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삶 (신 21:22-23, 마 27:21-23)

첨부 1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삶 (신 21:22-23, 마 27:21-23)

오늘은 총회가 정한 남선교회 주일입니다. 남성들이 남선교회의 회원이 되어 함께 선교에 동참하고 교제하고 봉사하는 남자답게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선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남성들은 다 가입하셔서 남선교회를 통하여 교회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수용된 유대인 99%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치의 손짓 하나로 죽음과 삶이 결정되었습니다. 약한 사람, 어린이, 노인 등 노동력이 없고 쓸모없는 사람은 즉시 가스실로 보내져서 ‘지구의 지옥’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빅토르 프랭클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연구해 온 결과를 논문으로 써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프랭클은 꼭 살아야 할 삶의 목표가 강했습니다. “그래도 지옥보다 더한 그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지옥에서도 자기 목표가 뚜렷한 사람, 다시 말해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던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한 할머니는 밤낮으로 장애를 가진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자신만이 아들을 돌볼 수 있었기 때문에 꼭 살아야 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아무 도구 없이 다섯 겹이나 되는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을 뚫고 아우슈비츠를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삶은 어떻게 하든 의미를 찾습니다. 사람들의 뚜렷한 자기 목표는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뚜렷한 자기 목표는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전 삶은 이미 십자가를 지기 위한 목적을 가진 삶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실 것, 예수님의 옷을 군병들이 제비뽑을 것, 사흘 후에 다시 사실 것 등을 예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미리 정해 놓고 오셔서 오롯이 그 길을 가신 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 목적이 변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빌립보서 3:14에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그는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표를 빗나가지 않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훌륭한 소명자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우리를 위한 십자가였고, 그 십자가를 한 번도 빗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잠언 16:17에는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고 합니다. 자기의 길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보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바라바라는 강도도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예수님께 정해진 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소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을 향한 정해진 발걸음이었습니다. 

첫째, 바라바는 놓아주어도 예수님은 놓아주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7:21에는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란 도리언 켈리의 소설이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잘 된 선택도 하지만 잘못된 선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의 소리는 치명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이 잘못된 선택 때문에 그들이 피 값으로 받은 고통은 1,800년 이상을 나라 없이 살아가는 유리하는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생명을 버리고 사망을 택했습니다. 구세주를 버리고 강도를 택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선택은 아담에서부터 계속된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은 먹고 살 수 있는 수많은 생명열매를 버리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선택하였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이고, 죽음이고, 결과적으로 에덴에서 추방되게 하였습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인간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이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14-15 상반절에는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합니다. 생명의 주를 죽이고 강도를 살게 한 것은 전 인류의 실패입니다. 민족적 실수입니다.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잘못된 선택도 선용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까? 왜 이것이 하나님의 선용입니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바라바는 십자가에 달릴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바는 십자가에 달릴 만한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시에 예수님을 놓아주고, 바라바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바라바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어림없는 말입니다. 바라바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할 만한 가치나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놓아 준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은 놓아줍니다. 가치 있는 것은 놓아주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캐나다에 가서 저의 처제 가족과 함께 가까운 섬에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낚시 배를 빌려 바다에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제가 엄청나게 무거운 고기를 잡았는데 힘겹게 올려보니 새끼 상어였습니다.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놓아주었습니다. 낚시를 하다보면 먹을 수 없는 고기나 너무 작은 고기는 다시 놓아줍니다. 게도 잡았는데 너무 작은 것은 다시 놓아주었습니다. 바라바는 생명이 없습니다. 잡아 놓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놓아주지 못할 생명이 있고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먹지 못하는 고기는 잡혀도 놓아주지만 먹을 수 있는 고기는 잡히면 놓아주지 않습니다. 바라바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에 놓아준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의 십자가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로마 외에 주변국들도 사형제도 가운데 십자가형이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예수님과 함께 양편에 두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십자가와 그 죽음은 우리를 구원할 십자가도 죽음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극악무도한 죄로 죽었을 따름입니다. 그 죽음이나 그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릴 희생양은 흠이 없고 순전한 양입니다. 상한 짐승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빠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흠이 있는 양은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고 순전한 어린양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바라바는 흠이 많고, 심령이 상하여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놓아주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우리의 구원에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길이며, 생명이며, 구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놓아주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하기 때문에 바라바를 놓아 주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사상가 르낭은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류의 역사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의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개인의 생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놓으면 안 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어도 그리스도는 놓아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무신론자 아들이 아버지가 믿던 하나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꼭 붙잡으세요”. 그 때 아버지는 “아들아, 다 놓아버려 붙잡을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놓아주세요. 그러나 예수님은 놓지 말고 꼭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손을 놓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놓아주면 안 됩니다. 도둑인 바라바만 놓아주고 예수님은 꼭 붙잡고 놓아주지 마십시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다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대인들이 완전히 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로 우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아무 가치 없는 바라바를 놓아줍시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시고, 생명의 가치이신 그리스도만 붙잡고 구원의 승리를 맛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악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못 박혀야 합니다. 

