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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린 주님 (창 37:25-27, 마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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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린 주님 (창 37:25-27, 마 26:1-2)

어떤 소년이 강아지를 사러 애완동물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가게주인은 강아지를 보여주고, 소년은 한 마리씩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놈을 골랐니?” 
“나중에 말씀 드릴께요”. 
“강아지 한 마리가 얼마 씩이예요? 나중 올께요.” 
“빨리 와야 한다. 아주 잘 팔리거든.” 
“걱정 없어요. 제가 고른 강아지는 그때까지 있을 것이니까요.” 

소년은 잡초를 뽑고, 유리창을 닦아 모은 돈을 가지고 다시 가게로 왔습니다. 
“좋아, 이제 갖고 싶었던 강아지를 가지고 가렴.” 

소년은 비쩍 마른 절름발이 강아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얘야, 그건 가져가지 말아라. 불구잖니.” 
“아니에요. 제가 꼭 가지고 싶었던 강아지예요.” 

주인은 순간 입을 다물었습니다. 소년의 바지 밑으로 의족이 보였던 것입니다. 불쌍하게 상처 입은 강아지는 상처를 가진 소년에게 팔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상처 받은 우리를 위하여 상처를 입으시고 팔려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엄청난 고난입니다. 죄와 상처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인류의 치유자로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주님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리셨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홀트양자회에서 한국 아기를 입양하겠다고 온 미국인 부부를 안내한 적이 있습니다. 딸아이를 입양하러 온 부부는 장애를 가지고 있고, 병이 나서 눈곱이 끼고, 코를 흘리고, 제일 못생긴 여자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어차피 입양할 바에야 예쁜 아이를 입양하라고 하였지만 그 부부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고, 몹시 아프고, 못 생긴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완전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구약 신학에는 ‘모형학’(typology)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구약의 인물이나 사건이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형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급에 갔습니다. 애급에서 총리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기근에서 백성들을 구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모형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팔리실 것의 모형입니다. 
  
요셉이 왜 팔려갔습니까? 요셉은 가장 가까운 형제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야 할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게서 팔리셨습니다. 요셉은 애급의 총리가 되어 기근에서부터 백성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죽어가는 백성들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요셉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팔렸고 예수님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팔리셨습니다. 
  
결혼관습은 인간 역사에 세 단계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남성이 여성을 훔쳐다 아내로 삼는 약탈에 의한 결혼이 있었습니다. 흔히 ‘보쌈’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계약 또는 매매에 의한 결혼이 있었습니다. 신부가 물건 또는 노동력과 교환 조건으로 팔린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가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결혼이 있었습니다. 오랜 결혼 전통에서 나온 말 가운데 ‘허니문’(Honey Moon)이란 말은 약탈결혼시대에 나온 말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감추어 두고 신부측 사람들이 찾다가 지쳐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을 ‘허니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을 ‘웨딩’(Wedding)이라고 하는데 ‘웨드’라는 말은 신랑이 신부를 사올 때 건네준 황금이나 소나 말 따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는 결혼지참금제도가 있습니다. 인도에는 ‘다우리’라는 제도가 있어서 신부를 사오는 법이 있습니다. 이슬람사회에는 ‘마흐르’라는 결혼지참금제도가 있습니다. 베트남에는 ‘납따이’라는 결혼지참금제도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나라마다 이런 결혼제도를 가진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혼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부인 우리를 얻기 위해 결혼지참금을 내셨습니다. 이 결혼지참금 때문에 예수님은 팔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팔리신 것입니다. 

첫째, 유월절에 팔리신 주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마태복음 26:2에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이란 죽음의 신이 머물지 않고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급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온 애급인 집의 처음 난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은 그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일 년 된 어린 수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2:13에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린양의 피가 죽음을 그 집에서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피 외에 그 어떤 것도 유월의 조건이 아닙니다. 죽음을 면하게 하고, 죽음의 신이 지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애굽기 12:21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양을 잡되 가족대로 잡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이 가족단위도 아니고, 민족단위도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오래 전에 ‘십계’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물론 영화란 원본인 성경을 토대로 극화한 장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의 장면에 보면 여호수아가 고라의 딸을 사랑합니다. 고라는 출애굽할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고라의 집 문설주에 몰래 피를 발라놓았습니다. 그래서 고라의 가족들이 죽음을 면하고 함께 출애굽합니다. 피를 누가 발랐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문설주에 피를 발랐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죽음의 신이 그 집을 지나갔습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어린양의 피 밖에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가족 수대로 양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한번으로 영원히 예수님께서 어린양이 되셔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고린도전서 5:7에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하게 하고 죽음의 신이 지나가게 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29에는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심을 증거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이심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요한을 통해 증언합니다. 
  
마가복음 14:12에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승에는 첫 번 유월절을 기억하면서 매년 유월절에는 반드시 양을 잡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터에게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탐욕과 욕망 등 종교개혁자들이 범한 기나긴 죄의 목록들을 들고서 찾아와서 시비를 건 것입니다. 루터는 죄의 목록이 너무 짧다고 하면서 또 다른 죄들을 불러주었습니다. 마귀의 기록이 끝나자 루터는 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맨 아래에 이 말을 기록해 두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가 죽음을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끈 것입니다. 
  
