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첨부 1


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들어가는 말

국민일보 미션란에서 20년간 말기암과 말기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샘물호스피스 병원’ 원장이신 원주희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분은 약사이면서 목사로서 호스피스 사역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1993년 호스피스 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이 병원을 거쳐 간 환자들은 5,600여명이고, 호스피스 봉사자도 1만 6천여명을 배출했습니다.
병원에서 그와 마주친 말기 환자들 대부분은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외가 아닙니까?
길어야 3개월이면 이 세상을 떠날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다니!
그의 말입니다.

“환우들이 죽음을 앞두고 허무감에 빠져 지낼 거라 생각하지만 참 밝고 행복하게 지내요. 하나님의 집인 천국으로 이사 간다고 믿고, 거기서 가족을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문병 온 가족들의 표정들도 밝게 바꿔져요. 이분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죽음은 끝이 아니거든요. 이게 복음의 힘이라고 믿어요.”

스데반의 순교 장면
오늘 본문은 오직 예수, 그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의 제단에 바쳤던 스데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이는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있을 수많은 순교의 피의 첫 방울이었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고’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손 쓸 사이도 없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들의 성난 얼굴을 상상해보십시오.
사도들의 말씀에 양심에 깊은 가책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분노로 속이 뒤틀려 이를 갈면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②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격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조적으로 평온하면서도 천상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면서 기뻐하는 스데반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며’, 돌에 맞으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며 죽어갔습니다.

③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땅의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55절) 

④ 사울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될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옷을 받아들면서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습니다.
58절 “.......돌로 칠 때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은 그 아름다운 순교 장면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저렇게 죽는 사람도 있구나!’
‘저 스데반이란 사람의 사상도, 종교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저렇게만 죽을 수 있다면..........’
성. 오스틴(St. Austin)이란 사람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스데반이 기도하는 내용을 바울이 들었을까? 아마 들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웃었을지도 모르지만, 바울은 그 기도 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① 천국 소망을 가져라.
② 진정한 승리는 용서이다.

1. 천국소망을 가져라

건성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시고, 누가 언제 어디서 물어봐도 천국소망이 확실하길 권면합니다.

①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 본 것이 있었습니다.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아마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시였을 것입니다. 
온 우주의 지배자이신 하나님께 속하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위엄과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셨다’는 말씀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26: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엡1:20절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골3: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히1: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신경을 보십시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는 ‘주님이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 순간 주님은 서 계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은 당신을 위해 흘리는 최초의 순교의 피를 앉아서 받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다’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올 때 그대로 앉아 있으면 ‘그저 그런 사람’이란 뜻이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이 들어올 때 일어선다는 것은 경의를 표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님은 순교하는 스데반을 격려하고 돕고 싶은 마음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쓰러질 듯 뒤뚱거리며 걸어올 때 우리는 앉아서 볼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아차 쓰러지는 순간에’ 달려들어 붙들어줄 준비를 하지요?
주님도 그 엄청난 순교의 짐을 지고, 쓰러질 듯 뒤뚱거리는 스데반을 앉아서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위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삶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주님은 앉아 계시지 못하고 서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스데반은 ‘서 계시는’ 주님을 영안이 열려 보게 되었습니다. 
힘을 얻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깃들었습니다.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습니다.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② 그리고 자기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59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 드렸던 기도내용과 유사합니다.
눅23: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주님께서 품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스데반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제 보통사람들이 느끼듯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총각시절 고향 어머니 집을 다녀오곤 했었습니다.
가기 전에 먼저 전화를 합니다. 
“언제 집에 다니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고향집에 가보면, 제가 머무를 방을 깨끗이 정돈해놓았습니다.
새 이부자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속옷도 몇 벌씩 준비해놓았습니다. 
새 칫솔도 준비해놓았습니다.
형수님이 미리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어머니 집이 좋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은 이제까지 잠시 동안의 거처였던 육신의 장막집이 원수들이 던지는 돌에 의하여 부서져 갈 때, 자기 영혼이 영원히 거할 천국, 아버지 집에 가겠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삶의 끝 언저리에서 내 영혼이 가야할 안식처가 없다면 그때 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③ 죽음은 잠일 뿐입니다.

60절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죽음’이란 영원히 ‘끝나는 것’을 의미하고, ‘잠’이란 내일 아침 동녘이 밝아오면 ‘다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젠 자거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가야 하지 않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남편에게 “어서 주무세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셔야 하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잠이란 다시 깨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말합니다.
행13:36절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고전15:6절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한낮동안 비지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한 후 몰려오는 피곤함으로 곤히 잠에 떨어졌다가 새날이 밝아 부스스 눈을 뜨고 주님의 품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죽음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내일 아침 깨어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어머니 품에 안겨 고이 잠든 아기의 모습처럼 내일 아침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믿는 우리도 주님 품에 평안히 잠들 수 있습니다.

뇌에 펼쳐진 수만 개의 실핏줄 중에 하나만 터져도 무너져 버리는 이 육신의 장막,
수만 개의 세포 중에서 하나만 돌연변이가 되어도 무너져 버리는 육신의 장막,
툭 치면 부서지고 잘못 놓아도 깨어지는 질그릇 같은 이 육신의 장막,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 내릴 때 안길 수 있는 주님의 품이 있음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가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을 이렇게 자세하게 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소망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천국 소망을 확신하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2. 진정한 승리는 용서이다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은 ‘진정한 승리는 용서이다.’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승리는 원수를 박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원수를 밟아 죽이는 것을 승리로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입니다.

오늘 스데반을 보십시오.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눅23: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러니까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자기의 생명을 빼앗는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작은 물질적인 손해에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약간의 자존심이 상해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자기 생명을 빼앗은 자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마음엔들 어찌 별 생각들이 소용돌이치지 않았겠습니까?

‘과연 이들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일까?’
‘이렇게 끊임없이 반역하는 백성들도 구원받을 가치가 있을까?’
‘저 사람들은 사람인가 마귀인가?’
저주스럽습니다. 
침이라도 뱉고 싶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마음에는 ‘또 다른 성령의 생각’이 밀려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벧전3: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나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복을 이어받으려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십시오.

아무도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다고 패배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를 갈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을 승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진정한 승리자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스데반이 순교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저주했다면 그의 이름은 성경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서했기에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용서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국소망을 가져라.’
‘진정한 승리는 용서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