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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버하지 않는 신앙 (마 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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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하지 않는 신앙 (마 5:33-37)

 
예수님은 다른 데에서는 상을 뒤집으신 적이 없는데 성전에서 상을 뒤집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의 상을 뒤집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일반인들을 비판하신 적은 없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조목조목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종교인의 모순에 대한 환멸 · 회의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에너지를 실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가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개혁가이셨습니다. 

다만 마틴 루터의 개혁은 특정 집단 특정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개혁은 진실을 떠난 모든 인간의 종교적인 위선과 거짓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간의 종교성 속에 들어있는 모순과 거짓을 예수님은 보시고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기도를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 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금식을 잘못하는 것에 대하여 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나 금식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잘못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종교생활을 잘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지적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배우기를 뭐든지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배웠습니다. 더 세게 하면 된다는 종용을 받아왔습니다. 더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줄로 알았습니다. 더 열심히 하면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인 열심이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거에 불교를 믿을 때도 열심히 믿었다는 사실이고 과거에 무속신앙을 섬길 때도 열심히 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 민족은 대모를 해도 열심히 하고 싸울 때도 열심히 싸우고 국회의원이 멱살을 잡고 싸울 때도 열심히 하고 술을 마실 때도 열심히 마시는 유별난 민족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열심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열심이 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더 열심히 믿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열심이 더 근본적인 문제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이천년 전 유대인들의 언어습관이 더 깊은 문제를 감추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의 언어문화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왜 예수께서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또 너희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맹세나 서약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결혼식을 할 때도 서약을 하고 대통령이 취임할 때도 선서를 하고 법원에서 증언을 할 때도 서약을 하는데 이 모든 것을 하지 말라는 얘기냐. 주님이 그것을 금하셨다는 얘기냐. 여화와의 증인은 그렇다고 해석합니다. 

그러기에 여화와의 증인은 국기에 대해 경례하지도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깊은 문제를 지적하셨어요. 사람이 말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어에 하나님을 들먹이면 더 진실 된 것처럼, 더 경건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 속에 거짓이 숨어있을 공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평범히 말할 수 있는 것을 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비밀의 책이라는 다큐가 프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에 취임하면 취임하는 날 전직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만이 볼 수 있는 비밀의 책을 전달받는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그 책속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다큐 제작자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아마 케네디 암살에 대한 비밀이 담겨있을 것이다, CIA의 비밀공작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미국이 해외에 진 진짜 빚의 액수가 적혀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하는데 대통령이 되면 국가의 모든 기밀사항을 보고받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에게 기밀사항을 요구하면 그것을 보고받을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비밀을 보고할 때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 위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특정인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해 주기를 바라고 거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통치자가 되면 모든 정보를 들을 수 있지만 어떤 동기로, 어떤 이유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기가 어려워져요.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도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하는 것이라면 그건 진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인이 말을 할 때에도 그것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이 숨어있을 공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말하면 통하지 않을 것을 종교적인 표현을 빌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저희 교회 부교역자님들에게 당부하기를 성도들과 대화할 때 계시라든가 응답 같은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화할 때 내가 계시 받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라는 말을 하게 되면 더 이상의 토론의 여지가 없어요. 

그건 절대적인 발언이 됩니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토론이 불가능해 집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데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계시든 응답 같은 토를 달지 않아도 사람들이 얼마든지 받아들일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라면 아무리 계시라고 주장해도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어린아이들이 성경말씀을 집중하여 듣게 하려면 성령이 영감으로 주시는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어린아이들도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분별할 줄 압니다. 평소에 떠들다가도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말씀을 말하면 애들도 집중해서 듣습니다. 이것을 오버할 필요가 없어요. 계시라느니,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라느니,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들을 것입니다. 집중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 것입니다. 공감하고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미사여구를 더한다고 해서 그것이 말씀에 영적인 권위를 더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천사의 말처럼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진콜이라는 영화를 보면 제레미 아이언스가 월가 은행의 CEO로 나옵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의 상황을 가정한 것입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긴급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이제 곧 터질 금융 버블에 대해서 이 위기를 제일 먼저 발견한 애널리스트에게 이런 주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게 설명을 해주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하라. 아예 골든 리트리버에게 설명하듯 하라.’ 골든 리트리버는 개입니다. 개에게 설명하듯 쉽게 말하라는 얘기에요. 어린아이에게 말할 수 없다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얘기에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이 우리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말할 때 이런 미사여구 늘어놓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뭇 · 익히 · 모름지기…, 그 콘텐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데 괜히 유식하게 들리는 말들이에요. 아무런 플러스가 되지 않는 말은 빼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의 말을 더 쉽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신빙성을 주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내 말을 진실 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짧게 할 수 있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은 수상한 것입니다. 

