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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반드시 찾으리라 (눅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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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드시 찾으리라 (눅 15:1-10)

하워드 클라임벨이라고 하는 박사님이 쓰신 성장상담교제 서두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어느 외딴섬 조용한 해변가에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옵니다. 그들이 수영도 하고 피서를 지낼 때 안심하고 수영을 할 수 있도록 임명 구조대원들이 열심을 다해서 돌봐줍니다. 혹 누가 바다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으면 임명 구조대원들이 생명을 걸고 뛰어들어서 그 사람을 반드시 구해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섬에 가면 안전하다. 자녀들도 마음대로 수영할 수 있다. 피서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섬에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임명구조대원들이 너무 헌신적으로 애쓰니까 오는 사람들이 기부금을 많이 냈어요.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니까 임명구조원들이 모여서 이제 우리 이 허름한 구조시설을 헐어버리고 새롭고 큰 빌딩을 집시다. 좋은 건물을 지었어요. 그래서 우리 여기서 쉴수 있도록 침대도 하나 놓고 또 심심할 때 우리 친교할 수 있도록 당구대도 놓읍시다. 음악도 들을 수 있도록 카페도 만들고 또 술도 한 잔 할 수 사교클럽도 만듭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시설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어요.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임명구조대원들은 당구를 치다가 사람들이 빠졌다고 하면 요 당구 이게 마지막인데 이것만 치고 뛰어가지, 술 먹고 취해 가지고 제대로 구조활동을 하지 못하고 그들은 다른데에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뒷전이예요. 한 여름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휴양지에는 괴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어요. 여기만 가면 일 년에 몇 명씩 죽는다. 구조받지도 못하고 구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했어요. 상가들은 장사가 안 되니까 다 철수해버렸어요.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들던 그 섬은 이제는 흉물스러운 폐가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섬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변질된,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지적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구조대원들처럼 초대교회는 열심히 영혼들을 구원했습니다. 전도하는 일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모이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거듭하면서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좋은 건물도 짓고 친교활동도 하고 버스타고 놀러 다니면서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할 수 만 있으면 전도를 피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전도에 관한 설교를 안 하기를 바랍니다. 왜? 부담스러우니까. 그래서 전도하지 못하는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면 전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왜 내가 전도가 얼마나 귀한지 영혼사랑을 해보지 못한 분들이 교회에 권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은 그 교회는 점점 전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목사님 그런 전도를 왜 합니까? 그냥 우리 이렇게 교인들끼리 헌금 많이 냈는데 우리 재미있기 즐기고 그저 구제나 하고 그러시죠. 교회는 점점 본질을 잃어버려요. 그 교회는 타락해가는 교회고 역사 속에 사라져가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혼 사랑에 있었습니다. 전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사마리아 수가성을 지나가다가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그 여인에게 무언가 갈급해 있는 것을 발견하십니다. 그 여인은 목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기뻐서 물동이를 옆에 두고 동네에 돌아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우리의 구주를 만났다.”고 소리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뭔가 점심을 제공해 드리려고 마을에 음식을 구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구하여가지고 와서 “예수님, 이것을 드세요.”라고 말했더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아니 누가 우리 주님께 양식을 드렸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 우리 요한복음 4장 31절부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배가 부르셨어요. 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 되었기 때문에. 그게 무엇이냐? 바로 전도하는 것이었어요. 예수님은 전도하는 그 기쁨 때문에 시장기도 느끼지 못하실 정도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양식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루의 일과는 새벽미명에 한 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기도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마을로 들어가서 전도하셨어요. 

