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참된 생명의 길 (요 6:52-59)

첨부 1


참된 생명의 길 (요 6:52-59)


핀란드에 왕자가 없는 훌륭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위를 물려 줄 때가 된 그는 그의 자리를 물려줄 훌륭한 사위를 뽑기 위해 전국에 방을 붙였습니다. 수천 명의 지원자 가운데 무예가 뛰어난 20명을 1차로 뽑은 왕은 두 번째로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100일 동안에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 오너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청년들은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열결 할 큰 나무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 20명 가운데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나무를 찾다가 지친 페로는 어느 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던 그의 눈에 나무 십자가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렇다. 그것은 나무로 된 십지가다!”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후 페로는 핀란드의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입니다. 다리가 놓인 곳에는 놀라운 변화와 발전이 있습니다. 한 예로 영종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천대교를 건너 인천공항을 가노라면 인간의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다를 가로질러 긴 다리를 놓았습니다. 길이 21.38km, 진도 7의 지진에도 견디며, 100년 이상의 수명을 지니도록 설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리로 인해 작은 섬 영종도가 세계 제1의 공항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리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 예수님은 에 말씀하시기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얻게 되는 생명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세 가지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본문 53~55에“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인체 구성 요소는 영과 육과 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에“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은 신과 교통하는 분야이고, 혼은 지식과 문화를 추구하고, 육신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은 죽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에베소서 4:18에 말씀하시기를“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사람을 가리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1)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살리셨습니까?“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1)라고 하셨는데 죽었던 자를 살리신“그는”누구를 가리킵니까?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문에 죄인을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먹는 육신의 양식에 비유하여 본문 51절에 예수님께서“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하셨습니다. 육신은 세상을 살다가 죽어 한줌의 흙이 되지만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본문인 요한복음 6장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가 되는 기적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수백만 명을 사십년간 만나를 먹도록 했는데, 오천 명을 단 한번 먹인 것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은“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요한복음 6:35)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기를“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한복음 6:52)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영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이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깨달아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4)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깨달아 주님이라고 부르겠습니까?“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3)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 즉 영혼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죄인은 이 큰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는 남다른 자격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에“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큰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출발일 뿐입니다. 그 구원을 빛나게 하는 가치는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가치는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고단한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먹는 양식에 비유하여 본문 51절에 예수님께서“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하셨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당시의 유대인들은“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한복음 6:52)라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모질고 긴 핍박이 있었습니다. 네로로부터 시작된 핍박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 때까지 약 200년간 10대를 이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선량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무 죄 없이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이러한 교회 핍박의 배후에는 사탄의 간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미혹하여 교회를 핍박하도록 한 방법 중 하나가 어떤 사실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초기 로마 사회에 어린이를 유괴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병정들이 유괴범을 잡기 위해 기독교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토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마침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성찬식 인도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이것은 내가 흘린 피니라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몸을 찢은 살이니 받아먹으라.”하는 말을 밖에서 들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상부에 보고하기를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사람의 피를 먹는 흡혈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두었다가 사회적인 큰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나머지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잡아 극형에 처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미혹하는 방법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는 성령님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목사에게도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도 듣는 순간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본문 55~56에“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리켜“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0 말씀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삶은 반칙적인 삶인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후회를 남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 곳은 세파에 시달린 지친 심령들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죄악과 삶의 경쟁에서 상처받은 우리들의 영혼이 쉴 곳은 오직 주님의 그늘밖에 없습니다. 이 귀한 삶의 이치를 깊이 깨달았던 다윗 왕은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거하는 것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안식하는 것과 같으며. 긴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항구에 정박하여 새 힘을 얻으며, 바닥난 생활필수품을 다시 선적하며, 출항을 준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하셨습니다. 

본문 58절에“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원리와 방향과 삶의 목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썩어진 세상을 지금까지 유지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와 회개 할 영혼들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불신 영혼들이 돌아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할 신앙생활의 방향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할 우리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목적입니다.

본문 58절에“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방향과 삶의 목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밝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이사야 43:7)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재능은 다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직업도 다르고, 방법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은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 성령님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 영혼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리는 사순절기간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왜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16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왜 강림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8에 말씀하시기를“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심은 단 한 가지 영혼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썩어진 세상을 지금까지 유지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와 회개 할 영혼들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불신 영혼들이 돌아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불신영혼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베드로전서 3:8~9에 밝히시기를“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이 복음을 전하며 잃은 영혼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할 신앙생활의 방향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할 우리들의 삶의 목표이며 존재의 목적입니다. 각자 살아가는 직업은 다를지라도 사명은 단 하나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모든 축복은 영혼구원과 직결시켜 두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의 조건도 영혼구원입니다. 마태복음 6:31~33에“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의 조건이 영혼구원의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5:5,7 말씀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조건도 영혼구원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도“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