마태복음 27:23에는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고 단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의 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말은 영어성경에 “let him be crucified”(KJV), 혹은 “crucify him”(NIV) 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못 박혀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23:2에는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성들을 미혹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칭 왕이 아니라 진짜 왕이십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는 내용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이 잠잠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왜 잠잠했습니까?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일은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행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4:15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시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죄가 없으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선하신 분이십니다. 악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온전하신 선이십니다. 그 안에 악이 조금도 없는데 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냅니다. 없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악을 쌓으니 악이 나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합니다. 죄가 없으면 이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될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털끝만한 악도 쌓지 않으셨습니다. 악이 조금도 없으시기에 악한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는 물음에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단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만 질렀습니다. 
  
최근에는 충동살인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조카가 삼촌과, 고모, 할아버지를 칼로 찔러서 삼촌이 죽었다고 합니다. 조카는 어머니가 집안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보고 순간적 분노에 칼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에 분노, 원한, 쌓은 감정이 폭발한 것입니다. 쌓은 감정이 없이 외부로의 작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 마음에 무엇을 쌓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2차 대전 중에 쓴 ‘국화와 칼’을 통하여 일본인을 연구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 책에서 “일본인은 죄의식이 없는 대신에 수치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인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봅니다. 일본인은 지금도 죄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이나 정신대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과와 보상 요구에도 묵묵부답입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죄의식은커녕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펴고 구시대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마구 합니다. 일본이 어떤 나라인데 자기 땅 같으면 ‘한국령’이라고 새겨놓고 우리 경비대가 지키게 놔뒀겠습니까? 본토도 강점하는 그들인데 독도를 그냥 두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정말 죄의식이 없습니다. 죄의식이 없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이 없으면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근영의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이란 책에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 가운데 일부는 아직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다. 그 나머지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다”라는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죄의식이 없든, 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든, 아직 죄 지을 기회가 없었든, 인간은 나면서  부터 죄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죄와 더불어 살고, 죄를 피할 수 없는 필연 속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며 죄성입니다. 아담 이후에 죄와 관계없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셨으므로 우리의 구주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인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며, 죄가 없으시며, 악을 행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질 자격이 있습니다. 죄가 있고 악을 행했다면 우리와 똑같은데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으로는, 악한 일을 한 인간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사람은 죄 없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죄 있는 사람은 구원할 수 없으므로, 죄 없는 하나님이 죄 있는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유대인의 대답을 저의 말대로 해석하면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만 했으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기와 악의가 가득한 말이지만 십자가의 의를 이루는 위대한 말이 되었습니다. 

  
결론 

꽃에 얽힌 설화들이 나라마다 있습니다. 한국의 꽃말은 비극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적 정서에서는 꽃이 인간의 넋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꽃말에는 윤회사상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족두리풀’의 꽃말은 중국에 팔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은 궁녀의 넋이라고 합니다. ‘도라지’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도라지라는 처녀가 중국으로 떠난 오빠를 기다리던 나머지 그 넋이 꽃으로 피어났다는 설화입니다. 우리의 옛 이야기 등에 보면 팔려가서 대신 죽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팔려가 죽었다거나,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말합니다. 때로는 영원한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은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보므로 대리만족을 얻습니다.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랑을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그리워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추구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죽으셨다고 하지만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구원하실 자격이 있고 그 죽으심이 가치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공로를 늘 마음에 묵상하며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감사하며 사순절을 사는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