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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같이 한 곳에 모입시다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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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같이 한 곳에 모입시다 (행 2:1-13)


I. 기도의 능력

다윗은 사울의 무서운 창끝을 피하여 아둘람굴과 엔게디 굴속에 숨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사자와 맹수들이 드나들곤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붙잡히는 날도 맹수에게 물리는 날도 인생은 끝장납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제발 멸망시키지 마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불안한 나날을 빨리 끝나게 해 주십시오.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애절하게 몸부림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흔들리던 마음이 안정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고요한 찬송과 함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근심과 불안, 태산같은 문제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57:7-8)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이른 새벽 하나님께 무릅을 꿇은 새벽의 사람이었습니다. 내일부터 특새 - 이름하여 “황홀한 새벽길”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가 모여 기도할 때
·거기 말씀과 성령이 임할 때
  크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초대교회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 가운데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너도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고 네가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비린내나 풍기던 어부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저들은 중국의 진시왕도, 로마의 시져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도 하지 못했던 죽음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시대, 성령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하찮은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는 더 이상 겁에 질린 초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 떨던 갈릴리 촌부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로마의 한길로 달려 나왔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예수 앞에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300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가 그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무엇이 갈릴리 촌부들을 이토록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인간이 바뀌고 역사를 바꾸는 그 파우워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훈련을 누구보다 잘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신앙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십자가 앞에 서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결국은 팔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제한합니다. 성령님을 부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을 제한하는 것이 오늘 신앙인들의 문제입니다. 자기 얄팍한 이성과 경험 안에서만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과 용서를 제한합니다. 

  이런 신앙인들 -

∙ 사역을 하고 싶으나 사역할 힘이 없습니다.
∙ 사랑을 하고 싶으나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 용서를 하고 싶으나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 병이 들었을 때 낫고 싶으나 나을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할 때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기도보다 중요한 그 무엇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보다 더 긴급한 그 무엇도 있을 수 없습니다. 

II.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하므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날을 “오순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절기는 신령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유월절은 구원받은 절기입니다. 그 날은 바로 신약 성도들의 부활절이 된 것입니다.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첫 열매를 거둔 절기요 신약교회엔 첫 교회가 탄생된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그 날도 또한 주님의 날 - 주일이었습니다.
수장절은 말세에 주님 재림시 믿는 자를 모두 천국창고에 거두어 드릴 심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재림 또한 주일에 있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이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32km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절기행사에 참여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기적인 관계로 오순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날엔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까지 모두 참석을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에 나타납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모이는 곳에는 역사가 일어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성냥불 하나는 콧바람에도 꺼지지만 불길이 모이고 커지면 태풍도 그것을 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길은 마을을 삼키고 산야를 태웁니다. 잘 모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우리가 힘써 모일 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모임을 등한히 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요.
신앙이 살아있을 때 열심히 모입니다. 모임의 자세가 나태해졌다면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겁니다.
미스바에 모임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시대 부흥운동도 귀한 백성들의 모임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도 뜨거운 군중이 쇄도하는 그곳에서 폭발되었습니다.

일찍이 부츠대장은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주의 성령도 주의 제자들이 모일 때 임했고 주의 재림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임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모임은 생명과도 맞바꾸어야 할 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도들의 모임과 생명을 맞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잡히면 죽을 줄 알고도 모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2:1)
기독교의 역사는, 성령의 권능은 바로 여기 -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인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열흘동안 있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나눈 열흘이란 기간은 그들이 서로 얼굴만 아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 되도록 도우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열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난 이야기들을 나눴고 또한 자신들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 문제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나누어지는 따뜻한 소통이 성령님과의 교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오순절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닙니다. 정확한 때에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모임은 세상 친목회와는 다릅니다. 단순한 군중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대중도 아닙니다. 성도들의 모임은 모임 하나만으로도 능력입니다. 
거기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할지라도 모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그 모임이 성령이 임하는 은혜로운 자리 일 때에 그 값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한소망교회가 모든 성도들에게 목장소그룹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III.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다

성령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와 능력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먼저 성령의 역사는 바람소리를 듣게 해 주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바람은 고대인들에게 신비한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성령의 임재 또한 홀연히 임하는 신비입니다. 바람은 바다에서 물결을 요동케 하고 파도는 거대한 배들을 단숨에 삼켜 버릴 수 있습니다. 바람은 거목을 꺾고 집과 마을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숨결,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로 쓰여집니다. 바람이 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우리가 다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만지심은 신비합니다. 

또한 바람은 숨결이나 생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의 골짜기를 보게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에스겔은 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37:9)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람같이 소리가 급하고 강하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산골짜기에서 급류가 흘러내리듯이 급하게 임했습니다. 이 성령의 바람은 10년 20년이 멀다하고 지중해 연안을 돌아 유럽과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급기야 이 한국 땅에서도 단 100년 만에 도시와 농촌, 산과 바닷가에 십자가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복된 소리를 듣는 귀가 복된 귀입니다. 
진리를 들을 줄 아는 진리의 귀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하늘의 귀입니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가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었습니다. 본문 3절에 의하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분명히 보였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불을 보았습니다. 불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나타난 불은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태웁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 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운 밤에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죄악이 소멸되고 죄인들이 주님 앞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말씀의 강단에 불같이 역사하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 가운데서 부르고 계십니다.

