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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2) : 수제자 베드로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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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들(2) : 수제자 베드로 (눅 5:1-11)

세상에는 더러운 만남도 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도 많이 있습니다. 신문에 나온 유명한 성우 배한성씨에 대한 기사를 보니까 그분에게 날개를 달아 준 친구는 이석태 씨였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지독히 가난하였다고 합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거리의 우체통을 빨간색 페인트로 칠하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조그만 회사의 사환노릇도 했답니다. 

은행원이 되면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 상고에 들어갔는데 어릴 적 도끼로 나무를 패다 잘못해서 날에 찍힌 오른손 검지가 발목을 잡았다고 합니다. 당시 주판을 해야 하는데 주판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낮에 일하고 학교에 가려니 지각이나 결석을 자주 하고, 주판 점수가 형편없으니 성적은 더 떨어지고…. 싸움도 안 하는데 문제아 비슷한 놈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등록금을 몇 번 못 내고 그만두다시피 했답니다. 덕수상고에서 제적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1966년 초에 친구 이석태 씨가 찾아와 "너 대학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누구한테도 듣고 싶지 않았던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고졸 배한성? 너 아니다. 꼭 대학 가야 돼."라고 친구가 말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너나 대학 가라고! 네가 내 사정 뻔히 알잖아. 나 등록금 없어서 못 가. 포기한 지 오래됐어."라고 쏘아붙였답니다. 그 때 친구는 아, 하고 짧게 탄식하더니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는 신문지에 싼 돈뭉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답니다. "등록금 갖고 왔어. 너, 학교 가." 그 돈으로 1966년 봄, 서라벌예대 방송과에 입학하였고 오늘과 같은 유명한 성우가 되었답니다. 그 친구가 없었다면 오늘의 유명한 성우 배한성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배한성씨는 젊은 날 좋은 친구를 만난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15일 신문에 20대 손녀가 친할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해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젊은 날 남자를 잘 못 만난 것입니다. 무능력하고 건달 같은 남자를 만난 것입니다. 23살인 손녀가 남자 친구를 만나 연천군의 친할머니 집 별채에서 동거생활을 했답니다. 이들이 술을 마시다 남자 친구가 손녀딸을 때렸답니다. 이 사실을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알리니까 할머니가 "보기 싫으니 집을 나가라"며 손녀를 훈계하고, 손녀의 남자 친구에게 "불쌍한 것을 먹여살려놨더니 허튼 소리를 한다."며 나가라고 했답니다. 이것에 앙심을 품고 친 할머니를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만남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정휘동 작가는 그의 책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위로 달린다.’에서 만남을 네 종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처음은 화려하지만 시들면 그만인 만남입니다. 둘째는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만남입니다. 셋째는 생선 같은 만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썩은 냄새나는 만남입니다. 넷째는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땀과 눈물을 닦아주는 만남입니다. 

가장 잘못된 경우는 생선과 같은 만남이고, 가장 조심해야할 만남은 꽃송이와 같은 만남이며,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라고 합니다. 좋은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으로 아름답게 만나서, 힘들 때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는 남만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만남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줍니다. 우리 성도님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갈릴리 가난한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가장 축복스런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뀌게 한 만남이었습니다. 

1. 우리는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시골 벳새다 지방에 사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성급하고 경솔하여 자주 실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갈릴리 어부로 살다 생을 마감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날도 먹고 살기 위해 갈릴리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그날따라 밤새워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병든 장모도 계시고 책임질 가족이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야 가족을 부양하는데 고기를 잡기 위해 밤잠 자지 못하고 노력했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그래도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빈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기에 실패한 그날 아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해변에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여기에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예수님 찾아와 오르시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죽은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니까 나사로가 일어납니다. 나인성에 홀로되어 마지막 희망인 외아들이 죽은 집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니까 죽은 청년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버려버린 도저히 나을 수 없는 38년 된 병자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이 변하여 기쁨을 주시기 위해, 탄식이 변하여 환호를 주시기 위해, 실패가 변하여 성공을 주시기 위해, 질병을 치유하여 건강한 몸을 주시기 위해, 절망에서 소망을 주시기 위해, 분쟁에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지친 우리를, 실패한 우리를, 낙심한 우리를, 절망하는 우리를, 갈등 가운데 있는 우리를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공한 운동선수, 성공한 학생, 성공한 가정, 성공한 기업에 관심을 가지고 그곳에 몰려듭니다. 실패한 가정, 실패한 학생, 실패한 기업, 실패한 인생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패한 가정, 실패한 사람, 실패한 인생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치유의 손길을 펴시고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실패한 사업터에 회복의 손길을 가지시고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실패한 심령에 위로의 말씀을 들고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이 예수님만 모시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아무리 처절하게 무너진 기업일지라도, 아무리 비참해진 가정일지라도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가정에 축복의 문이 열리고, 기업에 번영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어떤 예수님으로 만나야 하겠습니까? 그냥 스쳐가는 만남이 아니라 예수님을 특별한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단지 역사적 인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유의미한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찾아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자신의 배를 내어 줍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밤의 실패로 짜증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간밤의 실패로 더 이상 허탈해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다 전하신 후 간밤에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슬픔, 우리의 마음을 아무도 모를 것 같지만 우리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5절에 보십시오. 밤을 새워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지시에 따릅니다. 베드로는 갈리리 바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간대 별로 고기가 많은 곳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밤새워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맞지 않는 지시입니다. 예수님은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밤새워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지쳐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지시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이미 그물을 씻은 상태이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그물을 내리자고 하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입니다. 베드로는 전문 어부답게 예수의 가당찮은 명령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가 나옵니까?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상식에 맞아야 하지요. 예수님도 내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이런 때 소망이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뜻하지 않는 횡재를 하게 된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신앙적인 체험을 한 것입니다. 질병에 걸려 기도하다 보니 질병에서 낳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업이 어려워져 가는데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면 기도하다 보니 정말 사업이 일어서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용서하다 보니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두 배가 잠기게 될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대 성공입니다. 환희의 순간입니다. 

