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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함이 없는 아버지 사랑 (눅 15:1-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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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이 없는 아버지 사랑 (눅 15:1-2, 11-24)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가 펴낸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교수는 사춘기가 되면서 이해할 수 없어진 딸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의 딸이 중학교 1학년이 되더니 “엄마 아빠 같은 찌질이로는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사건건 부모와 충돌하였습니다. 저자 김교수는 ‘시민들을 위한 싱크탱크’ 희망제작소의 유시주 선생에게 김교수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운동권 출신으로 한때 교사로 일했고 우리 딸 또래의 아들을 키우고 있던 유선생님은 저에게 혹시 ‘지랄 총량의 법칙’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당연히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유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서 그 양을 소비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춘기 자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다 자기에게 주어진 '지랄'을 쓰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교수는 말하기를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지 자식에 대한 기대나 닦달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후 김교수는 딸의 공부에 대한 복잡한 기대를 버리자 딸의 ‘지랄’도 놀랄만한 속도로 안정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복음의 복음이요 비유의 비유라고 극찬하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왕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주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의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그리고 세 번째는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잃은 것을 찾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찾았을 때의 기쁨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비유와 두 번째 비유는 줄거리나 내용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는 양을 잃어버렸고 다른 하나는 은전- 돈을 잃어버렸다가 찾았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1/100을 잃어버렸고, 잃은 돈의 비유는 1/10을 잃었고, 셋째 잃은 아들의 비유는 1/2로, 둘인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에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나왔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많은 세리들과 창기들 곧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때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수군거리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 가지 비유는 다 세리와 죄인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교하시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세리와 죄인들과 잃어버렸던 영혼들이 돌아와 구원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가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재산을 분배하고 유산으로 물려줄 때는 장자는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이라고 하여, 다른 형제의 두 몫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 집에 두 아들이 있으니 아버지의 재산을 3등분하여 2몫을 장자에게 주고, 한 몫만 작은 아들에게 주면 되었습니다. 

여러분, 유산이란 것은 아버지가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아버지에게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빼앗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직도 아버지가 건강하시고 돌아가실 때가 된 것도 아닌데, 재산을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것은 불량한 아들이고, 불효자식입니다. 

중동지방의 사람들에게 한 신부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면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네 마을에서 이제까지 누군가가 작은 아들과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때렸을 것입니다.” “왜지요?” “그의 요구는 한 마디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이니까요.” 이 대화에서 미리 재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는 왜 빨리 죽지도 않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재산을 가지고 그의 마음대로 사업을 하거나 평안과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재산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제는 사업에서 손을 떼시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려주는 것이 유산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에 성경을 한번 읽었는데, 이 본문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왜 이때 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았는지,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나누어주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왜 아버지는 한 말씀도 없이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기 위하여, 우리를 강요하거나 억압하셔서 억지로 순종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도 많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중요하고, 아들을 사랑하였기에 자식이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아도 여전히 자식을 사랑합니다. ‘재산, 그래 재산을 미리 떼어주마,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야단을 치고, 그대로 붙잡아둔다고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절한다고 하면 더욱 아버지를 떠나고 싶은 마음만 들게 됩니다. “이 재산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해 보라 그리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소중함을 아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한 말씀도 하지 않고 재산을 정리하여 주는 것을 보면서 정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구나 하고 정리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재산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습니다. 국경을 넘어갔습니다.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당시에 먼 나라로 간다는 말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각오로 떠난 것을 말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을 각오였습니다. 아버지와 형님이 사는 고향에서 멀어지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의 간섭이나 참견도 싫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도 부담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였습니다. 형이란 사람은 경쟁할 수 없는 존재,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꿈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형보다 나은 동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것이 현대인의 불신앙입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합니다. 

