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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민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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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민 (눅 22:39-46)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Servant of Suffering)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것을 여러 차례 예언했습니다. 이사야서의 ‘4대 종의 노래’에 보면 선지자는 마치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주님의 고난 받으심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엄청난 낮아지심(비하)이었고, 마굿간 짐승의 먹이통에 뉘었던 것은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시절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가기까지 하신 주님은 평생을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사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은 배척, 위협, 반대 음모 등 온갖 고난의 단어들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인류와 온 세상을 위한 ‘고난의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과 이어지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죽음까지의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의 절정 부분입니다. 특히 본문의 겟세마네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신 주님은 마침내 십자가에서도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고난에 대하여 C. Morgan은 ‘주님의 고난 현장으로서 이곳이 차라리 갈보리 언덕 보다 더욱 생생하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본문 39절을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39절). 본문의 사건은 고난주간의 다섯째 날인 목요일에 있었던 각종 사건을 보도하는 종결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전반부 동안 밤이 되면 늘상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모두에게 알려진 곳이었고, 올리브 나무가 많은 감람산 안에 있는 기름을 짜는(겟세마네) 곳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3km 떨어진 기드론 시내 위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 반경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가 아는 것을 그대로 허용하셨습니다. 지난날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자연스럽게 피하셨던 주님은 이제 때가 찬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주신 잔을 마시려 하신 것입니다. 

40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잘 나타납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특별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모든 제자가 아니고, 가룟 유다도 아니고, 충성스런 제자들만을 구별하여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시작됩니다. 십자가 수난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에서 드려진 이 기도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책으로 인하여 야기된 인류의 모든 질고와 형벌을 일거에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려는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의 결단의 기도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숭고한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기도 속에 담겨 있는 고민을 살펴봅시다. 오는 주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무릎을 꿇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심 (= 고민중 기도) 

41-42절= “···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예수님의 고민하는 모습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마가복음에는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평범한 기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손을 하늘로 들고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러한 자세로 기도하셨다는 것은 매우 겸손히 간절하게 기도드렸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주님의 기도 내용은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곧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과 수치를 인하여 고민하고 번민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고민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감히 주님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던 그 깊은 심연의 고통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3) 고 했습니다. 주님은 고민 중에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동참해야 할 제자들은 주님의 고민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했고, 주님 곁에서 힘이 되어주지도 못했습니다.  

45절=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제자입니까? 주님과 함께 이 시대의 온갖 불의와 부조리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제자입니까? 혹시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자고 있던 한심한 제자들의 뒤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땀이 핏방울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심 (= 고민의 깊이, 엄청난 고통)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의 기도는 문자 그대로 힘쓰고 애쓰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의 이마에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였습니다. 

여기 ‘힘쓰고’의 헬라어 ‘아고니아’에서 영어 agony(고민)가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심한 정신적 투쟁을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사탄의 유혹에 맞서고 계시는 예수님의 영적 전쟁을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민은 깊고 강한 정신적 고통이요 큰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동안의 모든 삶도 슬픔과 고난 그리고 외로움의 연속이었지만, 본문의 고민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제 엄청나게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 어떤 기쁨이나 위로도 없는, 오직 처절한 수욕과 고난의 쓴 잔이 목전에 다가 왔습니다.

이 고민은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졌던 감정의 심연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심히 놀라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거의 쓰러질 뻔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고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모든 인류의 죄책이 그의 양어깨에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분에게 세상의 모든 죄짐이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양이요 감당하기 힘든 무게이고, 무서운 책임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번민하신 이유는 또한 어둠의 세력이 총공격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때는 어둠의 시간(the hour of darkness)이었습니다. 이 때는 온 세상의 구속(救贖)을 위한 하나님 아들의 마지막 단계이고, 마귀의 세력이 총출동한 시간입니다. 

최후의 만찬 시간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요 14:30). 지옥의 세력들이 예수님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총궐기한 때입니다. 무서운 싸움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마음을 고민스럽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셨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거두시고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영적 어둠이 시작되었고, 이제 그 어두움은 갈보리 십자가에까지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찍이 이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사 53: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경험하신 것은 엄청난 갈등이었습니다. 주님은 땅에 꿇어 엎드려 땀을 비오듯 흘리며 간구하셨습니다. 44절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땀이 핏방울 같이 되더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것은 사실적인 표현일까요, 아니면 긴박한 영적 전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피가 땀방울로 스며나왔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긴장이 주어졌을 때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이러한 현상이 의학적으로도 가능함이 입증되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땀이 피처럼 보였다는 견해입니다. 일반적으로 땀은 주르륵 흐르는데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는 너무나 땀이 많이 나와 흐르지 않고 마치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는 견해입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견해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아무튼 이 견해들은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가셔야만 할 십자가 고난의 길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필사적인 힘을 쏟아 매우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걸음 더 나가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눈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님의 고민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나의 작은 겟세마네’로 올라갈 것입니다.  


3.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심 (= 고민에서 승리하심, 아버지의 뜻 순종) 

42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에 있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옮겨 달라”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잔, 이 수치의 잔, 이 죽음의 잔을 옮겨 달라는 요구는 참사람이신 그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은 홀로 무릎을 꿇고 차가운 땅바닥에 손을 뻗어 기도하셨습니다. 아마 흙을 움켜졌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힘쓰고 애쓰시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더욱 승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의 기도의 자리에서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리차드 박스터는 그의 일생동안 병과 쇠약에 시달렸는데 이로 인해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로 하여금 '더 좋은 나라'에 대한 열정과 열심을 품게 해 주기도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올린 그의 기도는 무척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의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스런 손길과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와 유사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지, 주님이 하시고자 할 때는 언제든지··· ”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자신이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겟세마네에서 순종의 기도로 승리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표현한 것처럼, “그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시고 자원하여 공공연하게 십자가의 길로 나섰습니다.  

비록 이 잔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주님은 더 이상 번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배반한 제자가 군병들을 이끌고 오고 있었지만 주님의 얼굴은 오히려 미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주님은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과 치욕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갈보리로 향한 그의 의지와 발걸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겟세마네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예수님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주님의 모습과 기막힌 대조를 이루는 잠든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히려 저들의 믿음을 위해 격려하셨습니다.  

45-46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아버지의 영광의 본체이시며 창조주이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인자로서 우리와 꼭 같은 육체와 영혼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은 한 점 죄도 없으시면서 우리의 연약을 감당하셨고, 그리하여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겪은 엄청난 고통과 번민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온 세상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인들에게 용서와 평강을 주시기 위해 쓴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우리의 죄악의 크기에 전율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피맺힌 번민과 무서운 투쟁을 묵상하며, 주님의 보혈의 고귀함과 우리 구원의 고귀함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은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십자가 고난을 명하셨고, 이 뜻은 오늘 믿는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먼저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확장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작은 겟세마네에서 십자가 고통에 몸부림쳐 본 적이 있습니까? 

고통과 번민의 밤이 지나면 마침내 광명의 아침이 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할렐루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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