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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자연스러운 사이클 (창 41: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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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자연스러운 사이클 (창 41:17-36)

용의 눈물이라는 사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방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입니다. 이방원이 이씨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너무 많은 피 흘림이 있었지요. 이씨 조선의 개국공신은 다 죽고 자기 형제들 중에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형인 정종은 동생 이방원이 너무 무서워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아버지 이성계는 이방원이 못마땅해서 함흥으로 떠가가고는 아들이 보내는 사신마다 죽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상처뿐인 영광이에요. 이방원이 조선왕조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상처가 너무 많았고 사람들마다 이방원을 무서워합니다. 

게다가 흉년이 들어서 몇 년째 비가 오지 않습니다.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왕에게 노했다 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방원이 기우제를 드립니다. 왕이 직접 나가서 하늘에 기도합니다. 제발 비를 내려달라고. 얼마동안 기우제를 드렸는지 알 수 없는데 마침내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에 이방원은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 제목, 용의 눈물이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하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증거로 이방원이 보고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연의 현상을 그냥 자연의 현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문민정부 시대에 대형 참사가 많이 일어났었지요.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대구 지하철 폭파사건이 일어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하도 대형사고가 많이 일어나니까 당시 대통령이 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이 돌지 않았습니까. 몇 년 전에 남대문이 불에 탔을 때에도 대통령이 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처럼 우리는 첨단의 과학과 기술을 자랑하고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하지만 우리의 세계관은 옛날 사람들의 세계관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연재해를 영적으로 해석한 사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홍수라는 기후의 변화인데 이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다 라고 성경은 해석했습니다. 세상에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쓸어버리기 위하여 홍수를 주셨다. 엘리야의 시대에 발생한 기근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지 않다가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하나님이 삼년 반 만에 비를 내리셨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성경이 자연의 현상을 항상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오늘 본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의 요셉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일어난 얘기에요. 애굽에 장차 칠년의 풍년이 있고 그 다음에 칠년의 흉년이 올 것이라고 요셉이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요셉의 꿈이 아니고 바로의 꿈인데 요셉이 그것을 해석한 것입니다. 앞으로 칠년의 풍년이 있다가 그 이후에 칠년의 흉년이 다가오는데 그 흉년이 하도 심해서 풍년의 넉넉함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길한 꿈입니다. 나쁜 꿈이에요. 

그런데 이와 같은 자연의 현상을 예언하면서 요셉은 어떠한 도덕적인 해석이나 종교적인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애굽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든가 바로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든가 회개를 해야 된다든가 이런 말이 오늘 본문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주목하십니까. 그럼 왜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얘기냐. 이것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사이클 중의 하나라는 얘기입니다. 

