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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신 이유 (신 6: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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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신 이유 (신 6:20-25)    

오늘 신명기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신명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사십 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모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할 무렵에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나온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한 죄로 광야에서 다 죽었고, 모세 앞에는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이스라엘, 장차 가나안 땅의 주역이 될 이스라엘이 앉아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출애굽 과정과 광야에서 있었던 일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빨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내게 된 이유가 그들의 부모의 죄 때문임을 설명했습니다. 또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차근차근히 일러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역사 교육이요, 신앙교육이요, 의식 교육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얻기 전에 먼저 주어진 이 가르침은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 땅을 얻을 마음의 준비부터 시킨 것이었습니다. 마치 미국 서부시대의 카우보이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총을 선물 받기 전에 먼저 총의 사용법과 총을 지녀야 하는 이유, 그리고 언제 총을 사용해야 하며, 사용해서는 안 되는지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배우지 않은 채로 총을 가지면 그 총으로 인해 불행해질 것입니다. 복을 얻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복을 받을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신앙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 있게 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본문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저히 율법과 계명을 자손들에게 가르치게 하신 바 있습니다. 

신명기 6장 6-7절을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밤낮없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가르칩니다. 심지어 길을 갈 때도, 누워 있을 때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참다못해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에 대하여, 또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인가>에 대해 질문할 것입니다. 그것이 20절입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이라 했습니다. 

그 때 뭐라고 대답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부모가 질문하는 자녀에게 해 주어야 할 두 가지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 두 대답 중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는 고백이요, 다른 하나는 미래를 조망하면서 하는 대답입니다. 

먼저 그 첫째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1-23절까지 함께 읽어봅시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멘. 

율법과 계명을 자녀들에게 철저히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하는 첫째 이유란 애굽에서 바로 왕의 종이 되어 수백 년 동안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기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여 자녀도 마음대로 낳아 키울 수 없을 정도로 억압당하던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그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말씀을 철저히 가르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명, 율법, 규례, 법도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면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에 엄청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름지기 현재의 판단과 결정은 과거에 의존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3월이 되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것이 3월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땅끝교회를 붙드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만 살던 제가 부산에 오게 된 표면적 이유 중의 하나는 제 기도입니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어디든 제일 먼저 오라고 하는 교회에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곳이 서울 이외의 곳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어떻게 저를 알고 서울에까지 찾아오셨는지, 제게 부임해 줄 것을 청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산에서 저를 부르셨을 때, 기도를 드린 것과는 달리 저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이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국은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저를 부르신 것은 교우님들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또 제가 <제일 먼저 부르는 교회에 가겠다.>고 기도하게 된 것도 하나님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제 인간적인 형편만 고려했다면 사는 데 익숙하고, 부모님 가까운 곳에서 목회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제일 먼저 부르는 곳에 가겠다>는 기도를 드린 이유도 그렇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이유도 모두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시기에 그런 기도를 드렸고, 또 부르심에 순종하게 된 것일까요? 여기서 저도 <과거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거 이야기의 주제는 <아름다운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제게 소중한 부모님을 주셨습니다. 제 부모님은 다른 면으로는 최고가 아니셨지만, 저를 향한 사랑과 정성, 눈물의 기도, 말씀의 양육, 조금이라도 제게 짐이 되지 않고자 하셨던 그 모든 마음은 최고였습니다. 수 억만 명의 사람들을 세워놓고 부모를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해도 저는 1초도 생각해 볼 것 없이 부모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너무도 귀한 가족들을 주셨습니다. 