저는 양을 잡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먼저 양의 목을 따서 피를 냅니다. 어느 정도 피가 빠지게 되면 목을 완전히 자릅니다. 발의 끝을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다리를 꺾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양을 잡는 것을 보면 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양을 잡을 때 잡히는 양은 자기가 잡히는 것을 아는 모양입니다. 나무에 묶여 있을 때 아주 구슬프게 웁니다. 양을 잡는 사람이 데리러 오면 안 가려고 질질 끌려 바닥에 발자국이 선명히 남습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도 십자가는 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피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고난이었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게 하는 것은 어린양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피만 있으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피 외에 어떤 것도 구원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흠 없이 길러진 양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주님은 유월절에 팔린 어린양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팔리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함입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리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팔리시는 수모를 당하신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인신제사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신제사의 풍습은 우리나라의 전래이야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에밀레종을 만들 때도 사람을 용광로에 넣으니 비로소 쇳물이 녹아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심청전에서는 심청이 아버지를 위하여 인당수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사사기에는 입다라는 용맹한 사사가 암몬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기게 하시면 내 집에서 마중 나오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입다는 암몬의 20개 성읍을 점령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승전 소식을 들은 딸이 그의 집에서 아버지를 마중 나왔습니다. 기뻐 춤추며 나오는 외동딸을 보고 입다는 통곡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서원대로 딸을 번제로 드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신제사를 위해 팔리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은 몸과 피 즉 생명을 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구속이므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죄를 지어 생명을 잃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몸을 주심으로 죽으시는 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그 몸이 팔리신 것입니다. 
  
룻기에는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10번 나타납니다. 기업이란 히브리어로 ‘고엘’인데 사전적 의미는 팔린 집이나 물건을 다시 사다, 노예로 팔린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자유를 주다는 뜻입니다. 기근으로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피난을 갔던 나오미는 두 아들을 다 잃고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둘째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왔지만 가난하여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어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를 본 밭 주인 보아스는 룻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에 대한 친절에 감사합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 두 아들인 기룐,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샀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보아스에게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유업을 물러줄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보아스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돈을 주고 판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을 다 맡겼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룻의 생명도 보아스가 산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종’이란 단어가 900번 이상 언급됩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며 나는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종이면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종을 사서 자유를 주시고, 구속하셨습니다. 종을 사기 위해서는 자신이 제물로 팔려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팔리신 모습입니다. 
  
“내가 종이다”라는 자의식을 바울처럼 철저하게 가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자기인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리시고 죽으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 말입니다. 그리고 종이었던 내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깊이 느끼게 되는 깨달음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학자 안셀무스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라는 책을 통하여 유명한 ‘보상설’이란 학설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를 마귀에게 속전(贖錢)을 주고 사서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속전을 주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팔리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대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이란 날이 있습니다. ‘욤 하키푸림’(욤 키푸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이 말은 ‘카파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덮다’, ‘죄로부터 면제 받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노예의 몸값을 대신 치르고 사서 자유롭게 놓아주었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노예의 몸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팔리신 것입니다. 
  
개성에 가면 고려박물관이 있습니다. 고려성균관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소장된 옛 고려시대의 자료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노비를 팔고 사는 값’입니다. 15세에서 50세 이하의 여자종은 비단 120필, 15에서 50세 이하의 남자종은 100필입니다. 15세 이하 50세 이상의 여자종은 60필, 15세 이하 50세 이상의 남자종은 50필입니다. 당시에 소 한 마리의 값은 400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 값이 소 값보다 못하고, 남자 값이 여자 값보다 못했습니다. 노예는 팔려갑니다. 누가 대신 값을 주고 사서 자유인으로 풀어주기 전까지는 언제나 노예입니다. 대신 값을 주고 자유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자유인이 되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팔리신 그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심청과 예수님을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팔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심청은 자신이 죽음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심청은 다시 환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심청전을 성경을 아는 사람이 썼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심청전과 성경은 핵심이 다릅니다. 심청전은 그 핵심이 효이고, 성경은 그 핵심이 구원입니다. 

  
결론 

아직 보지 않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최근 영화 ‘링컨’은 링컨대통령의 마지막 4년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이 남북전쟁을 치렀습니다. 남북전쟁으로 60만 명이 전사하고, 수백만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남북전쟁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합니다. 

첫째는 공업화가 진행된 북부에서 노동력이 부족하여 남쪽의 흑인 노동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남부의 황금작물인 면화를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남부의 육로를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원인은 다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 세 번째 원인은 다른 나라가 아닌데 육로를 얻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남북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노예해방이었습니다. 링컨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13조 헌법의 수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링컨은 1863년 1월 1일에 노예해방을 선언하였습니다. “모든 노예는 자유로우며 스스로 생업을 가질 수 있으며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는 노예가 없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전쟁을 치렀습니다. 온갖 정치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재정과 국력을 소모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의 생명을 값으로 주고 노예를 사서 자유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마귀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모진 비난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팔리셨습니다. 우리의 못된 죄성과 마귀에게 종 됨을 구하시려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팔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갈라디아서 5:1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팔리심으로 우리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팔리심으로 얻은 우리의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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