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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주님의 마음, 제자들의 마음 (막 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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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 제자들의 마음 (막 9:30-37)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엄마와 아이가 방안에서 공을 가지고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놀고 있던 엄마가 방을 나가면서 가지고 놀던 공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나갔습니다. 엄마가 방을 나가고 없는 사이에 아이는 엄마가 바구니에 담아놓은 공을 꺼내 그 옆에 있는 상자 안에다 집어넣고 아이도 방을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방에 들어온 엄마는 공을 어디에서 찾을까요? 바구니에서 찾을까요? 상자에서 찾을까요? 
  
이 실험은 발달심리학에서 한 아주 유명한 실험입니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아이가 바구니에서 공을 꺼내 상자에 넣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엄마는 당연히 바구니를 열어 공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유치원 아이들에게 보여주고서 ‘엄마가 어디에서 공을 찾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다른 대답을 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공이 상자 안에 있으니까 당연히 엄마가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바구니에 공을 담아놓고 나간 엄마는 아이가 공을 상자에 옮겨놓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들어와서 공을 찾을 때에는 당연히 자신이 넣어놓은 바구니에서 공을 찾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본 유치원 아이들은 공이 상자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공이 상자에 들어있다는 것을 자신이 알기 때문에 당연히 어른들도 알 것이라고 생각해서 ‘엄마가 들어와서는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유치원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 것이고, 자신이 모르면 다른 사람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알지만 엄마는 모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미완성된 뇌를 가지고 태어나,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 뇌가 점점 완성되어 갑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의 뇌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것을 인식하거나 다르게 알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것을 본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과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마음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론이 어떻게 생성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만, 아마도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거울 뉴런이라는 것은 우리의 뇌 속에 있는 특수 신경세포인데, 이것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할 때 거울처럼 우리 자신을 비춰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행동하지 않는 일이나 경험하지 못한 것까지도 마치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처럼 인식시켜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론에 의하면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린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진 않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 바로 앞 마가복음 9:2절 이하에 나와 있는 변화산 체험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별세 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9절입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변화산에서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8:31절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을 지나가시는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이 들리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리고 몰려든 그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셔야 하고, 병든 자가 오면 병든 자를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통과해서 지나가시긴 하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길 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는 걸음을 늦춰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를 통과해 가시는데도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는 엇지만, 뭔가 분위기가 전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가시려고 하시는지,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을 비롯된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굳은 결심을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려 하는 것에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31-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진 못했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고, 그리고 왜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하느냐고 묻는 것을 두려워했다.’ 뭔가 분위기나 느낌이 좋지 않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조용히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을 떠나 가버나움에 도착하실 때까지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 것도 기록해 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이르실 때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지 모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가버나움에 이르실 때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어쩌면 아무 말씀도 하고 싶지 않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붙잡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과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당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바라보시며 착잡한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제자들은 그 뒤를 따라오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여기 오는 길에서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토론했느냐?’ 그들은 오면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토론했느냐?’고 물으셨지만, 34절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토론한 것이 아니라 쟁론을 했습니다. 

쟁론이라는 말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앞서 가신 예수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몇 걸음 뒤처져서 조용조용히 말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자꾸만 언성이 높아지고 나중에는 심한 말다툼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그 말다툼을 예수님께서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캐물으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심하게 말다툼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질문에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왜 대답할 수 없었을까요? 그들이 정당한 이슈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면 말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34절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길에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이 서로 자신이 제자 서열 1위라고 우겨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도 ‘네가 서열 1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12명을 서열로 줄 세우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수제자이고, 그 다음은 야고보와 요한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을 똑같이 여기셨습니다. 물론 어느 때에는 3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신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서열을 정하시거나, 3명만을 데리고 가셨다고 해서 그 3명이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하다거나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서열을 정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인간의 비극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서열을 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열을 정해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가장 먼저 묻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이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거의 대부분 그 사람의 나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알아야만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입니다. 서로 만나서 나이를 묻고,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일단 내가 그 사람보다 서열이 위라고 생각하고, 적당하게 상대방을 깎아내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이로 서열이 정해지면 호칭부터 달라집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형님이 되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동생이 됩니다. 형님으로 정해진 사람은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고, 반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이미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주 편안하게 풀어갈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누가 먼저 군대에 들어왔는지 하는 것으로 - 일명 ‘짬밥’으로 서열을 정합니다.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다 왔는지, 나이가 몇인지 하는 것과 상관없이 군대 짬밥을 누가 더 먼저 먹었느냐에 따라서 명령체계가 확실하게 세워집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위나 나이 등에 의해서 의도하지 않게 서열이 정해집니다. 학교에서는 먼저 들어온 상급생이 서열이 높습니다. 재수 삼수를 해서 늦게 들어와 나이가 많아도 1학년이 3학년에게 대들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 들어온 순간 이미 서열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열을 파괴하는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서열을 정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서열을 정하려 한 것 뿐입니다. 제자들 역시 서열을 정하려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슨 문제로 그렇게 말다툼을 했느냐?’고 물으시자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이 서열을 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열을 정하려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래야 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서열 정하기 다툼에서 모두가 자신이 더 높은 서열에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랬기에 ‘왜 그렇게 말다툼을 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는 그런 서열 정하는 것 관심 없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서열에서 뒤쪽에 있어도 괜찮아’ 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렇게 심각하게 말다툼을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서열 1번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지금 예수님은 ‘서열 1번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서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겸손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섬김의 받기 위해서 오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서열 1번이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에게도 서열을 정해주셨을 것입니다. 서열을 정해주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서열을 쟁취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예수님께 아부하고 뇌물도 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서열을 정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려 한 이유는 당신이 한 알이 밀이 되어 썩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한 후에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희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겸손하고 낮아지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천국복음을 들었고,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론에 말씀드린 ‘마음이론’으로 본다면 제자들은 지금 유치원생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들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스승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예수님께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무엇을 바라보며 길을 가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관심 갖는 것에만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서열을 정하는 것, 서로가 서열 1위가 되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그 사랑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종려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묵묵히 가고 계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죽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바라보며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의 뒤를 따른다 하면서 자신이 큰 자가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다툼을 하고 있진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주님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주님께서 품고 계신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입니까?』라는 유명한 책을 쓴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1934-)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한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수는 184명이었습니다. 그는 열심을 품고 교회를 섬겼고, 그와 동역하는 다른 교역자들 역시 정신없이 사역해야 했습니다. 2년 동안 극성스러운 조직관리와 전도 덕분에 교인수는 어느덧 600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2년 만에 교회를 3배 이상 성장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정신없이 사역하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역을 멈추고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와 묵상을 하게 됩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 이런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그러면서 연이어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수를 200명에서 600명을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쪄가는 것일 뿐이다.” 
  
이런 음성을 듣고 난 후 그는 사역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는데 열심했던 지난 사역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 그의 사역을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생각과 내 욕망이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뜻에 얼마나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때로는 어린아이들처럼, 내 생각이 마치 주님의 생각이고,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인양 착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사순절이 점점 깊어지며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점점 가까워지는 이 계절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점검해 보십시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같은가 하고 말입니다. 내 마음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기준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주님의 생각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진 않습니까? 신앙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 주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과 욕망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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