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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되는 대접 재앙 (계 16: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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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대접 재앙 (계 16:3-11)  

지난 주 대접을, 또는 첫째 재앙을 보았다. 대접 재앙의 내용을 알기 전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일곱 천자에게 대접을 쏟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큰 음성이 주인공이 누구냐는 것이다. 계15:8을 보면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하므로 심판이 시작되면 성전에 있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계16:1은 성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달리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으니 성전 안 음성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 음성,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큰 음성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고 주님이시다. 아들이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를 가지고 심판하라고 일곱 천사에게 명하는 것이다. 

요5:22을 보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요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들에게 모든 권세가 있다. 아들이 하는 심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요5:30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였다. 의로우신 심판자이신 주님이 심판의 선언을 친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은 각각 그 대접을 들고 대접을 땅에 쏟는 것이다. 결국 재앙과 심판의 열쇠,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주님이 쥐고 있는 것이다. (계1:18)  

지난 주에 첫 번째 대접을 쏟을 때 나타난 악한 종기 재앙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 대접을 땅에 쏟는 재앙을 보기로 하자. 

1. 두 번째 천사의 대접 재앙 (계16:3)

바다가 죽은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에 물든 것 같이 핏빛으로 변하여 그 가운데 사는 모든 생물들이 죽었다. 생물들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대적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 때문에 온 세상이 고통을 받는다. 피조물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바다가 피가 되면 핏물 가운데 호흡하는 생물체가 있을까? 낙조만 생겨도 폐사하는데 고기는 끝장난다.

아, 바다의 먹거리가 다 사라진 세상이다. 끔찍한 혼란이요, 불행이다. 나일 강이 핏빛이 된 것과 비교가 안되는 재앙이다. 인 재앙 1/4의 죽음, 나팔 재앙 1/3의 죽음, 대접 재앙 더 확대되는 죽음. 점점 커지는 재앙이다.  

2. 세 번째 천사의 대접 재앙 (계16:4)

이 세 번째 대접 재앙은 강과 물의 근원이 피로 물든다. 계8:10~11에서 강과 물, 샘의 1/3만 해를 입은 것과 달리 모든 강과 물의 근원이 피로 물들었다. 물 근원이 잘못 되었으니 환경은 다 망가진다. 세상은 희망이 없다. 그런데 이런 대접 재앙의 말씀을 읽노라면 사람인지라 ‘그것이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하며 물을 수 있다. 오늘 계16:5~6은 그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주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옳다고 한다.  

① 천사의 대답이다.

계16: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있었는데 여기 물을 관리하는 천사가 외친다. 왜, 이런 무서운 재앙이냐고 질문하는 이들에게 이는 공의라는 것이다. 공의! 공의가 무엇인가? 기울어진 의나 잘못과 편견된 의가 아니란 말이다. 법이 의롭다. 심판과 구원이 제대로 의롭다.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종국에 재앙이 쏟아지는 것은 의롭다는 말이다. 이는 물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말이니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계16:6을 보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다루시는 의를 말하고 있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주신 분을 믿고 그 분을 믿다가 박해를 받아 피를 흘렸으니 갚아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정확하다. 망치를 들고 남의 차를 부숴뜨려 놓은 자는 그만큼 상대 차를 부숴뜨리는 것이 공의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불의다. 사실 구약의 선지서는 다 심판을 전한다.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 등 어느 책이든지 심판을 전한다. 단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심판의 그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심판하지 않음을 계속해서 전한다.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 공통된 메시지를 무시하고 내 맘대로 살 때 그 도래하는 그 날에 정확이 심판한다. 그런 면에서 요한계시록도 다른 책으로 봐서는 안된다. 요한계시록도 선지서와 같은 것이다. 성도들의 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믿는 자의 가족들을 고통 속에서 억압받게 한 그들은 모두 사단을 따르고 두 짐승을 따른 자들이다. 그들에게 피 흘린대로 피를 마시게 하시는 것이기에 그 심판이 합당하다고 계16:6에서 언급한다.

② 순교자의 대답이다. (계16:7)

계16:7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제단이 말한다는 것은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외침이다. 계6:9~10에 보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피의 보복을 소리 지르는 절규가 항상 제단 아래서 올라가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심판의 그 날,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다” 라고 하는 것이다.   