빈 배는 고기로 가득찬 배로 변했습니다. 순종하면 우리 인생에도, 우리 가정에도, 우리 사업터에도 이런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5절에서는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미 안드레를 통해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말씀 들으려고 아침부터 나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자신은 밤새워 고기 잡고 아침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탈한 가운데 집으로 가려고한 사람입니다. 실패하여 허탈한 아침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을 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모신 것입니다. 실패한 날 아침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의 절망에 떨어진 날, 질병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날, 가정에 고난이 찾아 온 날, 바로 그날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이 하나님께 두 손 들고 항복하는 날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빈 배는 예수님을 모시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실패한 날 아침이 세상의 음성보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사업에 실패했을 때, 이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 질병에 걸렸을 때, 가정에 어려움이 왔을 때 바로 그 때가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고 찾아오시는 우리 주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 때 바로 아름다운 회개가 있게 되고, 고기잡이배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강단이 됩니다. 구원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신비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순간 나의 추한 모습, 나의 무능력,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건강할 때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병들면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짐, 증오의 짐, 질투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저주의 짐, 미움의 짐, 죽음의 짐을 주님께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고 말씀합니다. 실패했을 때 영혼의 귀가 열립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베드로의 사정을 아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오늘의 실패를 아시듯이 우리의 과거의 실패도 아십니다. 숨은 한숨과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직까지도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신 분들은 내 인생의 주님 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믿음이 없으신 분은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고, 믿기는 믿지만 아직도 신앙의 체험이 없으신 분들은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 받는 시간이 되시길 원합니다. 

그는 주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담대하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 성도님의 입술에도 이런 고백과 이런 외침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실패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 사명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주인공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실패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축복의 현장으로 바꾸어 주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0절에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고기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베드로를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썩어질 것들 세상에서 취하다 세상에 다 빼앗기고 갈 인생살이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고기 잡는 그물이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그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 뿐 아니라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3년 동안 훈련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청하여 물 위를 걷다가 믿음이 부족하여 실족하기도 하였습니다(마14:18-21).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니까 그 의미를 모르고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과 자리다툼도 하였습니다. 혈기를 참지 못하고 말고의 귀를 베기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다 부인한다 해도 자신만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을 하였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니까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다시 디베랴 호수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이렇게 배신하면 어떻게 해겠습니까?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서 성공과 출세를 위해 배신은 필연적인 필수품이라고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아니면 복수하겠습니까? 아니면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과 만난 베드로 생의 두 번째 전환점을 가져온 만남이 요21:15-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망간 베드로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끝까지 따르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지키지 못한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 찾아 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날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가 실패했을지라도, 배신했을 지라도, 도망갔을 지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포기했을지라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6)"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주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 처해있을지라도 우리를 찾아 오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15절을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치고, 상하고, 배고프고,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그를 위해 예수님은 친히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초청하시고(9-13절) 

베드로에게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 보십니다.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저주할 때 숯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다 그랬는데 주님은 그 때를 상기할 수 있도록 숯불을 펴 놓고 베드로에게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과거 베드로는 자신 있게 장담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 14:29)" 

이 사람들 다 배신한다 할지라도 저만큼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장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세 번 다시 물어 보십니다.
 