만일 아니가 남편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을 때 남편이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어야지, 길게 설명하는 것은 수상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꼬치꼬치 묻지 마세요.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길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자분들, 남자가 대화를 잘 못한다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를 잘 하는 상대를 원한다면 여자와 대화하세요. 수다를 떨고 싶으면 여자와 하세요. 남자는 본론을 말하는 게 본능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에요. 기억하셔야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대화를 잘한 자가 누구였는지. 남편이 하와와 대화를 잘한 게 아니에요. 하와의 말을 들어주고 그럴 듯하게 말한 자가 뱀이에요. 뱀이 남편보다 말을 잘했어요.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나눈 대화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뱀과 하와가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말을 아무리 잘하면 뭐합니까. 그것이 거짓인데. 거짓을 더 환영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그 거짓이 여자를 타락하게 하고 남편을 타락하게 하고 인류를 타락시켰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말을 왜 맹세하면서 하느냐. 그럼 평소에 하는 말은 거짓이었다는 말이냐. 가끔 사람들이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데요.’ 그럼 지금까지는 거짓말이었다는 얘깁니까. 저는 누가 솔직하게 말하는데요, 그러면 겁부터 납니다. 또 ‘너에게만 하는 말인데 ~’ 그럼 남에게는 거짓말을 했다는 얘깁니까. 신빙성을 더해줄 수 있는 방법은 진실을 말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어떤 신빙성을 더해줄 수 있는 기술이 없습니다. 

만일 신빙성을 더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한다면 그건 수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맹세할 만한 일이 몇 가지나 있으며 만일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든가 편견을 말한다든가 자기에게 유익한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죄를 짓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 자기의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에서 지난다’는 말은 오버한다는 말이에요. 언어에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이고 오버하는 신앙, 평범을 떠나서 뭔가 유별난 그런 신앙적인 모습이 수상하다는 얘기에요. 예스면 예스, 노면 노, 그 이상을 벗어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문화는 직설적인 표현을 싫어하지요. 그래서 노라고 말하고 싶어도 예스라고 말해야 됩니다. 저 사람의 의도가 뭔지를 그 말을 가지고 알기가 어려워요. 이것은 거짓을 장려하는 문화에요. 진실보다 거짓을 장려하게 되면 우리가 어디에서 진실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천년 전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예는 예, 아니면 아니요 그것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이에게 처음으로 스스로 샤워하는 법을 가르칠 때 이 녀석이 샤워 실에 한번 들어가면 살이 빨갛게 익을 때까지 샤워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저히 비누칠을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는데 샤워를 다했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 비누칠 안했지? 아빤 다 알아.’ 그랬더니 ‘했어!’ 라고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애 좀 그만 잡으라고 했다면 한 줄로 믿으라고 그러면서 ‘했지~?’ 그랬더니 이 녀석 대답하기를 ‘했었어.’ 옳은 대답이에요. 왜냐하면 제가 오늘 비누칠 했냐고 물어본 게 아니기 때문에 비누칠 안했지? 뭐 어제 한 것도 한 거니까, 그제 한 것도 한 거니까 했어! 라고 대답한 것인데 애비는 속일수가 있지만 엄마는 속일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진실, 신앙인의 말에서 진실을 찾을 수가 없다면 어디에서 진실을 찾을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종교인이 오버하는 말 속에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가 오버한다고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리는 평이한 진리에요. 평범하게 말해서 전달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거기에 포장을 하고 화려하게 그것을 바꾼다고 해서 그것이 더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무로 만든 험한 십자가에 달리셨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고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나신 것처럼 예수님의 진리는 포장하지 않는 진리에요.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도리가 없어요. 화려하게 만든다고, 치장한다고 더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장하지 않는 말, 꾸밈이 없는 말, 종교의 옷을 입지 않은, 종교의 옷 속에 숨기지 않은 말, 거기에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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