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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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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출 15:22-27)


4세부터 10세의 어린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병 가운데 성장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장통은 뼈의 성장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데 비해 근육의 성장이 느려서 생기거나, 뼈가 자라면서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골막이 늘어나면서 주위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병에는 어떤 특별한 치료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통증이 일어난 부위를 마사지하거나 따뜻한 물수건으로 찜질하면 어느 정도 나아집니다.  아이들은 대개 저녁 무렵에 통증을 호소하지만 심하게 앓는 아이들은 한 밤중에 깨어 통증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 밤중에 그렇게 아픔을 호소하면서 잠을 설치다가도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1, 2년 정도 지나면 이 병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 생활의 여정에도 이런 성장통이 경험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언제나 맑고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뜨겁고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구름이 가득한 흐린 날을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공동체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와 같은 성장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 역사를 통해서 그들이 잊을 수 없는 놀라운 한 가지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 애굽 땅을 빠져 나오는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압제하던 그 바로에게서 온전한 해방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를 건넌 후에 찬양을 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앞에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 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호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서적인 감동 그 자체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꼭 사흘을 갔습니다.  사흘만에 그들 앞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홍해를 건너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있는 아름답고 풍성한 땅이 아니라 삭막하고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사막 길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그들은 목마름을 호소하면서 사흘의 길을 걸었어도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사흘만에 마라라는 땅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신없이 그 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쓴맛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그 쓴 물을 토해 내며 여기 저기 드러눕기 시작합니다.  더러는 병들어 누운 자들도 있습니다.  마라의 땅에서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기대했던 우물에서 물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고통의 몸살을 앓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험하게 되는 성장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다 한 단계 뛰어넘도록 자라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허용된 고통의 체험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시고 고통 중에 있는 그들을 치료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십니다.  이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라파"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라파'라는 말은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라파'라는 말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고통 중에서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내 마음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까지도 치유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마라의 현장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가운데 어느 때엔가 우리도 이런 고통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믿음의 여정에서 고통을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구원 후에도 광야길이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광야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체험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체험은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여행의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본문 2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앞에 있는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를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자마자 경험하게 되는 것은 수르 사막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홍해에서의 구원이 새로운 광야 여행의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약속의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분명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은 매우 길고 긴 광야 사막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경험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구원의 체험처럼 위대한 체험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건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이제 막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는 인생의 광야 길을 통과해서 약속의 땅,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그 놀라운 사건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원의 체험은 어떤 사건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사건을 가져다주는 여행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사건을 가리켜서 성경은 종종 두 가지로 비유합니다.  하나는 출생의 비유요, 또 하나는 결혼의 비유입니다.  출생 사건과 결혼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출생했다는 것, 그래서 태어났다는 것은 성장의 시작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은 경이로운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이제부터 잘 자라가야 합니다.  결혼했습니다.  화려한 웨딩은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축복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결혼식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곧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것이 새로운 출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혹은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잘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탄생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건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그 다음부터가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잘 자라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것은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아기는 2천 번 이상 넘어지고서야 걸을 수가 있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2천 번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더 많이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건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세상 속에서 거룩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저들과는 분명히 구별된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하십시오.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 신실함이 한결 같아야 합니다.  잔머리를 굴리지 마십시오.  잔머리가 발달된 사람은 잔챙이 인생 밖에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진실하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자라가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주 안에서 날마다 아름답게 성장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셔야 합니다.

구원의 또 하나의 비유는 결혼입니다.  결혼도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화려한 경험이지만 그것도 시작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신랑을 만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그런데 신랑이신 예수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인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났든, 결혼을 했든 그것은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광야의 인생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통해서만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광야의 길을 통과해야만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건은 분명히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광야의 길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광야의 길을 가면서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 번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셔야 합니다.

