째 질문자는 “곁에 섰던 사람들”(마26:73,막14:70), “또 한 사람”(눅22:59),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일가”(요한) 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에 기초하여 베드로가 주를 부인하던 장면을 再構成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주님이 체포된 직후 대부분의 제자들은 다 도망쳤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 관저로 호송했습니다. 먼저 안나스에게로 갔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대 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장인이었고, 안나스와 가야바는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한 집에 살았다고도 하고, 최소한 마당을 같이 사용할 정도로 가까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Hendriksen, Godet, Dods) 안나스의 집은 겟세마네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안나스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안나스에게로 이끌려 가시는 동안, 베드로는 “다른 제자”와 함께 멀찍이 바라다보면서 대제사장의 뜰로 가까이 갔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해 온 군병들은 예수님을 제사장 앞까지 호송한 후에 안토니아 요새로 돌아가고, 성전의 경비병들과 대제사장 관저의 하속들은 뜰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는 “다른 제자”의 안내로 “대제사장의 뜰”(아래 뜰,막14:66, 바깥 뜰,마26:69)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제자”가 누구인지 말씀드리고 나서 계속하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다른 제자”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일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황으로 보아서는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족일지도 모릅니다. 요한이 제사장 족이라는 설의 근거는,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모친과 자매지간이라는 것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곁에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살로메란 이름이 공관 복음에 언급되어 있으나(마27:56,막15:40), 요한복음에는 그냥 “이모”라고만 언급한 점으로 보아서 살로메가 바로 요한이 말한 “이모”, 즉 마리아의 자매였을 것입니다.(요19:25)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인척 관계에 있었고,(눅1:36)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눅1:5) 

그러므로 살로메는 제사장 족이었으며, 요한도 제사장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A.D.190년 경의 폴리크라테스의 편지에 보면 요한이 제사장족이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인척지간 때문에 요한이 제사장들과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예루살렘 제사장 족들에게 가져다 팔면서 맺어진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지 여종은 요한을 알아보고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들어서자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낮 익은 얼굴입니다. 성전에서, 혹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이적을 행하시던 예수님 곁에 따라다니던 사람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오?”(17)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막)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눅) 이 때에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황급히 대답합니다. “나는 아니다!” 베드로는 이 때에 마음이 조마조마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군병들 앞에서 칼을 꺼내어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던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무지막지한 군병들의 위세에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신분이 노출되어 예수님과 똑같은 신세가 되면 어쩝니까? 그런데 밤의 어둠이 자신의 얼굴을 적당히 가리워 주는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그는 어둠에 의지하여 용기 있게 뜰로 들어섰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는 최대한 빨리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다!”(17)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마)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막)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눅) 

사실 이 때에 여종이 한 질문은 부정적인 질문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는 말을 받아 내려는 질문이었어요. 원문에 보면 부정사 μη로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제자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그러므로 간단히 “아니라”고만 대답하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온 베드로는 성전 경비병들과 하인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난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여종 하나가 모닥불 빛에 비취인 베드로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도 그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았소!” 묻습니다. 곁에 서 있던 사람도 관심을 가지고 다시 묻습니다. 당신도 그 당이오? 베드로는 다시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나는 아니라”(25),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눅)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친걸음에 시치미 떼고 예수와는 상관없는 사람인양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편으로는 예수님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한 편으로는 베드로에 대해서 점점 더 의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사람 저 사람, 여럿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런 중에 베드로를 결정적으로 난처하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말고의 친척입니다. 그는 성전 경비원으로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다가 자기 친척 말고가 예수의 제자에게 귀를 잘리는 장면을 목격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바로 그 사람이 여기 서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눅)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막)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마)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이제 베드로는 결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수단을 씁니다. 저주로 맹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저주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그의 제자라면 당장 죽을 것이다!” 혹은 “내가 그의 제자라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따위의 맹세를 하면서 제자가 아님을 주장한 것입니다. 주님은 멀찍이서 이 장면을 바라보셨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무렵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베드로는 뛰쳐 나가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킵니다. 특히, 예수님이 메시야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수행하시는 가운데, 한 편에서 首弟子가 그를 바라보면서 부인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이 장면이 주는 교훈을 살펴봅시다.


