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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미 (요 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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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미 (요 1:29-34)


인생을 말할 때 ‘짧고 굵게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세례 요한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정말 짧고 굵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레위 지파의 아비야 후손으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가문의 배경으로 볼 때 제사장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 직을 승계하므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배경을 뒤로 하고 광야로 들어가 낙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느 날부터 광야에 우뚝 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하다가 서른한 살에 헤롯 왕의 칼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매우 굵고 강렬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를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광야로 나오는 백성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세례 요한의 사역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세례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준 세례는 종교 의식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통해 선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창세기 12장의 말씀과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전에도 한 번 봤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한 번 크로스웨이 성경공부의 한 그림을 보며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5-B 그림)

창세기 1장부터 11장에 보면 네 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장에 아담과 하와의 사건이 나옵니다. 4-5장에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나옵니다. 6-10장에 노아 홍수의 사건이 나옵니다. 11장에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이 네 개의 사건은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읽어보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은혜를 주시는 구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추방당하는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로 쫓겨나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죽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이마에 인을 쳐 주시면서 그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며 음란한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느끼시며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시는 가운데 은혜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노아 방주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류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대표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바벨탑 사건입니다. 인류는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자고 말하며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언어를 흩으시며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셔서 다시 구원의 역사를 쓰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가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께 도전했던 그 현장인 바벨론의 가장 비옥한 땅인 갈대아 우르에 거하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은 단순히 아브라함 한 사람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만을 위한 복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복의 근원, 즉 출발점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의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시는 은혜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를 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선택하심으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하며 선민사상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세 가지 감사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 세 가지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은 감사했습니다. 노예로 태어나지 않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 감사 기도하는 세 가지 내용을 보면 인종 차별, 성별 차별, 신분 차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 중심으로 왜곡시켰을 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한 은혜, 자신들만을 위한 축복으로 왜곡시켜 도리어 하나님의 아픔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도구로 쓰임 받기보다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광야 복판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중심적으로 왜곡시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갖 차별을 하며 자신들 만의 축복됨을 강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픔의 근원지가 되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하는 사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유자이든, 노예이든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종과 신분 그리고 성별을 떠나 모두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그 뜻을 다시 선포하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네가 메시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거칠게 따지며 세례 요한을 몰아세웠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거친 공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본문 31절을 통해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세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 오시는 메시야는 자신처럼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오시는 메시야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례는 매우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38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가로막이 천입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 곳은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대속죄 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갑니다. 

그것도 발목에 방울 달린 끈을 묶고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이 그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갔다가 죽으면 어느 누구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어 끈을 잡아당겨 시신을 꺼내기 위함입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간과 죄인 된 인간의 공간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이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허물어뜨리셨다는 말입니다. 막힌 관계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의 목적을 29절에서 말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에는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제물이 필요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림은 자신이 죄로 인한 죽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양이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대속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담을 쌓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담을 쌓는 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높아지고자 할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담을 허물고, 이웃과의 담을 허무는 길은 자신을 낮출 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쌓여 있는 담을 허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나는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쌓인 담을 허물려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허물기 위해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허물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함으로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삶입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웅장한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 되었음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표현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예루살렘의 허상과 위선, 교만과 욕망을 깨시고 온 인류를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초대에는 어떤 벽과 차별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입니다. ‘모두’입니다. 예수님의 초대가 ‘다, 모두’이기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주일 아침에 세례 요한이 세례를 통해 선포하는 진정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막혀 있는 담과 허물이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허물어뜨리고 삶의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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