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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각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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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 각 (행 7:54-60)
  

들어가는 말

독일 경건주의의 고향으로 불리는 ‘할레’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헨델의 고향이며, 진센도르프가 학문과 신앙을 연마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의 교회들이 네델란드 국왕 프리드리히 4세의 요청으로 인도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하고 ‘데니스 할레 선교회(Denish-Halle-Mission)’를 설립한 것이 1704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계획을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인도에 복음을 전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누군가하면 바로 종교개혁가 루터의 신학적인 본 고장인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이었습니다.
의외가 아닙니까?
그들은 “개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착각이지요.
사람들은 배웠던 못 배웠던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순교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에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습니까?
그의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무슨 내용의 설교를 했기에,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치는’ 발광을 부렸습니까?
스데반은 무슨 내용의 설교를 했기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그 증언과 바꾸었습니까? 
스데반이 자기 생명을 내놓고 증거한 설교는 행7:2-53절의 내용입니다. 
초대교회 설교 중 가장 중요한 설교입니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했습니다.
2-3절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또한,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34절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 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② 그러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39-40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③ 예수님을 보내심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최고로, 최대로, 최후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수님마저도 죽였습니다. 
52절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이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착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착각이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줄로 아는 것’ 을 말합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은 흥분하여 돌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 짧은 지식, 제한된 경험에 나오는 판단을 절대화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훈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잠3:7)’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그런데 착각 속에 살든 진리 안에 살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과입니다. 
그야말로 삶에 치명적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꼭 벗어나야 할 착각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삶에 골몰하다보면 이런 진리가 희미해지거나, 무디어질 때가 많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착각에서는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수가 틀리면 안 나오는 볼펜 내던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던집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1) ‘하나님이 없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긴 뭐가 있어 다 꾸며낸 이야기야!’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시14:1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는 것은 그 인생을 천양지차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두려움으로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마음 놓고 죄를 지어요.
인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이란 사람 아시죠?.
그 당시 이미 죽인 사람만도 21명인데, 감옥에 가면 한두 사람을 더 죽이겠다는 게 아닙니까?
죄의식이 전혀 없어요. 
죄의 벌에 대한 두려움이 어쩜 그렇게 없을 수가 있습니까?

2) ‘나는 죄가 없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감옥에 안 갔다고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의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요한1서 1:8-10)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이런 한국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시아버지가 중풍 병에 걸렸는데, 의사니 박사니 하는 형제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아버지 곁을 떠났고, 결국 병든 시아버지는 못 배웠다고 구박 받는 막내며느리 차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못 배웠다고 구박을 했느냐하면 면전에 대고 “너 고르바쵸프가 누군지 아냐?”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막내며느리가 모시던 중 그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묘소 앞에서 시누이가 올케에게 울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지방으로 전근 간 진짜 이유는 중풍병 들린 아버지를 모시기 싫어서였어.”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양심의 고발을 견딜 수 없어서 한 얘기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양심조차 버려서는 안 됩니다.

3) ‘내세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내세가 있긴 어디에 있어. 천국과 지옥이 있긴 뭐가 있어. 누가 가보기를 했나 들여다보기를 했나? 그건 다 나쁜 짓하지 말고, 좋은 일하며 살라고 옛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얘기지”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어떤 분이 그 친구 중에 공산당에 입당한 한 열심분자가 있었답니다.
둘이 만나면 ‘하나님이 계시다 안계시다’ ‘내세가 있다 없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 없다’논쟁을 하곤 했답니다. 
그 결론은 예수를 믿는 분이 꼭 이긴다는 거지요.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아무리 토론해도 끝이 없으니 그만두자. 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 너는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하니 그렇게 공산당원 노릇하다가 지옥에나 가라” 

그러면 그 공산당 친구가 화가 나서, “동무, 친구에게 그런 저주 악담이 어디 있소?”
“아니 뭐가 저주 악담이야. 동무는 내세도 없고,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 공산당 친구 말이 “그래도 만의 하나라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큰 일 아니야?”
“큰일은 무슨 큰일이야. 그렇게 겁나면 하나님 믿으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 해서 예수 믿는 친구가 꼭 이긴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9)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20:14-15)
우리 교우 중에는 천국도 지옥도 내세도 없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줄 믿습니다.

4) ‘자기 생명이 자기 소유’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내 생명, 이것이 내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찬608장을 펴 보세요.

2절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사람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를 모릅니다.
3절 “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 때에 주께서 쉬라 하리니” 

인생의 석양이 가까워 어스름이 주위를 감쌀 때 주께서 ‘이제는 쉬어야 하겠다.’하면 그 품에 안겨 쉬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 내 것인 줄 알고,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인생을 계획하여 30대는 무엇을 하고, 40대는, 50대는, 60대는, 70대는 무엇을 하며 행복하게 살리라고 생각하는 것, 착각입니다.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내게 생명 있음을, 그래서 창문을 열어놓고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실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라고 했을 때 주저함 없이 달려가서 안길 주님의 품이 있음을 감사드리시길 바랍니다.

5) ‘인생에 심판 같은 것이 없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이고 악이고 따지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수단껏 요령껏 잘 살아라. 그것이면 다 이다’
라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의 심판이 두 가지로 행해집니다.

① 우리는 이 땅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출20:5-6절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②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책에다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계20: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심판대 앞에서 변호사 되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고 신앙고백 합니다.
왜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저 사람은 내 사람이에요. 저 사람을 위해 내가 피를 흘렸어요.”

6) ‘돈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돈은 생활의 편리함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돈이 생활의 편리함과 더불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걸어 다닐 때보다는 자동차타고 다닐 때가 훨씬 행복해야 합니다.
손으로 세탁할 때보다는 세탁기 쓸 때가 훨씬 행복해야 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 할 때보다 전기밥솥으로 밥 할 때가 훨씬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은 행복에 겨워 행복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오히려 물질이 풍요하면 할수록 우울지수, 권태지수, 자살지수, 정신분열지수가 높아갑니다.
이 상식을 우리는 과감히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돈 벌면 행복해 질것이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돈! 돈!’ 하면서 살아갑니다.

고양이는 먹이감으로 쥐 한 마리면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개는 뼈다귀 하나만 주면 그것 가지고 하루 종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돼지는 콩비지 한 바가지로 하루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이 행복해야 행복합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만족합니다.

영혼이 잘 되려면, 영혼의 주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복의 길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요14:6)
요즘 저는 교회의 배려로 DTS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부인이 울면서, 너무 울어서 한 문장을 구성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 부인은 이혼 조정기간에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자기는 자존감이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자존감이 없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부인의 어머니는 혼전에 임신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고를 쳤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이를 떼려고 배를 두드려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껑충 뛰어내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생명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사춘기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은 “이 못난 년아, 왜 태어나서 나를 이 고생시키느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존감이 어떻게 생기겠어요?

결혼을 했습니다.
사랑을 못 받고 살았으니까 남편에게 집착했습니다.
“어디 갔다가 왔느냐?” “누굴 만났느냐?” “왜 이렇게 늦느냐?"
남편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격차이로 합의 이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조정기간 중 부인은 어느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기도할 의욕도, 힘도 없었습니다.
환상을 봤습니다.

예수님이 흰 포대기에 아기를 곱게 안고 오셨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아기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야.”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부인의 자존감이 회복되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착각 속에서 살았기에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명확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구원받고, 행복한 삶이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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