우리도 주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사건을 읽으면서 베드로를 욕합니다.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의리가 있고 신의가 있지, 그렇게 변하면 되나?”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베드로 이상으로 주님을 부인할 수 있고, 또 부인하면서 살고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만물의 영장”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병들어 눕는 순간부터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육체가 약하고 마음이 약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이 어떻게 약할 수 있는가를 골고루 보여줍니다. 특히 신자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첫째로, 불신앙으로 유도당할 때 부인합니다. 맨 처음 베드로는 간단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여기에는 긴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가장 간단합니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신자라고 고백하면 일이 귀찮아집니다. 같이 붙잡혀 심문을 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상황을 보면 주를 부인하게 만드는 “매력들”이 많습니다. 

우선, 주를 부인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는 점입니다. 잠깐만 부인하면 됩니다. 한 순간만 부인하면 나중에 다시 믿는다고 고백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부인할지라도 마음으로만 부인하지 않으면 되리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순간들을 주님을 “편리하게” 부인하면서 삽니다. 

신랑 만나 결혼할 처녀는 한 순간만 시부모 앞에서 예수를 안 믿는다고 말하면 됩니다. 우상 숭배자와 상거래를 하면서 계약하는 순간에만 예수를 안 믿는 척 하면 됩니다. 신입 사원 면접에서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간단히 대답하면 문제가 수월합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경우에, 불신자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유도당합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잠깐만” 부인하면 된다는 “매력”때문에 주님을 부인해버립니다.
  
둘째로, 악인의 무리와 섞일 때에 주를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스승을 불법적으로 죽이려는 악한 무리들 속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의 생각은 아마도 그들 무리 속에 적당히 섞여 있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마치 그들과 한 패인 양! 그러나 불빛은 그의 숨은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부득불 불신 세계 속에 섞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무리 속에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됩니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편)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52:11-12, 고후6:14-18.) 

악한 사람들 속에 자리 잡는 것이 때로는 퍽 유리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다윗도 사울의 칼을 피하여 두 번이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삼상21장,27장) 그 때에 그는 바알을 섬기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위험하게 쫓겨납니다. 

한번은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 도망쳐야 했고, 두 번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여 되돌아 왔습니다. 잠깐 동안은 형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위기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악인과 한 패가 되는 것을 결코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 속에서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어떤 노력도 버려야만합니다. 비록 그들 중에서 떼돈이 굴러 들어오고, 좋은 지위가 주어지고, 명성이 약속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 중에서 나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육체의 안일을 구할 때에 주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불을 쬐기 위해서 악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날은 상당히 추웠습니다. 음력 정월은 상당히 추운 겨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재판하던 마당에는 불이 피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몸을 녹이기 위해서 불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 때에 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대개 한가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열기에 추위를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려는 마지막 사명의 열기와 고난의 열기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직 할 일이 없는 사람들만이 추위를 느끼면서 불가에서 몸을 데웠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심문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몸을 추위에서 지키려는데 주력했습니다. 육신의 안일은 분명히 주님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오죽하면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라고 했겠습니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음이라.”(롬8:5-8) 

오늘도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불가로 모입니다. 술집으로 모이고, 놀음판으로 모이고, 허황된 모임을 따라서 이리 저리 몰려다닙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주를 부인합니다.
  
넷째로, 한 마디 부인이 결정적 부인으로 이어집니다. 첫 번째 부인할 때만 해도 주님을 그렇게까지 부인하리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문간에서 계집종의 질문만 받아 넘기면 만사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점점 더 심각한 질문이 날아듭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를 결정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돼버렸어요. 최소한의 양심까지 팔아먹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술책입니다. 

베드로는 맨 처음에 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간단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오직 여종 한 사람 앞에서만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주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맹세를 덧붙여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결정적으로 부인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후의 저주까지 덧붙여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여러분!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예수를 모른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비록 어린 아이 앞에서든, 계집 종 앞에서든 안 믿는 척 하지 마세요! 만일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극단적인 부인도 강요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농담 중에서라도 “예수는 나의 구주”라고 시인한다면 우리는 단번에 예수를 부인하는 시험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주님이 신앙을 지켜주십니다

지금까지 저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던 점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님을 부인할 수 있고 또 부인하면서 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지기만 한다는 말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다시 강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열렬한 제자의 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공회 앞에서 사람의 소리를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주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항합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죽음의 위기에 놓여도, 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연약하여 때때로 주님을 부인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주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견딜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민 앞에서 “나는 예수의 제자!” 라고 외치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주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에 주님은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눅22:61) 

