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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레위를 부르신 주님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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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에 2장 1절에서 12절의 내용과 같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주님은 갈릴리 호수가로 나가셨습니다. 주님이 바닷가로 나가실 때에 제자들과 함께 나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원어적인 의미로도 바닷가를 거닐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주님은 조용한 시간을 얻어 묵상도 하시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홀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다시’라는 말이 쓰인 대로, 주님은 때때로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시 한적한 호숫가를 거닐기 위해 나가셨습니다.

  그렇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또 어김없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내서 모여들었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군중도 모두 따라왔으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들은 이전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었고, 마치 신문기자들이 숨어 있다가 취재 대상이 나타나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닷가에 나타나시니까, 마치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나타나 모여 들었습니다. 이 때에 주님의 기분은 어떠셨겠습니까? 한적하게 홀로 묵상을 하고 싶은데 가만히 두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집에 혼자서 조용히 차 마시면서 고독을 즐기고 싶은데 갑자기 손님들이 들이 닥쳤을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짜증이 나고 이 사람들이 내 시간을 망쳐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주님이 가르치는 일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계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줄 때에 주님은 기회만 있으면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독자들인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처럼 이제 집에서 가르치기에는 장소가 너무 좁아서 바닷가에서나 감당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서기관들과 한 차례 충돌한 직후였기 때문에 예상되는 반대와 고난이 따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난해서 배울 길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든 야학에서, 한 글자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선생님의 마음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14절로 가면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4절은 ‘또 지나가시다가’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13절에는 한 절 안에 시간적인 간격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바닷가에 나가시매’와 ‘그들을 가르치시니라’라는 말씀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가르치신 것과 14절의 ‘또 지나가시다가’라는 말씀 사이에는 또 다른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무리들을 가르치신 후에 곧바로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공동번역이 이 부분을 원어에 충실하게 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 후에 길을 가시다가’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가버나움 마을로 나오는 길목에서 주님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곧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입니다. 레위가 앉아 있었던 세관은 건물 안에 있는 사무실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어부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세관 부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잡은 고기들은 다른 지역과 다른 나라들로 팔려나갔고, 그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는 바로 그곳에 세관을 두고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레위도 이러한 계약에 의해서 고기 잡는 권한을 관장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이 14절 말씀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단어 가운데 하나는 ‘지나가시다가’라는 말과 ‘보시고’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셨습니다. 세관에 가면 레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길을 지나가다가 레위를 봤습니다. 이런 걸 가리켜서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과 레위의 만남은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과연 우연히 길을 지나가시다가 어쩌다가 눈을 돌려 본 것이 우연하게도 레위였겠습니까? 주님은 세리로 살아가는 레위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레위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주님은 아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초대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단순히 나를 뒤따라서 걸어오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삶의 길을 계속 걸어가라’라는 명령형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분리되는 거룩한 길, 주님의 희생의 길, 고난의 십자가의 길 끝까지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말씀을 들은 레위는 어떠했겠습니까? 

  성경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내면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뒤에 감춰져 있는 것들을 들춰내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누구의 말대로 성경은 매우 불친절해서 우리들에게 자세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리에 대해서 전혀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길을 나섰다”고만 알려줍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감정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내면의 세계는 우리가 본문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유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인물들과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성경 인물들이 우리 마음과 삶 속에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성령 안에서 우리가 말씀을 읽는 법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한 마디를 하셨고, 레위는 “일어나 따르니라.” 아무 말 없이 그냥 일어나서 주님을 따라갔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그저 하나의 독서 행위로 생각하고 이 구절을 읽으면 부르시고 따라갔고 더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짧은 기술 안에 감춰져 있는 정보들을 들춰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주님이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레위의 마음에는 어떤 파문이 일었겠습니까?

  레위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세리들에 대한 정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당시의 세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서 세검을 거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과된 세금에다 덧붙여서 그것을 자기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합법으로 위장한 강도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서 일하고 그렇게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사람들이었기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반역자로, 매국노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세리는 죄인이었고, 세리는 강도와 간음하는 자와 동급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도 법률에 의해서 권리를 박탈당하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방인 노예와 마찬가지로 증인으로서 진술을 할 수도 없었고, 이들이 내는 빈민 구제기금은 더러운 돈이라고 받지도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은 헤롯왕의 두 아들 안티파스와 빌립이 다스리던 경계에 위치한 국경도시였기 때문에 세리도 많았고, 그 때문에 그들에 대한 원망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는 레위는 어떠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입에 풀칠하고 살아야 하니까 그 일을 하는 것이지 절대로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면서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도 그 누구보다도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세리장 삭개오와 같이 사람들이 죄인으로 취급하고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그곳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소문으로만 예수님께 대한 많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주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곳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살았던 고향이고, 가버나움 세관에서 근무하는 레위가 주님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계산이 빠르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들은 정보로는 유대인들은 귀신들린 사람들, 병자들, 창녀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지도 않는데, 그 분은 모든 병자들을 고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받고 친구 하나 없이 소외되어 있는데,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싶고, 그 분의 얼굴이라도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레위에게 어찌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레위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했겠습니까? 주님 앞에 도무지 나갈 수 없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 틈에도 낄 수 없는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얼마나 괴롭고, 낮은 자존감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었겠습니까? 진리에 대한 갈증과 함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회의와 함께 그렇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레위인데, 제사장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섬기지는 못할지언정! 세리라는 죄인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에 먹칠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고 주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이 일하는 세관 근처에 오셨다는 말을 들어도, 자기 앞을 지나가고 계셔도 자신의 모습을 보노라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했습니다. 애꿎은 장부만 끄적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레위의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었지만,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고, 경멸과 멸시의 시선으로 쳐다봤었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가득 찬 눈으로 레위를 보셨습니다. 레위의 눈과 주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에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레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세관에서 일어났습니다. 세리라는 굴레, 과거의 오욕과 상처에서 일어나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 어쩌면 레위가 가장 부끄러운 모습 가운데서 주님의 제자가 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레위의 이 결단은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지만, 배와 그물은 가족의 소유로 남았고, 이후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어부가 되었던 것처럼, 여차하면 언제라도 다시 어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위는 달랐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밥벌이 수단으로 여겨왔던 직업을 그만두고 다시는 세리로 되돌아가지 않는, 위대한 회심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세리라고 하는 죄인을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자격기준이 얼마나 까다롭습니까? 대학도 번듯한 곳을 나와야 되고, 높은 시험 점수와 봉사 경력, 외국어 능력과 같은 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까지도 따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15절 말씀은,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면도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과는 시간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고 곧바로 레위의 집으로 가셨다면, 식사 자리에는 레위의 가족들 정도밖에 없었을텐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지역의 많은 세리와 죄인들까지 초청했습니다. 여기서 죄인들은 형사적인 범법자들, 문자 그대로의 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세속적인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정죄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을 통털어서 지칭하는 말입니다. 