자 우리 마가복음 1장 38절 이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내가 전도를 위해서 왔다. 다른 마을로 가서 또 전도하자. 하면서 전도도 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았다. 귀신들에게 메여있는 영혼들, 불쌍한 영혼들, 마귀의 종 된 영혼들을 복음을 통해서 그들을 자유케 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전반부에 두 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어떤 목자가 양 백 마리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들에서 양을 치다가 풀을 먹이다가 저녁이 되어서 우리에 집어넣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세면서 집어넣는데 한 마리가 부족했어요. 아흔 아홉 마리 밖에 안 돼요. 그 때 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가둬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온 산과 들을 헤맵니다. 아니 좀 찾다가 배고프니까 그만 포기하는게 아닙니다. 하루정도 찾아 에이 못 찾겠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뭐. 그게 아닙니다. 그 목자는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우리 15장 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가 있는데 그 주으이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그 잃을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 찾는 다는 말이 두 번 나와요. 반복하죠. 다시 말하면 찾을 때까지, 찾을 때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의연한 결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당히 찾다가 포기하는게 아닙니다. “아이 힘드니까 그만 돌아가자” 그게 아닙니다.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아침에 찾고, 점심에 찾고, 저녁때 또 찾고, 밤에 나가 또 찾고, 새벽에 나가 또 찾고, 이 목자의 열심을 생각해 보세요. 어찌보면 우리도 다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인도를 받고 여기 나와서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다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여기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관심이 오늘 목자의 관심과 같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우리를 찾으시려고 친구들을 보내시고 이웃들을 보내시고 구역장님을 보내시고 목사님을 보내시고 선교사님을 보내시고 마지막에 예수님까지 당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보내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우리가 예수 앞에 나와서 구원 받는 백성이 되어서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양들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오래 전에 자기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글에 쓰셨더라구요. 개척교회에서 목회 할 때에 상가에서 목회를 했는데 상가 4층에 사택이 있고 2층에 사무실이 있고 1층에 조그만 마당이 있었다는 거예요. 하루는 막 설교를 쓰고 있는데 5살짜리 아이가 와서 “아빠 나하고 같이 놀아!!” 그랬어요. “야~ 지금 아빠는 설교 준비 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너 혼자 좀 있을래?!” 그런데 얘가 심심해가지고 “그럼 나 아빠 여기 마당에 나가 놀께” “그래 그럼 거기 가서 놀고 다른데 가지마!” 그래서 설교를 다 쓰고 1시간 후에 내려가 보니 애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온 교회 주변 골목을 다 이름 부르고 찾아도 애를 찾을 수 없어요. 두 시간이 지나니까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파출소에 일단 신고를 하고 동사무소에 신고도 하고 방송도 하고 또 소낙비는 그렇게 오는지?! 흠뻑 젖은 채로 아이를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어요. 혹시 파출소에 무슨 연락이 왔나 파출소에 들어가서 알아보니 연락이 없어요. 그리고 나와서 다시 길로 가는데 저쪽에서 아이들 한 다섯 명이 비를 쫄딱 맞고 걸어오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이가 뒤에서 따라 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마당에서 노는데 동네 형들이 와서 놀러 가자고 해서 건너 마을 놀러 갔다가 형들이 빨리 안 오니까 자기도 혼자 못 오니까 거기 기다렸다가 같이 왔다는 거예요. 4시간 동안 완전히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경험입니다. 자기들은 그 아이밖에는 아무 생각이 안나더래요. 먹는 것도 쉬는 것도 자는 것도 설교 준비하는 것도 아무 생각도 안 나더래요. 오직 아이만 생각나더래요. 4시간 동안 미친 사람처럼 아이만 찾아다닌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목자의 관심입니다. 목자는 그 어린양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 보면 형님이 젖을 짜는 양을 한 6마리 키웠는데 보면 양들이 이름이 있어요. ‘정숙아!! 영희야!!’ 누구야!! 양이 알아듣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이스라엘의 목자들도 그렇습니다. 같이 양들과 어울리니까 그 양들의 특색을 다 알고 그들의 이름을 안다는 거에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목자는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두에 우리가 중보기도하면서 왕따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서 투신자살한 한 학생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문에 보면 친구들이 너무 많이 괴롭혔어요. 중 3인가 되는 아이를 친구들 앞에서 벌거벗기고 하체를 다 드러내게 만들면서 애를 괴롭히니까 애가 그 인권이라는 것이 자존심이라는 것이 밑바닥이에요. 이 말이 안 되잖아요. 너무 안타까워요. 죽는 아이들도 그렇게 죽게 환경을 만드는 아이들도. 그 아이가 마지막 말이 뭐예요. 학교에 좀더 CCTV 많이 설치해 놓으라는 거에요. 그리고 돈이 없어 못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거에요. 이 아이가 그렇게 유서를 남겼어요. 참 너무 안타까워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이 일간지 신문 전면에 그 엄마가 그 아이의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사진이 나왔는데 참 너무 안됐어요. 15살 아이를 다 키워서 하루아침에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냐는 거예요. 아마 그 어머니는 우리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찾을 수만 있다면 아마 못 할 일이 없을 거예요. 모든 지 다 할 거예요. 죽은 아이 살려 낼 수만 있다면 뭘 못하겠어요. 그것이 바로 목자의 심정 이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예요. 