그 때에 베드로는 주님과 눈을 마주쳤을 것입니다. 비록 밤이 어둡고, 서로 멀찍이 있었어도 베드로는 주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길에서 제자들끼리 하신 말씀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이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는 베드로를 모르고 계셨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은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누가는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것은 바로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자기 사람들을 지켜보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베드로의 부인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연약한 베드로와 사명에 불타는 주님, 죄인 베드로와 그를 위해 속죄하시는 주님, 베드로의 배반과 주님의 사랑, 베드로의 좌절과 주님의 인내, 바로 이러한 대조적인 모습이 베드로와 주님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완전히 책임지셨습니다. 그의 영혼과 그의 생각과 사상과 육체의 건강까지 다 책임지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베드로를 넘어뜨리려고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보시고,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눅22:31-32)  
  
앞서서 본 바와 같이 겟세마네에서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신 것도 실상은 베드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말고의 귀가 잘린 채로 돌아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제사장이나 말고의 일가나 다 이를 갈면서 베드로가 어떤 작자인지 나타나면 요절을 내겠다고 별렀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뜰까지 갔던 베드로는 여지없이 붙잡혀 고문당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까지도 내다 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비록 세 번이나 부인했을 지라도 베드로의 신앙을 붙들어 주시고자 항상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순교당하는 스데반을 바라보시고, 풍랑 일어 고생하는 바울을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불신앙을 바라보시는 게 아니라, 티끌만큼 작은 믿음을 바라보십니다. 베드로가 비록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지라도, 베드로가 주님을 믿으려고 고민하기 때문에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주석가 Barclay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락방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진짜 베드로요, 겟세마네 달 빛 아래서 외로이 칼을 뽑았던 것이 진짜 베드로요, 주님을 홀로 보낼 수 없어 뒤를 따랐던 것이 진짜 베드로였다. 공포심에 찢겨 주님을 부인하던 것은 진짜 베드로의 모습은 아니었다.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우리의 믿음의 진짜 모습을 감찰하실 만큼 크시다. 우리가 비록 정말로 패배한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의 불신앙을 보시지 않고 우리의 충성심을 보시며, 죄에 패배한 우리를 보시지 않고 선을 따르는 우리를 보신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이 적은 것과, 믿음이 없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을 버리는 것과 멀찍이라도 주님을 따르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주님은 신앙을 가지려는 발버둥 가운데서 넘어지는 베드로를 보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신앙도 없이 주를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이 적을지라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진정으로 보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러한 시선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넘어지고 자빠지기 쉬운 세상에서 믿음을 든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우리를 위해서 닭이 울어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베드로 기념 교회게 있습니다. 그 예배당 지붕에 보면 닭의 모습이 올라 앉아 있습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베드로에게 울어 주던 닭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할 때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때까지 아무 생각도 없이 거침없이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뿔싸! 이게 뭡니까? 다른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했던 자신이 아닙니까? 겟세마네에서 주를 위해 말고의 귀까지 잘랐던 베드로 아닙니까?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으로 주님이 붙여 주신 이름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제자 삼으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던 그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저주하면서 맹세하면서 여러 증인들 앞에서, 하잘 것 없는 계집종 앞에서까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심히 통곡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울어주는 닭이 많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시끄러운 짐승의 울음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영혼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외쳐집니다. 명 설교가들이 즐비합니다. 사람들은 이리 저리 좋은 말씀 들으려고 몰려다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명 설교가 아니라, 닭 우는 소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짐승의 소리에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명 설교는 고사하고, 서론 본론 결론도 없고, 뒤죽박죽된 설교라도 새겨들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설교자의 설교 보다는 듣는 마음 바탕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둔감한 자에게는 천사가 와서 설교해도 소음이요 잡소립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개가 와서 짖어도 회개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중대한 원리를 터득하세요. 요즘 기독교 서점에 가 보세요! 간증집 설교집 홍수를 이룹니다. 다 소용 없어요. 개소리라도 마음이 열려야 들리지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마13:23) 

좋은 씨도 문제지만 좋은 밭이 문젭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민감하세요. 신앙에 교만하지 말세요. 어린 아이 소리라도 귀담아 듣는 겸손을 가지세요. 때로는 초신자의 소리에도 하나님 음성이 있고, 불신 이웃의 소리에도 하나님 음성이 있고, 돌아가는 환경의 변화에도, 계절의 변화에도 하나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무수한 닭 울음 소리를 동원하십니다. 베드로처럼 들을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신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고칠 준비를 하고 사는 신자요. 또 어디서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고쳐가는 멋진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동원하시는 닭이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신앙을 팔아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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