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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을 살라 (고전 1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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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살라 (고전 15;21-22)

시민전쟁 중, 전세가 불리해 후퇴를 하던 한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놓고 왔습니다. 장교가 지휘도를 놓고 왔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가지러 다시 적진 속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링이라는 한 소년 병사가 그 지휘도를 찾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휘도를 찾습니다. 하지만 거의 다 돌아올 무렵 그만 총을 맞아 소년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던 이 소년이 대령에게 지휘도를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령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신론자이자 회의론자였던 콘웰 대령은 소년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 이 어린 병사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한 소년의 죽음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코넬은 부활의 주님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골든콘웰 신학대학원(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을 세운 럿셀 콘웰(Russell Conwell)입니다.

여러분을 부활을 믿습니까?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으셨나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소위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고백이 세상은 물론, 우리 자신조차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부활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을 사는 제자들을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지식도, ‘과연 주님이 부활하셨느냐?’ 하는 논의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 부활을 사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성경에 부활에 관한 내용을 넣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려 할 때 이성적으로 가장 납득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옛 수도인 이스탄불의 옛 도성 안에는 1700년이나 된 성 소피아 사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최근 거기 소장됐던 비밀문서 하나가 발견되어 가이드포스트에서 이를 소개했습니다. 문서의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내는 빌라도의 보고서> 입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 동안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폭동이 걱정되어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텅 비었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듯,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본디오 빌라도”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생명을 걸고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은 생명을 걸고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죽을까 두려워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서 그들과 함께 사십일 동안 보낸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부활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왜요? 그것은 부활하신 주께서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지금도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으며, 그분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제자들은 40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라면 환영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4일도 아니고 40일 동안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책 중 <부활을 살라> 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극보수적 신앙을 가진 가난한 집안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견딜 수 없어 가출을 했고, 열여덟 살에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처럼 기쁨과 희열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가출한 이후 신앙을 가진 적 없었던 자매였지만, 생명을 잉태한 순간 자신 안에 있는 이 생명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자신에게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 몇주 후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낳았지만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해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이어 마약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텅 비어 있는 한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텅 비어있는 예배당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여성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이와 함께 주를 따르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교회였습니다. 환영받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극적인 회심을 한 그녀를 그들은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은 알아도 그 생명이 어떻게 자랄 수 있는지,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에는 관심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제외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부활을 기념하는 곳이 아니라 부활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3. 부활의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증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 즉 오직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 들려준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한 사람, 복음을 믿는 사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드디어 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의 수난”은 주께서 수도 없이 말씀하신 것이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성공시키고, 병도 저절로 낳게 하시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게 하는 존재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구원자이지요?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가르쳤을 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8:31-32)

베드로는 항변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불과 몇 시간 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믿음 있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머리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고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드디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지,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아야지.”

그때부터 베드로와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이 한 몸 살게 하옵소서.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오직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지난번에 저는 부목사님들과 함께 수원에 사는 31살의 한 성도의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당시 심방카드에는 그녀의 기도제목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1) 남편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2) 가족 모두 건강할 수 있도록, 3) 폐렴인 줄 알고 CT촬영을 했는데 작은 혹이 있어 정밀검사가 필요함, 검사결과가 정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그날 저는 그 가정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검사결과는 폐렴이 아니라 폐암 말기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러실 수가 있는가? 아직 젊은 엄마, 2살짜리 아들과 열심히 살아가는 가정에 폐암 말기라니…. 그날 그 가정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지 못한 저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좀 더 열심히 기도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자매를 만나고 그 자매와 함께 전도하러 다니는 목자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부끄러워졌습니다. 폐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은 그 자매는 그 목자님과 함께 한 주간 동안 약 5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저에게 폐암 말기, 항암치료 포기시 5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큰 무기를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주님 덕분에 저는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재정팀장님이 어느 날, 그 자매가 한 헌금 봉투의 내용을 읽고서는 그 봉투를 저에게 가져오셨습니다. 그 헌금 봉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헌금은 17일날 전도폭발을 듣고 구원받은 제 대학 선배가 본인을 위해 먼 거리에서 오시는 집사님께 커피 한 잔이라도 꼭 대접해야 한다면서 미리 저에게 맡겨놓은 커피값이었습니다. 제가 타이밍을 놓쳐 커피값을 지불하지 못해 이 돈을 감사헌금으로 드립니다. 선배가 구원받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고, 징벌과 고난을 주는 하나님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저처럼 주님의 품에 포근히 안겨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미리 감사하고, 선배를 통해 선배의 신랑이 구원받고 온 집안이 구원받을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고, 건강한 아들 딸 출산해서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선배가 반드시 볼 것임을 믿고 미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생명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축복이고 가슴 벅찬 행복인지 알려주시고, 주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깨닫게 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치밀하시고, 계획적이시고, 살아있으십니다. 살아계신 주 여호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매야말로 부활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활을 살고 있지 않고서야 어찌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부활절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이 충만한 인생, 그 기쁨으로 어떤 고난과 역경도 뛰어넘는 복된 인생, 부활을 살아가시는 인생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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