심판에 대해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 천사와 순교자들이 합당하다고 한다. 그리고 앞에서 본대로 대접 재앙을 쏟는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이가 심판의 권세를 위임 받은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심판을 불의하다 할 수 없다. 심판에 대해 토달지 말고 지금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이 때,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라고 외치자. 대접 재앙의 날에는 분명코 회개가 없다.
  

3. 넷째 천사의 대접 재앙 (계16:8)

계16:8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 불에 의해 크게 태워진다. 태양이 강렬해지면 사람들은 살 수가 없다. 사람들이 태워지도록 뜨거워지는 이 현상은 무서운 심판이다. 이는 분명코 불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다. 지금까지는 햇빛이 모두 똑같이 비쳐진다. 그러나 천사의 대접 재앙은 다르다. 계7:16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장막이 되어주시기에 해가 권세를 받는 그 날이 와도 그 뜨거운 불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를 향하지 않고 짐승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를 향한다.

그리고 보라. 그 재앙을 당하는 이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환난의 때에, 심판의 때에 땅에 속한 자들은 완악하기만 하다. 계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성령이 떠나간 환난 시대, 사람의 마음이 돌덩어리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면 했지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다.

지금은 교회 시대, 복음을 전하게 하는 성령 시대다. 얼마든지 감동과 회개가 있다. 성령이 도와주시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눈물이 있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 전도에 관심을 갖자. 
  

4. 다섯 째 천사의 대접 재앙 (계16:10)

계16:10을 보면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는다.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고통한다. 그런데 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계16: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다. 이 재앙도 역시 출10:21~23에 나오는 흑암 재앙의 재현이다. 

흑암이 얼마나 두려운가? 당시 바로는 이 흑암 재앙 앞에서도 모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시고 깨닫게 하셨는데 그들은 어린 양을 따르지 않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말만 따랐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 아래 있어야 재앙이 없다. ‘의’란 글자는 한자어 ‘義’는 羊(양) 아래 내(我)가 있는 것이다. 어린 양 아래, 죄 짐을 지고 가신 예수님 아래 내가 있는 것이 義(의)다. 주님을 떠나 짐승을 따르고 세상 바벨론을 동경하면 의가 아니다. 불의하면 고통 밖에 돌아올 수 없는 흑암의 재앙이 쏟아진다. 어두워지면 온갖 균이 득실거리고 곰팡이와 바이러스, 세균성 질환으로 고통에 들끓는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자기 행위를 회개하지 않는다. 멸망의 길을 스스로 가는 것이다. 완고하고 굳어진 마음의 소유자들임을 알게 된다.   

아! 일곱 대접 재앙의 무서움이여.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을 태우니 그 환한 밝음의 재앙, 지구 대기권의 이변인가? 자외선의 재앙인가? 나라가 흑암에 싸여 어두워지므로 온갖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아파하는 고통의 재앙 - 너무 밝아서 재앙이더니 너무 어두워서 종기로 고통하는 극단의 대조적 재앙이다. 낮과 밤이 재앙이 되니 정신이 혼돈되고 무언지도 모르는 고통을 겪고 죽는 것이다. 그 낮과 어두움의 변화 무쌍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한다. 영광 돌리는 일이 없고 회개하지 않는다.   

마지막 대접 재앙은 계속해서 비방과 원망으로 일관한다. 그것이 지옥의 풍경이다. 우리는 지금 성령 시대, 회개가 가능한 구원의 이 시대에 살고 있다. 나와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기도하자. 은혜의 문이 닫히기 전, 증인의 권세를 가지고 일어서자. 생명 줄 던져서 구원할 수 있는 바로 이 때에 복음을 전하는 전사가 되다. 짐승의 왕좌와 짐승의 나라에 속하지 않도록 한 사람이라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전도자가 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외친다. 

“반지 하나라도 더 팔아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낼 것을...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는 이 지역과, 한국과 열방을 다니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케 하는 증인이 되자. 그것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의 책임이다. 요한계시록을 듣는 자의 사명이다.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교회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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