베드로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을 주님에 대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랑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깨어있는 시간의 70%를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하고 이 가운데 듣기에 45%를 말하기에는 30%, 읽는데 16%, 9%만 쓰는 데 사용한다고 합니다(Rankin 1926).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85%는 들어서 안 것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에토스는 명성, 신뢰감, 호감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측면으로, 설득 과정에 6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파토스는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유머나 연민 등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는 측면으로, 설득에 3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로고스는 논리적인 근거나 실증적인 자료 등의 근거를 제공하는 측면으로, 설득에 1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메러비안(Albert Mehrabian)은 상대방에게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38%, 표정은 30%, 태도는 20%, 몸짓이 5%의 영향을 끼치지만 말하는 내용 자체는 겨우 7%의 비중만을 차지한다고 주장합니다.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기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 경험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위기는 실패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동기가 식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회복시키시길 원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일, 고깃배, 고기, 그물 등, 내가 기대하는 것 그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입니다. 너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마26:33) 

나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고백했는데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보다 관계를 더 중요시 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 아내를 사랑하는 것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실패와 좌절의 현장에서 사랑의 동기를 회복하여 다시 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회복되면 사명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한 후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와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을 확인한 주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하고, 결점과 약점 많은 베드로이지만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약하지만 너를 통해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이든 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베드로이지만, 위기를 당하니까 결국 도망간 베드로, 배신한 베드로이지만 예수님을 그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이름 지어준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습니다. "너 내가 잘 알아 어떤 사람인지. 그러나 시몬아 낙심하지 말아 다시 출발해, 실패 했어 다시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았던 그를 처음 부르실 때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하였습니까? 신앙생활, 진학, 인간관계, 사업, 연초 계획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은 배신하면 다시는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무능한 사람, 실패한 사람 다시 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무능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배신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실패했지만 다시 찾아 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모세에게 다시 사명을 주어 민족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을 찾아가 회복시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은 찾아가 회복시켜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했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간음한 다윗을 찾아가 회개하게 하고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도망간 요나를 찾아가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니느웨를 변화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절망한 엘리야를 찾아가 회복시기시고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연약하여 사역지를 피한 마가를 찾아가 회복시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핍박한 바울을 찾아가 회복시키시고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시켰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 시간도 찾아와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있던지 부활하여 찾아오신 우리 주님 만나 다시 사명을 회복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헬렌켈러는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지만 주님 만나 사명 붙들고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링컨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빚에 쪼들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만나 사명 붙들고 일어섰습니다.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일어나 55세가 되던 해에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1만 번 이상 넘어진 후에야 겨우 걸음마를 배운다고 합니다. 바람이 있어 연을 날릴 수 있는 것이며, 강렬한 햇빛이 있기 때문에 곡식은 여무는 것입니다. 강풍을 두려워하면 물은 파도를 만들지 못합니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높은 파도를 기다립니다. 

영웅은 평상시에 나오지 않고 위기에서 나옵니다. 다윗이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골리앗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은 목동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10년 동안 사울이라는 강풍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강풍은 다윗을 성군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사명을 붙들고 나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오순절 날 그가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세 번에나 감옥에 갇혔지만 기적적으로 놓임 받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습니다.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은 전파하여 그의 가정을 변화시켜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마지막 로마에서 순교당하기까지 오직 예수를 전하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명 붙든 베드로의 삶을 통해 세상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명 붙든 세브란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세브란스 병원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명 갖은 하버드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세계적인 대학 하버드 대학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명 갖은 홀트 부부가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담은 영화를 보고 8명의 아이를 입양하는 데서부터 홀트라는 기관이 생겨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다. 사명 갖은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로 인해 수많은 교회와 YMCA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1838-1922)는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하여 12살 이후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변화는 존 챔버스 목사님을 만나 회심하고 예수님을 만날 때 부터였습니다. 그는 "나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챔버스 목사님입니다. 그 분은 내 인생의 모델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을 만나 교회에 다녔는데 13세 소년 때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벽돌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였는데 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로 가는 길이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 몹시 불편했답니다. 어른들은 모두 팔짱을 끼고 아무도 길을 고쳐보려고 나서지를 않았답니다. 그는 자기가 받던 하루 임금 중에서 7센트(약 1천원)를 떼어 날마다 벽돌 한 장씩을 자기 공장에서 사 가지고는 교회로 가는 길에 깔기 시작했답니다. 존 혼자서 완성하려면 2년이 걸릴 일이었지만 이 사실이 교인들에게 알려지고 교인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반성하고 모두 힘을 합쳐 낡은 교회당 건물까지 다시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4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존은 서점을 거쳐 상점의 점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그는 믿는 아이답게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손님이 오면 오는 손님들에게 솔직하게 물건의 장단점을 설명해 주었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주인이 존에게 말했답니다. “존! 너처럼 팔다가는 돈을 벌 수 없단다. 정직하게 장사해서는 돈을 벌 수 없는 것이야!” 그