특별히 기도 중에서도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인생의 광야 길에는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사건들은 면제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경험입니까?  춤을 추었습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 흥분된 감격이 사흘 밖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사흘만에 상황은 역전됩니다.  위기가 찾아옵니다.  목마른 모습으로 사흘 동안이나 사막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물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물을 마셨더니 쓴 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향해 원망하고 지도자를 향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노래하던 입술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새어 나옵니다.  춤추던 손으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탄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인생에서 고통이나 환난이 면제된다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광야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세상에서 환난의 면제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믿음의 생활을 잘 해도 환난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의 믿음의 자녀들에게 환난을 주시는지 그 이유는 우리도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아시는 어떤 목적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환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바는 환난의 면제가 아니라, 환난에서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생의 수많은 환난 앞에서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인생 광야에서 승리할 수가 있을까요?  승리의 방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서도 특별히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셔야 합니다.  물론 부르짖는 기도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 중에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드리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와 환난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모여서 힘써 부르짖는 기도는 공동체가 하나됨을 경험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열린모임에서는 정말 뜨겁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늘 문을 열고 지역의 영적 분위기를 장악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기에서 "부르짖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서는 "cried ou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부담이나 염려나 걱정을 내 속에 집어넣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그 모든 것을 다 쏟아내며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탁하는 집중적인 기도입니다.  부르짖음의 기도!  이 기도에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들에게서 부르짖는 기도를 원하실까요?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가운데 위기를 느끼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울어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얼른 찾아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짖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들에게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부르짖는 순간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성경에서 "부르짖으라"는 단어를 찾아보십시오.  그때마다 어떤 것이 약속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부르짖을 때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겠다고 하십니다.  부르짖을 때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부르짖을 때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부르짖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너에게 해야 할 일은 너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단순히 응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구절을 가리켜서 Dial 333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급할 때 119를 누르듯이 예레미야 33장 3절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해결책을 지시하십니다.  나무 조각을 마라의 우물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했더니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샘이 치유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이런 응답을 보여주시면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라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도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이유는 사실 단순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부르짖어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마침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 사순절의 기간에 모두가 주님의 보좌 앞에 나와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과 개인과 교회와 우리 나라의 모든 문제들을 올려드리는 가운데 응답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뜨겁게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부르짖는 기도와 함께 또 하나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광야의 길에서 승리를 하고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도 말씀에 순종함을 배우셔야 합니다.

본문 25절과 2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단순히 치유의 역사만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고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마라의 샘터에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도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시험할 의도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맑고 아름다울 때에는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쉽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이 어둡고 폭풍우와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 내 인생의 시간이 깊은 고통의 밤중일 때,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 수가 있을까요?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삶을 살수 있다면 그는 진짜 믿음의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속에 있는 그들을 건져내시고 치유하시면서도 우리가 고통에서 치유 받고 응답을 받는 그 모습보다 더 보시고 싶어하시는 것은 너희들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여전히 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시고 싶어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기도에서 응답을 받고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기도와 함께 붙들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우리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되십시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평생 다녀도 그의 인생에서 진정한 믿음의 간증도 능력도 없이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일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하면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의 은혜는 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병 고침을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인생의 고통 과 관련하여 이중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방의 축복이요, 두 번째는 치유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고통에서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예방의 축복입니다.  쉽게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때때로 운전을 하면서 교통 법규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법규를 없애버리면 편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고가 일어나겠습니까?  교통 법규가 때로는 나의 행동을 제한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 교통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축복입니다.  사고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그것이 나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나를 지켜주고 내 삶을 거룩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예방하고 보호할 뿐만 아니라 내가 인생을 살다가 고통과 어려움에 빠질 때에도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할 때 내가 너희를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고통이 지나갔을 때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고통에서, 아니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장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영적 성숙을 위한 성장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고통은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허용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원망하고 불명하지 말고 일어나 광야의 길을 계속 걸어가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이제 순종을 결심하고 마라의 샘터에서 일어나 광야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본문의 마지막 2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남쪽으로 불과 11km 떨어져 있습니다.  사막에서는 단 하나의 물샘도 귀한데, 그들이 엘림에 도착했더니 물샘이 12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 70그루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환상의 오아시스입니다.  그들이 마라에서 조금 더 갔더니 마음껏 물을 마시고 편안히 쉴 수 있는 환상의 오아시스인 엘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들은 지금 마라에서 불평하고 절망하고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엘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엘림은 보이지 않아도 그 엘림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희망의 엘림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마라의 땅에서 어떤 고통과 어떤 아픔을 당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 각오만 되어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만 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모든 병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병도 치유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치유하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민족도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도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 이름은 여호와 라파,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이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를 모든 환난과 고통과 병마에서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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