불이 임해야 합니다. 내 가슴에, 이 강단에, 한국교회에 불이 임해야 합니다. 
어디에 내 생애를 불사를 것인가? 불을 받아야 소명을 압니다. 이처럼 성령은 눈을 열어 보게 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의 눈을 열어 꿈을 갖게 합니다. 늙은이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합니다. 눈이 열려야 교회의 비전이 보이고 사업에도 비전이 보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인류 역사상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사람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여행 중에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 많은 글 가운데 단 한번도 로마의 건축 양식이나 고린도의 유행이나 에베소의 풍습을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도무지 그의 눈에 보이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이 보였고 해야 할 일거리가 보였습니다. 섬겨야 할 교회가 보였고 부지런히 역사 하는 성령의 역사가 보였습니다.

성령을 받아 눈이 열려지고 나면 지금까지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보이고 섬겨야 할 교회가 보입니다. 

IV. 말이 통하는 공동체

성령의 역사는 입이 열려지는 역사로 임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불의 혀같이 갈라졌다”고 했는데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굳어졌던 혀가 풀려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입이 열려집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기 전에는 복음전파의 혀가 굳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저들의 혀는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는가 하면 예수가 잡힐 때에는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저들의 입이 달라졌습니다. 능력 있는 혀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저들이 죽인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말에 3천명이, 5천명이,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혀는 풀려있습니까? 여러분의 입은 열려 있습니까? 진리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말입니다. 전도에 벙어리, 기도에 벙어리는 아닙니까?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말, 필요 없는 말에 지칠 줄 모르고 움직여 대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사람은 언어가 건강해 집니다. 그의 말엔 위로가 있고 격려의 힘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고 친절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나면 기형적으로 굳어진 혀가 풀어집니다. 닫혀진 입술이 열려집니다. 그 혀로 기도하게 되고 그 혀로 기뻐 찬양하게 됩니다. 이웃을 축복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 생각지도 못했던 말과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곧 입술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V. 새벽에 모입시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부활절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이 고난절기와 부활절기에 맞추어 함께 모이려고 합니다. 봄을 맞으며 내 인생, 내 신앙을 봄을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새벽은 신비한 능력 –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새벽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에 낮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밤을 지으신 분이시며 그 밤에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깊은 밤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은 언제나 새벽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큰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매일 새벽 빠짐없이 규칙으로 기도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벽은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자랑입니다. 온교회가 깨어 기도할 때는 함께 동참할 수만 있으면 커다란 유익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 본 경험이 없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이번 특별 새벽기도를 통하여 새벽에 한번 용기를 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결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눈을 부비고 엄마 아빠와 함께 새벽기도를 해본 아이들은 절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깨우세요.

의사들은 큰 수술을 새벽에 일어나 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하는 심판의 불 속에 뛰어들어가 조카 롯을 구해달라고 천사의 허리춤을 붙들고 애원했던 때가 바로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창19:27)
출애굽기 14:2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그 뒤를 추격하던 애굽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내린 시간이 새벽이었으며,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난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단6:19)

여호수아 6장에 보면 금성철벽 난공불락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새벽은 가족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하는 시간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가족, 내 자식의 문제를 가슴에 부둥켜 안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홍해와 같은 난관이 갈라지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영혼의 만나를 먹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다니엘처럼 저주의 굴에서 벗어나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문제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새벽의 역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 엄청난 사건을 새벽에 이루셨습니다. 천지창조가 새벽에 이루어졌고 출애굽의 역사가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깨어있던 목자들이 탄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무덤 문을 박차고 우리 주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벽 일찍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예수님의 재림도 이른 새벽 있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신앙의 신비를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얽히고 설킨 실타래같은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신비를 깨달아 보기를 원하십니까? 닫혀졌던 인생의 문들이 열려지기를 원하십니까?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새벽에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지금 이 나라는 그 어느 때 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이 민족에게 기도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찍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새벽에 모여 폭포수가 진동하듯이 외쳤던 그 외침을 절규를 몸부림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잠자던 마을이 깨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희망을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젊은이들이 깨어나게 하시옵소서. 
한국교회에 그 날의 기도! 그 날의 회개! 그 날의 부흥을 주소서!

사순절 - 주님께서 날 위해 채찍맞고 피흘려 죽으시는 그 시간만이라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리라.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바쳐보리라. 
주님이 피 흘리시는 이 기간만이라도 말씀을 붙들리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평생 새벽기도는 못한다 할지라도 특별한 기도회 시간만큼이라도 기도하며 살아 보리라.

혼자 결단하고 혼자 나오지 말고 가족이 함께 나오십시요.
목장 공동체가 함께 결단하고 함께 나오십시요. 목장 안에서 서로의 기도 제목들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특별한 기회로 만들어 보는 겁니다.  서로 새벽에 깨워주고 함께 차를 타고 올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차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차량운행의 숫자도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애국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기독교안에서 나 혼자 예수 믿고 나 혼자 신앙생활하고 그래서 공동체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서로 돕고 함께 모입시다. 

이번 새벽기도의 시간 - 목장 공동체가 함께 나아와 함께 앉으십시요. 함께 기도하십시요.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를 붙들어 줄 수 있고 너는 나를 붙들어 주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세워줄 수 있고 너는 나를 세워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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