잃어 버린 영혼 하나 찾을 수 있다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의 이 집요한 관심은 무엇 때문인가? 사랑 때문입니다. 목자는 이 양을 찾아서 드디어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 양 한 마리 그것이 뭐 얼마나 하겠어요?! 그러나 그 양을 찾았을 때 기쁨이 큰 거예요. 그 양 한 마리 없으면 다른 동네 가서 한 마리 채워다 백 마리 채워 놓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예요. 그 양은 같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목자는 그 양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비유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들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놀이 공원에 갔습니다. 외아들을 데리고. 그런데 한 참 놀다 보니까 아이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 아이가 어디 갔나 찾다 보니 누가 그래요. ‘미아보호소를 가보세요.’ 미아보호소에 갔더니 길 잃어버린 아이들이 한 4, 5명 울고 앉아 있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는 없어요. 부모들이 와서 찾아가기도 하고 또 길 잃어버린 아이가 인도를 받고 들어오기도 해요. 저녁까지 기다려도 우리 아이가 없어요. 그 때 그 관리하는 직원이 그래요. “선생님! 선생님 아이는 여기 없나 봐요. 여기 이 아이들 다 부모들이 안 찾아가는데 아무나 하나 데려 가세요. 데려다 키우세요!” 

여러분!! 데려 갈 수 있겠어요? 내가 낳은 그 아이라야지 남이 낳은 아이 데려다 키울 수 있겠어요? 애정이 있겠어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목자는 그 양을 찾는 거예요. 주님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 거기 있다는 거에요. 주님은 그냥 많은 사람 중에 무더기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거예요. 그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목자의 관심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사랑은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어떻게 돈으로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의 사랑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 부인 나한테 주면 10억 주지! 10억에 팔아 버릴 수 있겠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남자 집사님들. 누가 10억 주면 부인을 10억에 팔아 버릴 수 있겠어요? 여러분! 가족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 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너무 돈에 노예가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산해요. 내게 얼마나 이익이 돌아오느냐? 교회에 얼마나 유익이 있느냐? 물질로 계산해요. 주님은 그런 계산법이 아니예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그 가치 이상의 엄청난 희생을 찾고 서라도 그 양을 찾을 때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예요.

