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얻은 사람, 얻을 사람 (수 18:1-10)

첨부 1


얻은 사람, 얻을 사람 (수 18:1-10)   

세상에는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이란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성공을 얻은 사람과 성공을 얻지 못한 사람, 돈을 벌어 재력을 얻은 사람과 돈을 벌지 못한 사람, 공부를 해서 많은 지식을 얻은 사람과 여러 사정으로 공부를 하지 못해 지식을 얻지 못한 사람 등 다양한 부분에서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얻은 사람들>과 <얻지 못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여러 성읍들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 완전히 정복되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땅을 분배해 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직 정복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었지만, 땅을 분배하라고 하신 이유는 여호수아가 늙었으므로 그가 살아 있을 때 땅 분배를 마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3장 1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땅 분배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 두 지파 중에서 르우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요단강 동쪽에서 이미 땅을 분배받은 후였으므로, 요단강 서쪽에서 땅을 얻어야 할 지파는 아홉 지파와 므낫세의 남은 절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이 모두 정복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제비뽑기 방식으로 실제로 땅을 분배받은 지파는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므낫세의 남은 절반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아직 일곱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은 <이미 땅을 얻은 다섯 지파>와 <아직도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로 나뉜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땅을 얻은 사람들>과 <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가슴 아픈 사연은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서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얻은 사람들>은 그 얻은 것을 쳐다보는 기쁨에 도취되어 살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 좌절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들은 얻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좌절합니다. 세상에는 얻고자 한 것을 얻지 못하여 슬퍼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얻으면 행복하고,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단순 비교가 과연 옳은 것이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종종 한 지역 교회들의 연합 집회를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다양한 교회의 교인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규모가 있고 재력도 있어서 예배당도 짓고, 교육관도 짓습니다. 이 교회는 교회와 물질과 능력을 <얻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 교인들의 화젯거리는 건축 규모, 건축비, 건물 구조, 시설 등 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듣고 있는 작은 교회 교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합니다. 이 분들은 자신들의 교회는 <얻지 못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소위 <얻은 교회> 교인들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구나 만약 그런 이야기를 하는 마음 깊은 곳에 은근히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뜻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교만으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얻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얻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도 많습니다. 재물 때문에 삶의 질서가 무너진 사람들은 차라리 가난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권력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차라리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얻은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은 게 아닌 것처럼, <얻지 못한 사람은 무조건 불행하다>는 명제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얻지 못했던 불행 때문에 더 깊은 영성과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정한 삶을 지켜간 이들이 많습니다. 

1558년 1월 15일, 비쩍 마른데다 얼굴은 창백하고,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을 가진 스물다섯 살의 처녀가 웨스트민스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영국인들은 그녀가 과연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영국을 건져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불안해했습니다. 이 처녀는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였습니다. 

그녀의 약점은 볼품없는 외모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앤 볼린>은 본래 시녀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첫 부인인 <캐서린>에게서 <메리>를 낳은 후 이혼했고, 앤 볼린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시녀의 딸이라고 천대받았습니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겨우 네 살이 될 무렵 어머니 앤 볼린은 간통죄로 처형되었고, 그 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뛰어난 외모도, 멋진 환경도 가지지 못한 불행한 처녀가 왕위계승자로 등장했을 때, 영국인들이 못미더워 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염려는 기우였습니다. 45년에 걸친 그녀의 치세가 끝났을 때, 영국은 유럽 최강의 나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초석이 탄탄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세 살이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초상화를 이복 언니인 메리에게 보냈습니다. 초상화에 동봉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창피하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창피하지 않습니다. 이 우아한 그림은 세월이 가면 색깔이 바래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겠지만, 그 마음만큼은 아무리 빠른 세월이라 해도 따라잡을 수 없고, 아무리 빠른 발이라 해도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불우한 환경에 놓여 있었고,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던 열세 살 소녀에 불과했지만, 좌절하기는커녕 <마음만은 따라잡을 수 없고, 밟을 수 없다>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외모보다 마음, 환경보다 마음이 더 소중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얻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역사에 길이 남는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비록 얻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가꿈으로써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앞에서 연합 집회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곳에는 아주 작은 교회 교인들 있습니다. 규모가 있는 교회 성도들이 예배당이나 교육관 짓는 일을 자랑하는 맛에 산다면, 예배당이나 교육관을 크게 지을 일이 없는 개척교회나 농촌교회 성도들은 무슨 기쁨으로 사는 것일까요? 그런 교회의 목사님들은 어려운 교회를 묵묵히 지켜가면서 받는 은혜와 잔잔한 보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이야기에서 더 깊은 감동을 느꼈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도에 대해 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나는 많이 얻은 목사인가? 아니면 얻은 게 없는 목사인가?>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얻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이 귀한 땅끝교회 교우님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가진 게 많습니다. 예배당과 교육관, 홀리조이센터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일 멀고 가까운 곳에서, 어린 아이로부터 어르신들까지 많은 교우님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합니다. 동료 목회자들 중에 저를 부러워하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저는 많이 얻은 목사입니다. 

