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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하라 (마 6:5-13)

첨부 1


이렇게...하라 (마 6:5-13)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7)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3)
<마태복음 6장 5~13절>

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밝은 얼굴을 뵙게 되어 감사합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예전에는 고칠 수 없었던 병의 완치율이 높아졌습니다. 
저도 10여년 전에 목디스크 수술을 해서 
인공뼈 3개를 이식 받았습니다. 
건강진단을 위해 X-ray를 찍었는데 
촬영기사가 제게‘험악한 세월을 사셨군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목에 인공뼈를 넣으신 것 같아서요.’하는 것입니다. 
제가 의학의 도움을 받아서 지내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인공심장 이식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기술이 좋아져서 인공심장이 점점 최신화 되고, 
소형화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술이 널리 상용화되면
심장병을 가진 많은 환자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입니다. 
인공심장 하나의 가격이 1억 1천만 원 정도 한다고 합니다. 
재산이 많으신 분에게야 1억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생활이 어려우신 분들에게 1억 1천만원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벌어서 1억을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심장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없고 가난하다고 생각되시면
왼쪽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에 손을 대고
‘1억 1천’만원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공심장수술을 안해도 되니 
1억 천만 원을 번 것 아닙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3월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 예배에 곳곳에서 많은 분들이 
예배 실황을 보며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4번째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특별히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당시 유행하는 잘못된 기도방법 두 가지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 하나는 유대인들처럼 기도하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씩 
기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꾸짖으셨습니다. 

“…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외식하는 자」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연극인」이란 뜻입니다. 
배우가 외식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연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연극을 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다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할 때마다 쇼를 일삼는다! 
하나님께서 극장 객석에 앉아 계시다는 말이냐?”
(메시지 성경 - 마 6:5)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많이 의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기도를 어떻게 보고 듣는지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외식(外飾)」은 ‘진실 되지 않은 마음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외식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욥8:13; 15:34-35; 17:8; 사9:17; 33:14)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다른 사람의 죄는 정죄하면서 
자신의 결점은 무시해 버리는 자」들이었습니다.(마7:1-5)
또한 그들은 율법의 정신보다 형식을 더 중요시 여겼습니다. 
<「비전성경사전」, 참조>

외식은 신앙생활의 큰 적입니다. 
외식하는 신앙이 되면 그 눈에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 귀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입에서는 진실이 아닌 거짓이 나옵니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할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잘 보일까 하는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온통 신경이 다른 사람에게 쓰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 귀, 입에 예민할 뿐 하나님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외식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에서도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사람에게 영광 받으려고 구제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 사람이 많은 곳에 나가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2, 5, 16절)
“사람에게 보이려고”하지 말라.(1, 5, 16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2, 5, 16절)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겠다”(4, 6, 18절)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께는 받을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모임에서 대표로 기도 하라고 하면 
안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속회, 선교회 등 모임에서 기도시키면 
그 모임에 안가(오)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겸손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보다
사람들을 향한 두려움이 더 많아 보입니다. 
‘내 기도를 듣고 사람들이 나를 흉보면 어쩌나 …’하는 
‘기도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데 …’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생각이 많은 것입니다. 
사실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도의 순수함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혀 밑에 감추인 소리까지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조금 서툴러도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멋있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해도 …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 담긴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정죄와 비난을 합니다. 
기도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때리고,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기억에 2년 전쯤인 것 같습니다.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습니다.
가보니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제 자리는 앞쪽 테이블에 이름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초대받아 참석한 
기쁘고 즐거운 잔치자리였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다들 좋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사 전에 예배를 드렸는데 
대표 기도하러 나오신 분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 내용은 
「그 모임의 장과 임원들, 그리고 관계자들이 회개해야한다고 …
이래서는 안된다고 … 정신 차려야 한다」고 … 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분은 마치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죄인인 것처럼
기도하는데 앉아 있기가 너무 너무 불편했습니다.
숨이 막혀서 앉아있기가 싫어서 나가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는데 때마침 기도가 끝났습니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 사람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빙자하여 정죄와 비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기쁨의 자리는 한순간에 불편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때 기도하신 그분의 마음이 무엇인지는 이해했지만,
그렇게 한 것은 분명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도를 설교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대표로 기도를 하는 것인지
설교를 하는 것인지 착각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감독으로 일하다보니 
이런 저런 자리에서 설교를 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간혹 설교 전에 기도하러 나온 분들이 … 
제가 ‘설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만큼 
기도 시간에 설교를 하는 경우를 봅니다. 
기도가 뭔지 설교가 뭔지 구별이 안되는 모양입니다.