인생의 사이클 중의 하나입니다. 살다보면 풍년이 올 때가 있지만 풍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흉년이 올 때도 있는데 흉년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풍년이 왔다가 흉년이 왔다가 이런 것이 반복한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풍년이 왔다고 교만하지 말고 또 방탕하지 말고 흉년이라고 낙심하지 말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지혜는 어디에 있느냐. 풍년이 왔을 때 곡식을 비축해 놓았다가 흉년이 올 때 굶어죽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지론이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발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살다가 흉년을 만났을 때 이것도 인생의 자연스러운 사이클이고 잘 견대면 지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미신적이지 않고 운명론적이지 않고 흉년을 만났을 때 과잉해석하지 않고 체념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잘 빠져나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어요. 그래서 인간은 사막이라고 사람이 살 수 없다 체념하지 않고 물을 끌어오는 방법을 개발했어요.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라든가 애리조나라든가 남가주는 원래 도시가 생길 수 없는 땅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없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미국인들이 콜로라도에서 물을 끌어와서 이런 곳에 큰 도시가 생길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은 눈이 나쁘다고 체념하지 않고 일찍이 안경이라는 것을 발명해서 눈이 나쁜 사람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요즘에는 라식이니, 라섹 같은 수술이 있어서 안경을 안 쓰고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술까지 있습니다. 인간은 심장이 나쁘다고 체념하지 않았어요. 심장이식을 한다든가 인공 박동기를 달든가 해서 심장이 나쁜 사람도 죽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개발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에요.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이러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어요.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창세기 41장이면 얼마나 옛날이야기입니까. 그러나 그 옛날에 요셉은 이미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차 칠년의 흉년이 있다고 체념하지 않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주목할 것은 요셉이 도덕론적이나 종교적인 굴레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다고 하지 않았고 우리의 죗값이다 이런 해석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어요. 이건 놀라운 것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39절에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바로가 이 모든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어요. 또 38절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이것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바로가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온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봤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 이러한 사고가 가능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섣부른 종교관은 굴레가 됩니다. 그들은 운명론적으로 만듭니다. 그들을 미신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즐겨하는 말 중에 ‘인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알라의 뜻’이라 라는 말이에요. 들어보면 좋은 뜻 같지만 문제는 아무 때나 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고장 나면 ‘인샬라’, 사람이 병들어 죽으면 ‘인샬라’,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인샬라.’ 알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인생에 생기는 모든 일을 알라의 뜻으로 간주함으로써 책임을 지지 않고 문제를 극복하지도 못하고 발전하지도 못하고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차라리 종교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섣부른 종교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일을 무책임하게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애굽에 장차 칠년의 흉년이 있다고 ‘너희들 굶어 죽어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장차 흉년이 올 것이기 때문에 준비하라는 겁니다. ‘미리 준비하면 죽지 않고 살리라.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그럼 아예 애초부터 흉년이 없게 하면 좋지 않으냐? 왜 하나님이 흉년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극복할 길을 보여주시느냐? 그건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 것은 일 년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는 여러 시즌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살 때가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여러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여러 때가 있습니다. 여러 시즌이 있어요.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예측할 수가 있고 준비할 수 있고 그리고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겸손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풍년일 때 교만해지고 허랑방탕합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인생에 사이클이 있는 것처럼 비즈니스에도 사이클이 있습니다. 좋은 날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날만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일들이 있고 별의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별의별 일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히려 발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애굽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되었고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가 헤어졌던 자신의 가족을 만나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없었더라면 요셉은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재앙이 눈에 보이기에는 재앙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재앙을 통하여 사람들은 변화를 감당하게 되는 겁니다. 재앙이 없을 때는 결코 변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변화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변화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흉년을 허락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흉년을 통하여 오히려 사람이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지혜를 얻고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더 강건해지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이 있음으로써 바로 또 애굽의 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7절 말씀을 보면 바로와 그 신하가 요셉의 말을 들은 다음에 뭐라고 반응했냐면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여호와 하나님을 들어본 적도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그들에게 알렸을 때에 바로뿐만이 아니고 모든 신하가 ‘좋게 여긴지라’ 긍정적으로 반응했어요. 그것을 좋아했습니다. 

요셉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재해를 두려워하고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요셉이 없어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재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준비하고 그래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좋게 여긴지라’ 그랬어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편견 중의 하나가 세상이 예수님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편견이에요. 세상이 복음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레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내가 신앙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또 싫어하겠지. 거부하겠지…. 이건 우리의 무지와 불신과 미련함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갖고 있는 선입관을 우리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옳은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 수만 있다면 바로처럼 ‘이것을 좋게 여긴지라’ ‘그런 좋은 얘기를 왜 미리 우리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느냐. 그런 좋은 것이 있는 줄을 내가 미처 몰랐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답답한 사람, 폐쇄적인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말씀을 들으니까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요 하나님은 좋은 분이요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나의 손해였구나.’ 이것이 올바른 반응인 것입니다. 

좋게 여겨야 됩니다. 우리가 바로 알고 전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좋게 여길 것입니다. 바로든 이방인이든 처음 믿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에요.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좋은 일을 행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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