<많이 얻은 목사>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제 마음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기쁨과 감사>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뜻밖에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위기의식>이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첫째 이유는 얻었다는 자부심이 저를 교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이미 얻었으므로 더 할 일이 없다는 허탈함에 빠질 위험성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얻어 들이던 화려한 한 때의 과거>에 도취되어 살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 삶을 고착화시켜 죽은 인생이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식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에 나오는 <아직 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한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를 독려하여 얻지 못한 것을 탄식하지 말고, 지도를 그려오라고 말합니다. 3-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아멘. 

지도를 그려오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도를 놓고 땅을 분배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6절을 보세요.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9-10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려서 실로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 아멘.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가 사람을 보내어 지도를 그려올 때, 땅을 이미 얻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미 얻은 그 땅을 바라보면서 흡족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 우리는 땅을 얻었으니, 정말 다행이야. 봐라. 저 땅들을......이 얼마나 좋은가?>  그들은 이미 얻은 것에 심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얻은 것에 취해서 사는 삶>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얻은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들을 얻던 때의 무용담이나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해질 뿐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운 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도를 그리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미래에 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지도를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그 땅을 실제로 정복하여 얻게 될 미래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얻을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앞에서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그 중에서 <얻지 못한 사람>이 <얻지 못한 사람>인 채로 남아 있으면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얻을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습니다. 가슴이 뛰고, 흥분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얻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 방치하면 안 됩니다. <얻을 사람>으로 변화시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얻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얻을 사람>으로 만들어 끝까지 역동적 인생을 살아간 분의 예로 바울 사도를 들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아멘.  

이 말씀을 고백할 때 바울 사도는 감옥에 계셨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곳에 복음을 전했고, 교회들을 세웠으며, 나이도 많았기에 이제 은퇴를 한다고 해도 그를 비방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얻은 사람>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사람, 얻을 사람>으로 살기를 갈망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가고자 한 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치세로 나라가 점차 부강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보석 반지마다 <셈페르 에어뎀, semper eadem>이라 새겨 넣었습니다. 그 뜻은 <항상 동일하게>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얻었든지, 얻지 못했든지 상관없이 늘 마음을 비우고 미래를 향해,  언제나 동일한 태도로 살길 원했습니다. 

<얻은 것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못 얻은 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마음의 화폭에 미래를 위한 지도를 그리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도를 그리는 태도로 살아가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앞으로 이미 얻은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제게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을 기대하는 흥분으로 살고 싶습니다. 과거로 열린 문은 닫고, 미래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싶습니다. 

지도를 그리고, 그 지도를 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로, 의미 있게 살아가는 데 대한 기쁨으로, 온 몸의 신경이 살아 일어나 날마다 짜릿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런 마음으로 지도를 그리는 것을 보시거든 <그 정도 얻었으면 되었지, 뭘 더 바래? 왜 그렇게 욕심이 많은가?>라고 비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삶에 진지한 데 대하여 경의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지도를 그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인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땅 끝에 이르는 세계 지도를 그리셨습니다. 그 세계 지도는 장차 복음으로 정복할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에 따라 거룩한 정복전쟁, 영적 전쟁이 지금도 수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일곱 지파가 지도를 그리러 갈 수 있는 이유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도에 그린 땅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늙었고, 그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셔서 땅을 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지도를 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지도를 그리기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그리라. 내가 그 땅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멋진 지도를 그리시길 기원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 The Impossible Dream>이란 노래를 아십니까?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 길은, 험하고 험해도 //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 힘껏 팔을 뻗으리라 //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 죽음이 나를 덮쳐 와도 평화롭게 되리 //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 가네 / 저 별을 향하여> 

장엄하면서도 슬픈 노래입니다. 장엄한 이유는 불가능한 꿈을 향해 나아갈 각오를 담고 있기 때문이요, 슬픈 이유는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에 몸이 찢기고 상할 수도 있다는 실패에 대한 예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장엄해야 하지만, 슬퍼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얻은 사람이라 교만하지도 않고, 얻지 못한 사람이라 좌절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위하여 꿈을 꾸며 나아갈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곱 지파가 그려온 지도는 지도로 남지 않고, 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에 그렸던 땅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지도를 그리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산지를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