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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보다 하나님 (신 2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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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보다 하나님  (신 28:1-14)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복을 받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우문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복이 싫다고 대답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너무 복을 찾으면 천박하게 보일까 염려하여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욕심이 없는 사람임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내심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복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겠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복을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복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말씀입니다. 무려 열 번 이상 복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복이란 무엇일까요? <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베라카>는 <바라크>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무릎을 꿇다>입니다. 복이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서 얻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무릎을 꿇어서 얻는 것이기에 교만한 사람은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무릎을 꿇느니보다 자신이 노력하여 복을 쟁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복은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누리는 것>입니다. <얻는 것>은 자신이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애를 써서 억지로 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셔서 순리대로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복을 구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존재란 우리 자신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또 사람이 만든 조각상일수도 있고, 해와 달과 별일수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의 근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 분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본문이 말씀하는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절은 그 대전제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첫째는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는 것>입니다. <삼가 듣고>는  <경청하다>라는 뜻을 가진 <솨마>가 반복된 것으로서, 직역하면 <듣고 또 듣다>가 됩니다. 결국 이것은 <귀 기울여 정성껏 경청하다>라는 표현이 됩니다. 또 둘째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입니다. 

여기서 <그>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그 앞에 나오는 <삼가 듣고>와 연결되어 <삼가 듣는 목적>은 <지켜 행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부분의 핵심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잘 듣고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2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청종>이란 듣고 순종하여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본래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 19절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합니다.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 해야 합니다. 

또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 한권뿐인 성경을 평생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듣고 또 듣습니다. 같은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도 없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때론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 아는 듯해도 반복해서 읽고 들으면 지금까지 몰랐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말씀이란 삶에서 체험되기까지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생각한 부분들도 자꾸 반복함으로써 진리에 대해 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겸손을 훈련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으십시오. 설교를 듣고 또 들으십시오. 그리고 반복적으로 삶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들려주시오.> 이 찬송의 가사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잘 들었으면 이제 지켜 행할 차례입니다. 앞에서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무릎을 꿇다>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했습니다만, 무릎을 꿇고 듣는 것은 종이 주인 앞에서 가지는 태도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무한 순종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순종해야 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2-25절을 보면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어떤 복이 언급되어 있습니까? 4절과 5절에는 <자녀의 복>과 <생업의 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11-12절은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적들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말씀했습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런 복들이 어디서나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3절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라고 말씀함으로써 장소와 관계없이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6절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함으로써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나가는 상황에서도 복을 얻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양한 복을 받아 누리길 기원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 매우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말씀을 어떤 입장에서 접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1절과 2절의 말씀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처럼 이해합니다. 

그래서 <만약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네게 이렇게 해 주겠다>는 조건부 계약서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조건을 잘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복을 얻는 것을 <물건을 가지고 싶으냐? 그러면 돈을 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이 정말 그런 것일까요? 

어느 도시에 멋진 악세사리 공예점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젊고 잘 생긴 남자가 작업대에서 악세사리를 만듭니다. 다양한 재료를 붙이고, 깎고, 접고, 펴서 꽃모양도 만들고, 앙증맞은 동물 모양도 만듭니다. 점포에는 그가 만든 악세사리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고, 정가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점포에 한 아름다운 처녀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처녀는 그 곳에 진열된 악세사리에 홀딱 반했습니다. 돈을 내고 하나를 삽니다. 그런데 가지고 싶은 게 또 있으면 어떻게 할까요? 값을 또 내야겠지요. 하나를 가질 때마다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 때 그녀는 <악세사리를 사는 처녀>입니다. 

그런데 이 처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녀는 악세사리에 반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점포에 드나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세사리보다 악세사리를 만들고 있는 총각에게로 점점 관심이 옮겨갑니다. 처음엔 그의 솜씨에 반했습니다. 조금 후에는 그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반했습니다. 조금 후에는 그 남자의 따스하고 성실하고 멋진 태도에 반했습니다. 처녀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드나들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녀는 <악세사리를 사는 처녀>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처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악세사리가 아니라, 그 총각입니다. 이제 그 총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처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적용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점포의 잘 생긴 청년이고, 우리는 점포에 드나드는 처녀라고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두 가지가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는 <악세사리를 사는 처녀처럼 믿는 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처녀처럼 믿는 방식>입니다. 이 두 방식은 우리 신앙과 삶에 결정적 차이를 가져옵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의 기쁨이 다릅니다. 