기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기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 
누군가를 가르칠 목적으로 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혼자 있을 때만 / 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대표로 기도하는 사람은 잘나서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여러 사람들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것이기에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조심하여 /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대표 기도를 하도록 위임한 이들에게 
무례함이 없게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겉멋 부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를 가르치며 누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어른 흉내 낸다고 겉멋부리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어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색조화장을 하고, 
짝퉁을 명품처럼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 …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겉멋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서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같이

그리고(두 번째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셨습니다. 

“…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을 한다는 뜻으로
‘의미 없이 지껄이는 소리’를 말합니다. (IVP성경주석참고)
주문 외우듯이 기도 하거나 
똑같은 말을 많이 반복해서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지극정성으로 백 번, 천 번, 만 번 절하면
그 공이 하늘에 닿고 하늘이 감동하여 
그 뜻이 이뤄지게 된다고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티벳 사람들은 「오체투지」라는 기도를 합니다. 
양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이마,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기도합니다. 
또한 ‘마니차’라는 것을 돌리는데 
그것을 한 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티벳에 가면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의 횟수나 
숫자를 기억하시기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100일 기도한다고 40일 작정 기도한다고 … 
하나님이 무조건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100일 기도, 40일 기도 … 좋지요.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 그런 정성이 있다면 …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심정으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설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와 같이 … 
이방인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며 
기도의 모범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기도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단지 예배 중에 한번은 외워야 하는 주문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우리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의미만이라도
잘 알면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기도의 명확한 대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듣게 하려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특정한 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만유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상 저 너머에 계신 분,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 분,
세상 법칙에 매여 계시지 않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만물의 주인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예배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라고 여기셨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그레엄 골즈워디, 「기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pp.112-114. 참조.>

사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하신 것은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요, 사랑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여러분은 
이미 세상에서 받을 가장 큰 복을 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립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놀라운 특권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기도는 어린 아이가 아빠한테 하듯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팔십이든, 구십이든 상관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수는 한 점에 불과합니다.
순수하게,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기의 심정을 털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직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기도는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명한 예술인들의 모임에서 
‘고민’과 ‘고통’의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고통이나 육체적 고통, 
또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 
그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이야기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때 하이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작은 골방을 기도실로 정했습니다. 
일에 지쳤을 때나 고민이 시작되면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올 때는 작은 빛을 발견하고 나옵니다.”- 하이든 - 

힘들고 지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분의 골방은 어디입니까? 
어떤 방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혼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저의 경우는 어떤 때는 사무실 제 책상이, 
또는 화장실에서, 식탁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어디든 하나님을 홀로 만나는 곳이 골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 어디서 하나님을 혼자 만나십니까?
잠시라도 하나님을 혼자 만나는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만약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게 된다면 
이 찬양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 (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당해 슬플 때 나 위로받게 하시네”(찬송가 364장)

내 진정 소원을 낱낱이, 꾸밈없이, 빠짐없이, 
주님 앞에 아뢸 수 있고 그 하나님을 홀로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덴마크의 종교사상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 때는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해도, 소원을 말해도
때때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기도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롬 10:13)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고,
기도하면 들으신다고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골방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라고 하셨고,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셨는데
기도할 줄 모른다면 … 
우리들은 가장 귀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일 텐데
하나님 우리들 기도할 줄 아는 입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꾸미려 하지 않게 하시고 순수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뻐하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땀 흘려 애썼습니다.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성도들의 정성된 예물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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