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 (렘 9:23-26)

첨부 1


하나님을 알아 가는 사람
예레미야 9:23-26

사람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놀라게 하며, 그것이 삶의 지혜와 능력이 되게 합니다. 알면 알수록, 그 만큼 삶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큼 산다.’라고 말을 하고, 지혜자도 잠언 9:10절에서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것이 여러분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자양분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인생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얻어지는 지혜와 힘입니다. 그래서 본문 23-24절에서 야훼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기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땅히 헛된 것을 따라가고 말하는 세상의 지혜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조금뿐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는 지혜와 선한 능력을 얻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이 시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에서 ‘안다’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객관적으로 -- 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주관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알다시피 사람이 서로 가장 잘 아는 대상은 아마도 부부일 것입니다. 신실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부부 서로 간에는 마음과 마음으로 알고 있고, 부딪치며 살아 온 몸으로도 알고 있고, 이런 앎은 헤어지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알아 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사람을 알아 가는 것은, 신비감과 즐거움 자체입니다. 사실 가족과 친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분이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알아가면서, 친구가 되고, 나아가 하는 일의 파트너가 되고, 동역자가 되고, 배우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모르는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되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것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새롭게 알아간다는 것이, 지금도 계속 진행형입니다. 알아 가면 갈수록 새롭습니다. 물론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깊이 알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망스러움이 자꾸만 쌓여갑니다. 여기가 바로 만남의 과정에서, 알아가는 과정에서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알면, 더욱 놀랍고 놀라운 분임을 알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데, 오늘은 그 점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을 알면,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는 것만큼 비로소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여정을 달려가다 보면, 간혹 그리스도인의 영적성장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 믿음이 잠깐 성장하는 같다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성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노력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외적인 성장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활동함으로 이룹니다. 하지만 인간의 내적인 성장, 곧 영적인 성장은 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심령 가운데로 생명의 진리가 들어가고, 그 진리를 깨닫고, 삶의 자리에서 말씀대로 실천해 나갈 때에,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실행을 한마큼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크기가 어느 정도입니까?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고, 아는 하나님은, 그분의 크기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크기는, 곧 여러분의 인생의 크기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후 3:18절에서 말씀하기를,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여러분이 자라기를 빕니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도 영광이 주님께 있기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만큼 하나님의 뜻, 곧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하나님을 알 때 지혜를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9:10절에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압니다. 지식은 학습을 통해서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한 만큼 지식을 얻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란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 2:3절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이점을 바르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지혜, 그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보세요. 십자가를 세상 사람은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소위 하나님의 딜렘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전하게 이루시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지혜요 능력입니까?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사는 지혜, 살리는 지혜, 생명력 있는 지혜를 배우고 깨닫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고 믿는 사람답게, 하늘의 지혜를 따라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알 때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안에 잇을 때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후 1:2절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믿음과 같은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더욱 풍성해지기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것이 ‘자기의 자랑이요, 자기의 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은혜의 크기가 커지고, 평강이 넘칩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알고, 나에게 산성이 되고, 방패가 되주신 하나님을 알고 의지할 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4절에서 노래하기를,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했고, 시편 62:1-2절에서는 노래하기를,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갈 때에 더욱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알면, 이제는 어떤 형편에서도 평강할 수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환난이 다가오고, 견디기 어려운 압박이  가해진다 해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고난을 견딜 뿐 아니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바울과 실라는 당한 형편을 인하여, 시비하거나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서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을 가둔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습니다. 요동한 것은 바울과 실라가 아니라 그들은 가둔 감옥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가진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알 때 여러분의 성품이 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 성품이 변합니다.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성품이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 성품 그대로 가지고,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직 교회 문만 열심히 넘나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품은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결단이나 진지한 자기훈련으로, 어느 정도 성품이 변화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 인간의 성품은 성령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한, 사람의 방법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7:18절에서 고백하기를,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인간의 성품은 스스로 노력해서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을 알아갈 때, 자연히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고, 그 거룩한 성품이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열매가 더 견실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그런 사람은 영적인 감각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명목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어둡고 둔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삶을 삽니다.

실로 성소의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세요,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삼상 2:12절은 증거하기를,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야훼께 드리려고 가져온 예물 가운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 먼저 자기 마음에 좋은 것을 취했고,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것을 멸시했을 뿐만 아니라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을 건드리는 음란죄를 스스럼없이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감각을 잃고,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질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비전 또한 온전할 수가 없고, 결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연고로, 야훼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 믿음생활을 한다고 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한국교회사를 보세요,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에서 평양이란 도시는 선교의 기적을 이룬 증거가 된 도시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다 자랑하는 교회가 평양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관서지방으로 불리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의 교회는 다른 지역보다도 번성하고, 이 민족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학했던 일제탄압기간에도 견뎠던 교회가 지금은 없습니다. 왜입니까? 저는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가 교회를 지킨다는 이유로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목사와 장로들이 앞장 서서 신사참배를 하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하나님께 버림 받을 짓을 한 목사와 장로를, 교회를 지킨다는 이유로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촛대를 옮기는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서 눈으로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도려내지 않고, 수가 많다고 거짓말하고, 불법을 버리지 못하고 쓸어 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촛대를 옮깁니다. 그런 날이 오지 않도록 먼저 회개하고, 잘못된 것을 아파도 스스로 도려내는 일에 담대한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알고자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만큼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지고,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갈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여러분의 성품이 거룩하게 변화되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여러분의 삶의 모습과 질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고, 구체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삶과 예수운동을 전개하시던, 머리 둘 곳도 없고, 진지 잡수실 시간도 없이 분주했던 예수의 삶을 닮기 위하여 노력하고 애를 써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작은 예수다운 삶을 사는 것을 감사하고, 그런 삶을 통하여 예수의 참된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