여러분, 만약에 어느 날 점포 총각이 처녀에게 <제가 바빠서 그런데 일을 좀 도와주시겠어?>라고 한다면 처녀는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난 돈을 내고 물건을 살 뿐입니다.>라고 거절할 것입니다. 아니면, <좋습니다. 도와 드리면 뭘 주시겠어요? 악세사리 하나 더 가져도 돼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녀는 총각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악세사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일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악세사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녀의 모습은 복을 얻기 위해 <복채>을 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복을 파는 점포의 주인> 정도로만 생각하고, 복을 얻기 위해 복채를 내듯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별로 원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지키면 하나님의 복 하나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합니다. 기쁨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쩌다 인생의 일이 꼬이면 하나님께 복채를 많이 내지 않아서 생긴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나면, 지난 주일에 예배를 빼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부터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가 드리는 예배는 복채에 불과합니다. 그 예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도 기쁨이 없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게 바로 많은 교인들이 앓고 있는 <율법주의적 신앙>입니다. 기쁘지도 않으면서 계속 복을 얻기 위해 억지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여 결혼하는 처녀>처럼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계산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가 웃는다면 얼마든지 힘든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기뻐 웃습니다. 차원이 다른 신앙생활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 예배하고, 복을 얻기 위해 봉사하고, 복을 얻기 위해 헌금을 드리고, 복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차원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섬기고,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차원이 다른 복을 얻게 됩니다. 

<돈을 내고 악세사리를 사는 처녀>는 돈을 낸 만큼만 가지게 됩니다. 그 이상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여 결혼한 처녀>는 결혼 이후 사랑하는 이의 모든 악세사리의 공동 주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앞으로 평생 만들 미래의 작품까지도 모두 다 그녀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돈이 아니라, 돈으로는 가늠할 수도 없는 사랑을 남편에게 지불했고, 그 순간 그녀의 모든 것은 남편의 것이 되고, 남편의 모든 것은 그녀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방법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비결입니다. 

복을 사기 위해 그 때마다 복채를 지불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처녀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 하나님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 됩니다. 

셋째로, 복보다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악세사리 때문에 총각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여 살게 되면서 달라졌습니다. 이젠 악세사리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남편이 좋아서 삽니다. 악세사리가 목적이 아니라, 남편이 목적이 됩니다. 

우리 신앙은 <악세사리를 사는 처녀>에서 <사랑하여 결혼하는 처녀>로 성장해야 합니다. 처음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은 복을 공급해주는 공급원일 뿐입니다. 얻고 싶은 복을 얻고 나면 미련 없이 돌아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복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좋아서 그 분을 믿습니다. 이게 진짜 결혼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들으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인에게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님이 있는데, 그가 멀리 올 수 없는 곳에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녀에게는 편지만 종종 도착한다고 해 보십시오. 그녀에게 편지는 얼마나 소중할까요?  여인은 그 편지를 마치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볼에 부비고, 가슴에 품을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 모두를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겠지요. 그녀에게는 편지는 결코 종이에 쓰인 글 정도가 아닙니다. 편지는 그녀가 사랑하는 님의 화신인 것입니다. 편지가 곧 님인 것처럼 여겨져 소중히 보관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귀로 듣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나를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는 비결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며,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저차원적 단계에서 벗어나 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고차원적 단계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복 때문에 하나님께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오라고 합니다. 그 분을 사랑하여 그 분께 왔더니, 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복이란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그 부산물일 뿐입니다. 이렇게 될 때 복을 적게 주셔도 감사하고, 늦게 주셔도 감사하고, 거두어 가셔도 감사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복도 못 받으면서 하나님을 왜 믿느냐>고 비아냥대는 사탄의 말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사랑하는 전천후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복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는데 그 누구보다 많은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복을 뛰어넘어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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