러나 워너메이커는 달랐답니다. “주인 아저씨! 당장은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정직하게 팔아야지요. 결국 손님은 우리 가게를 다시 찾을 거예요.” 결국 존의 말은 맞았답니다. 정직한 가격과 꼼꼼한 품질 관리로 판매한 워너메이커의 방식은 인정받았고 그 상점은 갈수록 장사가 잘 되었답니다. 주인은 세상을 떠나면서 그 가게를 존에게 물려주었고, 워너메이커는 이것을 발판으로 23세에 남성용 의류 상점을 개설하여 31세 때 세계 최초로 거대한 백화점을 세웠습니다. 필라델피아에, 뉴욕에 백화점을 세워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를 세웠고, YMCA 총제가 되어 65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헌신하며 세계 곳곳에 수많은 YMCA 건물을 지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업적을 남긴 1903년 시작된 한국의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의 YMCA)의 종로 2가 회관의 벽돌도 1907년 미국의 워너메이커가 기증한 것으로 건축이 시작되었답니다. 

그의 위대한 사업가였지만 인생의 우선순위가 분명했습니다. 사명이 분명했습니다. 오직 예수였습니다. 미국 23대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이 자신을 체신부 장관으로 제의받았을 때 워너메이커는 조용히 거절했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만약 장관을 맡음으로 인해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안 되지요." 그 때 대통령은 장관직을 맡아도 워너메이커에게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그 소식을 듣고 이런 질문을 던졌답니다. 

"장관으로서 국민들과 대통령을 만나는 약속보다 주일날 교회 출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좀 무책임한 발언 아닙니까?" 

그러나 워너메이커가 웃으면서 말했답니다. "내가 주일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온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홀히 하면서 어떻게 국민들과 대통령과의 약속의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장관으로 봉사하면서 자신의 말대로 주일성수를 위해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먼 거리를 4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베다니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히 지켜냈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한번은 기자가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고 질문했답니다. 그는 주저함 없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그는 17살부터 제일독립교회서 주일학교 보조 교사로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19살에는 정식으로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21살 때, 베다니에 주일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처음 27명의 아이들로 시작했습니다. 그 장소는 불량배들이 자신들의 관할지역이라 하여 건물을 부수고 행패를 부렸답니다. 그는 근처의 상가건물을 빌려 새롭게 주일학교를 시작했답니다. 한 달 만에 그곳은 아이들로 가득 채워졌고, 옆에 있는 방을 하나 더 세내야 했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곳도 너무 좁아져서 늦게 오는 아이들은 복도와 계단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상황에 이르렀답니다. 아이들이 계속 늘어나자 결국 아래층 세 번째 방을 더 빌렸고, 5개월이 지난 후, 임대한 상가 전체를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부족해서 상가 건물 주변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드디어 교회 건물 짓기로 결정하였고, 1년 만에 교회 건물을 완공하고 입당하였답니다. 그렇게 해서 워너메이커의 베다니 주일학교는 1천 2백 개가 넘는 학급(학생은 6천 명이 넘음)이 운영되었고, 교사의 숫자만 해도 보조 교사와 서무를 포함해서 1천 5백 명이 넘는 주일학교로 성장하였답니다. 세계 최대 백화점을 이루어 백화점 왕인 그는 67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으며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도 사업이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면 세상 모임이 많아져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 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교회 출석까지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워너메이커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된 이점을 베다니 사역에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교회 모임에 참석하려 했다고 합니다. 주일성수는 흔들릴 수 없는 삶의 원칙이었답니다. 그의 생애는 주일을 기다리고, 주일을 준비하며, 주일 예배를 통해 새 힘을 공급받는 삶이었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보다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한다면...성경보다 더 좋아하는 책을 발견한다면...교회보다 더 좋은 장소를 발견한다면...주님이 베풀어 주신 식탁보다 더 좋은 식탁을 발견한다면...예수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발견한다면...천국보다 더 좋은 희망을 발견한다면...여러분은 신앙에 경보를 울려야 합니다." 

그는 매 주일 아침 9시 반부터 밤 9시 반까지 12시간 이상을 교회에서 봉사했다고 합니다.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쉬라고 권면할 때마다 그는 “주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일과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은 나의 최고의 기쁨이자 특권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가 임종 전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노력하고, 하나님 안에서 땀 흘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내 인생의 표어였으며, 내 인생의 전부였다."라고 합니다. 한 평생 예수님을 만나 아름답게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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