또 제가 기쁜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쁨의 원인으로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제게 지혜를 주시고,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선후배와 친구들과 소중한 이들과 함께 추억들을 만들 기회, 풍성한 생각들과 열정과 꿈으로 채워가던 젊은 시절의 기회들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기억의 창고에 겹겹이 쌓여 있어 지금도 때때로 그것들을 한 장씩 꺼내보며 살아온 날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힘들 때 하나님께서는 저를 건지시는 분으로 거기 함께 계셨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새총에 맞아 실명할 위기를 만났으나, 하나님께서는 시력을 보존하게 하셔서 오늘까지 세상을 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질환을 앓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발병한 지 6개월 만에 기적 같은 치유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제 삶에 있어서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거기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런 큰 사랑과 은혜는 무엇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한량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밤낮 찬송해도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저는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제일 먼저 부르는 곳이 있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된 것이고, 우리 교회에서 부르셨을 때 여러 가지 인간적인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제 판단과 결정의 배후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제 아이들이 <아빠는 왜 목사가 되었어? 왜 부모님이 계신 서울에서 목회하지 않고, 부산에 왔어?>라고 묻는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빠에게 하나님이 누군데,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저는 <하나님은 내 전부이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이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동안 제 아이들도 하나님을 배워갈 것이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전부가 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 제 아이들을 향한 저의 소원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길이 어떠하셨습니까? 제 이야기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과 함께 더욱 친밀한 동행을 하시길 기원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제 이야기가 생소하신 분들은 속히 하나님의 넓고 따스한 가슴에 안겨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게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분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왜 이렇게 힘든 요구를 하시는가? 왜 힘든 말씀을 주시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은 그렇게 명령하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요즘 시청률 최고의 드라마는 <내 딸 서영이>라고 합니다. 서영이 아버지는 하는 것마다 실패를 해서 가족들을 고생시켰습니다. 가족들은 경제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의 고통도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고등학교까지 자퇴하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서 동생 진학을 돕고, 자신도 대학에 다녀야 했던 서영이의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가득합니다. 아버지에게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우리를 위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 그냥 가만히만 있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존재>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시부모가 될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 거짓말 한 마디가 살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마지막에는 이혼에 이르게 되고,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거짓말로 얻었던 것은 그 거짓말 때문에 잃게 됩니다. 

그 다음에서야 드라마는 감동적인 반전에 이릅니다. 그 반전이란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사랑하고 희생했는지, 얼마나 눈물겨운 세월을 마음아파 하면서 살았는지, 아버지의 실패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하나씩 깨달아갑니다. 그러면서 점점 아버지에게 다가오게 되고, 다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아버지의 딸로 회복됩니다. 

이 드라마는 결국 <당신은 내 인생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고 외치던 딸이 <아버지는 내 삶의 출발이고, 모든 것이며, 당연히 내 인생에 개입하여 말씀할 수 있는 분>임을 발견하는 데로 옮겨갑니다. 이 드라마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깨어진 부녀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이 따스하기 때문이요, 실제로 우리 사회에 이런 가정이 많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부족함이 많고 부실한 아버지도 아버지라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위대한 아버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단의 손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라 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유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근거가 되고, 목적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의 출발점과 결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예배당에 오게 된 이유가 하나님이길 원합니다. 힘들게 일해서 벌어들인 물질을 기꺼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시는 이유가 하나님이길 원합니다. 삶에서 거둔 기쁨의 열매들로 인하여 감사하는 이유도 하나님이시길 원합니다. 예배당 안에 들어와 눈물로 기도하는 이유도 하나님이시길 원합니다. 앞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낙망치 않고 꾸준히 걸어가게 될 이유도 오직 하나님이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렇게 철저히 가르치고 배워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4-2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아멘.  

앞에서 살펴본 첫째 이유가 과거 이야기라면, 여기 두 번째 이유는 미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축복된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주신 말씀은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오늘과 같이>란 말은 가나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땅이라곤 없던 방랑하던 백성이 자기 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떠돌이 백성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고 포도나무 아래 앉아 축제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의 미래가 계속해서 복되어 가나안의 기쁨과 평강을 계속해서 맛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축복을 계속 누리는 조건으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지켜 살 것만을 요구하셨습니다. <규례를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그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왜 이런 어려운 것을 하게 하시는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배와 섬김과 봉사, 헌신과 전도 등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할 모든 말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제게 그렇게 명령하실 당연한 권리가 있으십니다. 지금까지 제게 베푸신 은혜가 그러하고, 또 그것이 저를 잘 되게 하시려는 것임을 잘 압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명령하십시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남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작은 잘못 앞에서 남들은 느끼지 않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반성하며,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며, 더 바르게 살지 못하는 데 대해 자책하며, 더 충성되게, 더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가>라고 묻는 이들에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을 기쁨으로 따릅시다. 잠시 후에 우리는 찬송할 것입니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안위해 주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님과 성령님을 따라 순종하며 기쁨으로 사는 곳에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 행복한 듯 하지만, 그것은 참된 축복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순종하며 지키고 살아 놀라운 복을 얻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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