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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사 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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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사 53:1-4)

: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으로 주시는 행복과 건강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예배와 교제와 영성을 통하여 행복하여 질 수 있습니다. 또 그런 행복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더욱 훈련과 봉사와 전도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복과 교회의 건강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초로 하지 않은 행복은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건강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어느 텔레비전 방송의 교양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들이나 특별한 사연 등을 소개합니다. 최근에 방영된 내용입니다.

‘권상우 할아버지가 나타났다’는 올해 나이 환갑 나이지만 몸과 마음만은 권상우를 능가한다는 한 할아버지의 사연입니다. 

‘그녀의 눈부신 귀환’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고등학교 입학하는 한 아주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아름다운 도전을 공개합니다!

‘오드리 햅번 중독남’은 오드리 햅번에 중독된 지 어언 20여년, 오로지 오드리 햅번 뿐이라는 남자의 사연입니다.

‘만능 시각장애인’은 집에선 살림꾼! 산에선 나무꾼! 폐지 줍는 청소꾼까지! 못하는 것 없는 만능 시각장애인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의심스럽고 이상하게 여겨지는 의아(疑訝)한 일들이 있습니다.  

I. 의아  

세상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일들이 있지만, 성경에는 정말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일이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오늘 말씀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일어난 일을 아무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실제로 애매하게 고난당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스룹바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고레스가 임명한 유대의 총독으로 무너진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공사를 중단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공사는 다리오왕 제 2년까지 중지되었습니다. 결국 선지자 학개, 스가랴 등의 변함없는 격려로 성전 재건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성전 재건을 시작한 스룹바벨은 그 와중에 사라졌습니다. 반대자들에 의하여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룹바벨이 정식 재판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반역자로 졸지에 처형 되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신실한 사람이 죄도 묻지 않고 처형될 수 있느냐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한 사람이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한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사람의 지혜와 생각으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2.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는지 알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는 나사렛 청년’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에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랬던 그 사울이 나중에 바울이 되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하였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사람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고,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은 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셨던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래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전 우주적으로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고난의 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종과 겹쳐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II. 모습  

이 모습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았던 한 의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먼 훗날 사람들은 이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 바로 그 분이 이 분이셨구나!’ 하게 되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것은 고난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끔찍한 모습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첫 번째 모습입니다.

: 2a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여기에서 ‘연한 순[qnE/y/요네크]’는 잘라버린 나무에서 나는 싹입니다. 봄에 돋아나는 새싹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혀 희망이 없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른 땅에서 자라서 말라비틀어지고 비비꼬인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1. 싹수가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 제자들은 대부분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예수님은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고기잡이하러 갔습니다. 예수님께 어떤 희망도 갖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모습입니다.

: 2b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여기에서 ‘고운 모양[ra'T/토아르]’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풍채[rd;h/하다르]’는 ‘화려함’을 가리킵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고난 받는 종에게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이 있었을 리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2. 볼품이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144장 4절). 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별로 매력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깔보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세 번째 모습입니다.

: 2c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기에서 ‘흠모[dm'j/하마드]’는 말은 기뻐하다, 심히 사랑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없었다니 고난 받는 종은 바라볼 가치조차 없었습니다. 이 한 고비 지나고 나면 행여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하는 기미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3. 희망이 없는 모습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모이면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미래의 모습도 기약할 수 없다면 절망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않는 듯했습니다.

한 때 ‘용서할 수 없는 남자’ 시리즈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과거 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가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난 받는 종에게는 미래가 없어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어쩌면 용서할 수 없는 남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눅 23:48) 그들은 참으로 처참하고 답답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은 싹수가 없고, 볼품이 없고, 희망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더 심각한 상태가 있었습니다. 
  

III. 상태  

십자가의 예수님은 사람들이 볼 때 별 볼일 없는 상태였습니다.

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3a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고난 받는 종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공동]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고난의 상태였습니다.  

1. 예수님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멸시받다[hz:B;/바자]’는 말은 ‘업신여기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가 고난의 걸음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를 거절하고 배척 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가 강제로 끌려온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임은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주먹으로 내리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비하게 손바닥으로 그 분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마 26:68)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이 분이 그리스도인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총독의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놓고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 분의 머리를 쳤습니다.(마 27:27-30) 그들은 예수님께 그래도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 분이 왕 중의 왕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업신여겼습니다.
  

2. 예수님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버림을 받다[ldej/하델]’는 말은 본래 ‘무기력하다’는 말입니다. 부족하다, 실패하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무기력하셨습니다. 정말로 실패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들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못하셨습니다. 아니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 입니다.(마 27:39-46)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조차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벧전 2:4) 그리스도이신 것을 아직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3. 예수님은 간고를 겪었습니다.

여기에서 ‘간고[baok]m/마크오브]’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장 슬프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이었을까요? 양 손과 양 발에 박힌 대못이 주는 고통이었을까요? 예수님을 향하여 침을 뱉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었을까요? 원통하고 분해서 슬프셨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차라리 도망친 제자들이 다행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어머님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달려 있는 제가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당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야라는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마리아가 알 턱이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애달픈 어머니였습니다. 마리아 역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아들이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4. 예수님은 질고를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질고[ylij?/호리]’는 쇠약하다, 병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질병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질병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시각장애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기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다[ejleevw/엘레에오]는 말은 측은히 여기다, 동정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리를 듣고 머물러 서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다[splagcnivzomai/스플랑크니조마이]’는 간절히 열망하다는 말입니다. 장자가 꼬이고 아플 정도로 안타까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져 고쳐주셨습니다(마 20:30-34). 

예수님은 질병에 걸린 사람을 자신이 병이 걸릴 것처럼 아파하셨습니다. 이 마음은 집을 나갔던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던(눅 15:20)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질병에 자신이 가슴앓이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였습니까?
  

IV. 평가  

사람들의 평가가 예수님께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는 바로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3b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고난 받는 종을 보면서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귀하게 여기다[bv'j/하솨브]’는 평가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주 값없는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1.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십자가의 가치를 알게 된 사울이었던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믿지 못하여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단지 미련할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미련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미련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4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4b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매를 맞아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셔야 하였는지를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예수님의 잘못 때문이었습니까? 우리의 잘못 때문이었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기에도 어중간한 태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의 겪으셨습니다. 이것이 믿어짐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멋지고 화려한 예수님처럼 보이기에 그분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멋지고 화려한 삶,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고난의 종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그래서 십자가를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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