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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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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14)

아가서에 대해서 고대 학자들은 한결같이 그 진정성을 유감없이 천명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거룩한 사랑을 묘사한 노래"라고 고백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 296-373)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한 교회의 환희"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성경학자인 스튜어트(Stuart)는 "아가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의 진지한 욕구를 묘사한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가서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사랑 노래를 비유한 것임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표면적 스토리는 이스라엘의 3대 왕이었던 솔로몬 왕과 보잘 것 없는 시골 여자 술람미 여인과의 열렬한 애정을 노래한 서정시입니다.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 왕의 애절한 초청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된 오늘의 교회를 향한 은혜와 축복의 초청입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고 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 곧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초청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술람미 여인은 군왕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객관적 가치가 전혀 없는 여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을 사랑해서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이 검고 못생긴 여자를 솔로몬은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땅히 주실 것이 있다면 사망의 형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초청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초청은 연속적이고 반복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초청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Ⅰ. 초청의 시기는 봄입니다. 

1) 겨울이 지나간 때입니다. 

본문 2장 11절에 『 겨울도 지나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 겨울 』은 마타르( )인데 "가리움"이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틴의 겨울은 이른 비가 오는 계절이기 때문에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겨울 즉 가리워서 어둡게 된 이 어두움은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장 78-79절에 『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 2장 8-9절에 『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 1장 6절에 『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 『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라고 했습니다. 

2) 비가 그친 때입니다. 

본문 2장 11절에 『 …비도 그쳤고 』라고 했습니다. 

"비가 그쳤다"는 말은 팔레스틴 지방에 어두운 겨울에 내리는 이른 비가 그치고 봄이 왔다는 말입니다. "비가 그쳤다"는 말은 새 날 곧 구원의 날을 의미합니다. 노아에게 비가 그치니 구원의 새 날이 도래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3) 꽃이 피는 때입니다. 

본문 2장 12절에 『 지면에는 꽃이 피고… 』라고 했습니다.

꽃은 그 향기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온 세상에 발합니다. 꽃이 피는 것은 소생하는 증거이자 열매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꽃이 피는 계절은 소망과 비전(vision)의 계절입니다. 사람들이 왕래하며 분주히 활동하는 계절입니다.

4) 새와 비둘기의 소리가 들리는 때입니다.

본문 2장 12절에 『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비둘기가 본격적으로 지면에서 활동하는 것은 봄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G. 알러르스"는 신부와 신랑의 사랑의 절정을 이룰 때를 봄이라고 했습니다.

5) 무화과나무 열매가 익은 때입니다.

본문 2장 13절에 『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라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첫 열매는 3월 경에 맺혀 6월 경에 익고 두 번째 열매는 첫 열매가 익은 다음부터 생겨서 9월 경에 먹습니다.
무화과가 익는 시기는 북방 유대인의 구원의 시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미 7:1).

6) 포도나무에 꽃이 피고 향기를 토吐하는 때입니다.

본문 2장 13절에 『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가 향기를 풍기는 시기는 이방인들의 구원의 시기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미 4:4).


Ⅱ. 초청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아가서 4장 16절에 『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3절에 『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라고 했습니다.
각종 생명체가 저마다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곳이 바로 동산입니다.

창세기 2장 8절에 『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에 『 여호와의 동산 같고 』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 8절에 『 왕의 동산 』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장 3절에 『 물 댄 동산 같겠고 』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4장 6절에 『 강가의 동산 같으며 』라고 했습니다.
욥기 8장 16절에 『 그 가지가 동산에 뻗어가며 』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2장 5절에 『 여러 동산과 화원과 무화과나무 』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4장 9절에 『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라고 했습니다.
아가서 6장 11절에 『 호도 동산 』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유하는 잠근 동산이요, 봉한 샘이요, 생수의 우물입니다. 

그래서 아가서 4장 12절 『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피곤한 자와 목마른 자를 초청하는 동산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결실하는 십자가의 포도동산입니다(갈 5:22-23).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마다 자기 동산으로 초청하는데 인색하지 아니했습니다(아 5: ; 6:1, 13).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공급하는 관수로입니다.


Ⅲ. 분명한 목적이 있는 초청입니다.

1) 술람미 여인의 얼굴을 보기 원합니다.

본문 2장 14절에 『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라고 했습니다.

여기 『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 』은 세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진리의 교회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원시 아담보다 한 단계 높이 되었습니다(롬 8:31-39).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십니다(고전 10:4).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구원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창 8:7). 비둘기는 제물용으로 쓰였습니다(레 1:15).
예수님은 전도자를 파송할 때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했습니다(마 10:16). 그렇다면 여기 『 비둘기 』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성도를 가리킵니다.
여기 『 얼굴 』은 사람의 전체뿐만 아니라 인격과 그가 가진 기능까지도 포함합니다. 선행과 헌신을 상징하는 길르앗 산의 누운 염소털 같은 머리카락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먹는 것을 상징하는 고루고루 박힌 이와 성도의 소망을 상징하는 석류 같은 뺨이라고 했습니다. 

견고한 의지를 상징하는 군기의 망대 같은 목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상징하는 백합화 가운데 꼴을 먹는 쌍태 노루새끼 같은 두 유방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술람미 여인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16절에 『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2) 술람미 여인의 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본문 2장 14절에 『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라고 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린 부드러운 성도의 소리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중생 받은 성도의 아름다운 얼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 받은 성도의 인격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주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소리, 회개하는 소리, 전도하는 소리, 찬송하는 소리, 감사하는 소리, 격려하는 소리는 진정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리들입니다.

3)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장 15절에 『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과 솔로몬 왕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작은 여우를 잡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 여우는 포도원 주위에 굴을 파고 서식하면서 봄철 포도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필 무렵 포도원을 돌아다니면서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먹고 해칩니다.
본격적으로 전개될 사랑 관계를 파괴시킬 것을 잡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세력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눅 13:32). 
우리를 위하여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우를 잡는다는 것은 포도 동산을 위한 것입니다.

포도 동산은 술람미 여인이 사랑관계를 지속하는 광장입니다. 여우가 포도 동산을 망쳐 놓으면 포도원의 농사는 제쳐 놓더라도 포도원 자체가 망가지고 말기 때문에 여우는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포도나무가 없는 포도 동산은 동산이 아닙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유형무형의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현대판 여우를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범죄케 한 아간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구리 장색 알렉산더를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 교회 운동의 순결성을 유지하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봄입니다. 예수님이 조성하신 동산(교회)입니다.
초청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예수님의 초청은 언제나 현재성을 가지고 자기 백성(택자)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 지금은 』, 『 이때라 』는 현재성은 먼저 믿은 자들의 열심을 더하기 위함입니다. 초청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동산에서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동산 관광객을 부른 것이 아니고 동산의 일군을 만들기 위해 초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교인"(church man)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일군, 종, 청지기,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일군"이라는 말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군(롬 16:1), 새 언약의 일군(고후 3:6), 하나님의 일군(고후 6:4; 롬 13:6; 살전 3:2),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일군(엡 3:7), 진실한 일군(엡 6:21),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골 1:7), 복음의 일군(골 1:23), 교회의 일군(골 1:25),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딤전 4:6),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롬 15:16), 그리스도의 일군(고전 4:1). 이렇게 일군에 대한 성경의 표현은 풍성합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풍성한 열매와 더 나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과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우는 벌레와는 다르게 포도나무 뿌리 자체를 씹어 먹는 파괴자이기 때문입니다. 곧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들입니다. 

주님의 동산에서 영광스러운 일군이 된 여러분!
나 혼자가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신 이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주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기 백성 곧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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