작은아들은 이제 자신의 꿈을 펼쳐보이리라고 통제 없는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방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산과 거지신세였습니다. 작은아들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고, 도시 생활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찾아온 그 도시에서 타락하게 되었고, 방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열심히 벌면서 써야 줄어들지 않습니다. 방종하게 살아가면 아무리 많은 재산이라고 해도 바닥나는 법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하면 돈을 버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돈 모으는 법을 가르치고, 그 후에 돈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돈이란 쓰기로 하면 헤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진땀을 흘리면서 벌어들인 돈이어야 붙잡을 수 있습니다. 돈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돈이란 돌아다니고 싶어 합니다. 한 사람에게만 머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일에 돈을 다 허비하였는지는 모르나, 큰 아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고 하는 것을 참고해보면 좋은 일에 쓰지는 않았습니다. 허랑방탕하게 가진 돈을 탕진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돈 떨어지면 다 떨어지게 됩니다. 집에 과일이 없습니다. 집에 쌀이 없습니다. 차비도 없습니다. 무엇이 떨어진 것입니까? 돈이 떨어졌습니다. 돈 떨어지니 고춧가루도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돈 떨어지고 보니 체면이고 인격이고, 자유를 구가하던 젊음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긍지도 내려놓고 버려야 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란 사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품꾼들이 우러러보던 장래가 촉망한 젊은이도 아니었습니다. 하찮은 종이었습니다. 돈 펑펑 쓸 때는 친구들이 끓었습니다. 돈 떨어지니 다 떨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장 잠잘 집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는 문제가 얼마나 시급한 문제입니까? 허랑방탕하게 돈쓸 때는 좋았지요. 이제는 당장 오늘 하루가 다급합니다. 

그 동리의 유력한 한 집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 들어가 붙여 살게 되었고, 그 주인은 이 사람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돼지 치는 일이란 이방인들이나 하는 일이지, 유대인들을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보아서 먹지도 않았고, 돼지를 기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유대의 귀한 아들이 땅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돼지를 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마져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보니 정신이 들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에 일어납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성숙해집니다. 

17절 말씀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는데,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때에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서 떠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면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서도 떠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상실하는 것은 자아상실로 이어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이러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요, 늙어 죽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와 한 걸음 사이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아직도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죽음은 바로 우리들 코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극복하기 힘든 상황을 주면서 자신을 진솔하게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가득할 때에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누가 알아 인정해주고, 높여주고 힘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실존을 보지 못합니다. 돈이 떨어지고 보니 친구가 떨어지고, 지위도 떨어지고, 좋아하던 것도 다 놓아야 하고, 다 떨어져나가니 자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작은 아들은 들판에서 홀로 고독을 씹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니라, 먼 타국에서 홀로 놓여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어보아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고독이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작은 아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마지막 남은 소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의 젊음, 자기의 건강, 그리고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남은 소망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작은 아들은 자신의 실존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였고, 아버지를 생각하였고, 드디어 하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늘’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조심하느라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쓰는 말이 하늘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이란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이요, 하늘에 죄를 지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집에 살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들의 특권을 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야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편 작은 아들을 떠나보내고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시선은 언제나 저 멀리 바라보이는 동리 어귀였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면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해놓으시고 기다리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이 집에 당도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들이 집 앞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아들은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서성거리시는 아버지는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알아보셨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셨습니다. 아들은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오는데 늙은 아버지는 마치 청년처럼 달려 나가셨습니다. 아들을 측은히 여기시면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면서 맞아주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실 수 있는 큰 사랑이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은혜이십니다. 어떤 허물과 죄악도 용서하실 수 있는 큰 사랑이십니다. 

돌아온 아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한 말씀도 하지 않고 행동 언어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둥켜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크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것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어주시면서 맞아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도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무엇하고 지냈니?” 그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했는데 무엇을 물을 것입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들은 먼 나라에 있을 때에 이미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을 줄 압니다.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을 때에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다시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좋은 옷을 입히고, 이제부터는 돈을 마음대로 써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장반지인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종이 아니라는 것을 종들에게 보여주려고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존 녹스(John Knox)는 탕자의 이야기 중에서 또 한 사람의 방탕한 인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다름아닌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방종하다. 방탕하다는 말을 좀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라고 하면서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였으나 아버지는 그의 사랑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고 떠난 아들을 위하여 재산을 나누어주었고, 날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며, 그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는 순간 달려가서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그를 위하여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주었고, 신발을 신겨주었고, 인장 반지인 가락지를 내어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연회를 배설하였으니, 세상에 이런 방탕한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함이 없는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줄 사랑이 없는 것 같은데 샘물처럼 계속 퍼 주고 다 내어주고, 마지막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인들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아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잃은 영혼을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영혼이 돌아올 때에 정말 진심으로 맞아주어야 합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감격은 세상의 그 어떤 감동보다 더 감동적입니다. 한 생명을 다시 살린 감격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지금,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홀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는 이들이 있습니까? 돌아오십시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모든 형벌과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 앞에 돌아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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