  15절 하반절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름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정죄 받던 사람들은 죄인의 벗이 되어주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을 따라다녔고, 그런 류의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그 식사 자리는 죄인들의 집합소라고 할만한 자리였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다는 소문은 그 지역에 파다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어김없이 서기관들이 나타납니다. 16절 말씀을 대충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읽을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 중에 대부분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 특별히 서기관들이 많았는데, 바리새인들이 파송한 서기관들은 당시 사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조사를 하기 위해서, 마치 경찰들이 수사를 하기 위한 것처럼 그 식사 자리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세리 레위의 집에 찾아와서 주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앞에 있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때에는 주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죄사함을 선포하셨을 때에 서기관들은 말로는 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만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서는 그 불만을 주님께는 직접 말을 걸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이후에 24절에 가면 직접적으로 예수님께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들이 불만으로 가득 찼던 것은 세리 및 죄인들도 같은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회당에서는 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쫓겨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주님은 그런 쫓겨난 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동급이 되셨습니다. 세리를 제자로 부르고 회당에서 쫓겨난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은 유대인들의 법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자기들의 권위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서기관들이 이런 불만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주님의 귀에도 분명히 들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이 말씀에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동류여서 그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죄인들을 환자에 비유하시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시면서 죄에 물들고 병들어 있는 영혼들을 치료해 주시는 의사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의인과 죄인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건강한 자와 의인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자칭 건강한 자,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건강하고 의롭다고 여겼지만, 실제로 그들 또한 죄인이었고, 그들이 바로 누구보다도 치료가 필요한 병든 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율법과 전통에 비추어서 율법과 전통대로 행하지 못하면 곧 죄인이고, 그런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런 사람들을 없애버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병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병든 생각을 갖고 예수님과 레위와 죄인 친구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는 그 자리에 찾아와서 자신들은 마치 의롭고 건강한 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세리와 죄인들을 구별하고 쫓아내기에 바빴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치료할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격리시키고 없애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없어져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죄인이란 질병과 같아서 치료하면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의사로, 죄인들을 환자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 역시 주님 앞에서는 치료받아야 할 똑같은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건강한 자, 의인에게는 주님이 필요 없겠지만, 이 땅에는 주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의인은 하나도 없고 오직 죄인들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세리 레위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건강하고 의로워서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제자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예수님이 치료해 주시지 않으시면 살 수 없노라고 고백하는 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이 있고, 주님은 바로 그런 죄인을 불러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용기가 없을 때에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레위를 죄인으로 취급했지만, 주님은 레위를 정죄하지 않으셨고, 율법의 시각이 아니라, 사랑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시면서, 앞으로 바뀌어질 그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레위를 바라보면서 너 같은 죄인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는 죄인이라고 정죄하시면서 세관을 그저 지나쳐 버리셨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주님이 죄인을 부르지 않으시고, 의인만을 찾으신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주님이 죄인을 부르시는 것은 주님은 죄인들을 치료하실 수 있는 유일한 최고의 의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떤 병든 자도 건강한 자로 바꿔주실 수 있습니다. 레위도 병든 자였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육신을 위해서 일하느라고 영혼을 돌보지 못하는, 세금으로 치부하느라고 하늘나라에 상급을 쌓아두지 못하는 병든 자였지만, 의사되신 주님은 그를 찾아가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리였던 레위,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레위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얻은 새이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은 복음서들 중에서도 가장 신학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평가됩니다. 마태는 무려 29회에 걸쳐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모든 예언들이 주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주님은 죄인을 신학자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이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의인으로 여긴다면 주님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나는 의롭고 건강하다고 생각한다면 주님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주님은 죄인들에게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레위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치유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불러주시고 함께 하셔서 새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원하기는,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주님 앞에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함으로 나아가서 의사되신 주님의 치유하심을 통해 레위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새 사람으로 세워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레위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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