2009년 아카데미 상에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슬럼독 밀리언 에어라는 데디 보일이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아주 유명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람이 되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슬럼가, 인도의 붐바에 라고 하는 아주 슬럼가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너무 어렵게 자랐습니다. 앵벌이(길에서 걸인으로 다니는 것)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방송국에서 하는 퀴즈 쇼에 나오게 됩니다. 이 퀴즈쇼에 상금이 6억이에요. 1등을 하면 상금이 6억이에요. 그런데 초등학교도 못 가본 아이가 그 퀴즈쇼를 그 단계를 계속 통과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가 됩니다. 그리고 한 문제만을 남겨 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진행하던 사회자가 도대체 이 아이가 무식하고 가난한 아이가 어떻게 이 문제를 맞히는지?! 지식인들도 못 맞추는 문제를 이 아이가 맞히니까 뭔가 부정이 있다고 해서 경찰서에 고발을 하게 됩니다. 경찰서에 가서 심문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죄가 없어요. 이제 그런 과정 속에서 아이의 성장 배경이 소개가 됩니다. 너무너무 가난하게 태어나고 갖은 고생을 다하고 그런 삶의 역경 속에서 그 퀴즈의 정답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삶에 과정 속에서 퀴즈의 정답이 그의 삶에 체험되었기 때문에 그는 거침없이 맞추게 된 것입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돈을 벌려고 나왔겠다.’고 이렇게 사람들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대답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돈 때문에 퀴즈쇼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어려울 때 저를 위로해주었던 여자 친구가 있는데 헤어졌다는 거예요. 이 여자 친구를 수가 없어서 내가 퀴즈쇼에 나가면 TV를 보고 그 여자 친구가 나를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친구를 찾기 위해서 퀴즈쇼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를 맞힙니다. 그리고 6억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자 친구가 그 퀴즈쇼를 보고 달려 와서 둘이 재회하게 됩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은 바로 사랑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목자의 관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물질적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예요. 사랑의 가치 때문에 그는 그 양을 찾아서 헤맸다.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죄에 떨어진 마귀의 노예 된, 종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은 그 엄청난 희생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 드라크마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드라크마라는 것은 은전의 가치입니다. 은전의 이름이 드라크마예요. 은전 한 드라크마는 보통 노동자 하루의 임금입니다. 한 데나리온 정도 됩니다. 

그럼 우리말로 하면 5만원 10만원 정도 되겠죠. 그러면 유대인들은 결혼 할 때 풍습이 있어요. 드라크마 열 개를 줄로 껴서 신랑이 신부에게 선물합니다. 자기 사랑의 증표입니다. 그럼 신부는 그 사랑의 징표를 잘 간직하고 그 사랑의 응답으로 그 드라크마를 볼 때마다 남편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인이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 버렸어요. 뭐 가치가 얼마 안 되죠.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떻게 합니까? 등불을 켜고 그 집안을 다 쓸면서 그 잃은 동전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찾으니까 너무 좋아서 동네 사람을 다 불러서 잔치를 벌린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열 개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 드라크마였기 때문에 여인은 그것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다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님이 기뻐하는 일 영혼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세군 대장을 지낸 윌리엄 부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이 영국에서 아주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전도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초청을 받아 왕궁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그의 참모들이 월리엄 부스 대장님 여왕이 당신에게 뭐가 필요합니까? 라고 말하면 우리가 많은 사업을 하니 돈을 좀 달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윌리엄 부스는 여왕 앞에 갔을 때 여왕이 내가 뭘 좀 도와 드릴까요? 말했을 때 돈을 달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여왕님 제가 필요한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전도자는 잃어 버린 것을 찾는 것이 사명입니다. 제가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여왕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모들이 실망해요. 아니 겨우 그거 부탁하고 오셨냐고. 그런데 월리엄 부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유일한 관심을 이행한다면 나머지는 그 분이 책임지지 않겠느냐?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우리가 행한다면 그 나머지 물질적인 것은 주님이 책임지지 않겠느냐? 이것이 월리엄 부스의 신념이고 신앙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의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여타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황수관 박사님 돌아가셨지만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그분은 참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학구열이 있어서 야간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또 야간 대학원에 가서 공부합니다. 그렇게 그는 어렵게 지방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강원도에서 의료 관계되는 교수들 모임이 있었어요. 그는 기차를 타고 늘 그랬듯이 전도를 합니다. 옆에 노신사가 있는데 자기 간증을 하면서 계속 전도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노신사가 빙그레 웃더니 사실은 나도 크리스천인데 당신이 참 부럽습니다. 난 크리스천이지만 한 번도 전도해 본적이 없는데 나한테 전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우리 서로 인사하고 지내자고 인사를 하니까 그분도 서울의 명문 대학 교수였어요. 그래서 서로 대화했어요. 그런데 전공을 묻고 대화를 하다가 마침 우리 대학에서 교수님을 한분 뽑고 있는데 당신 한번 응시하면 내가 추천하겠다고 그래서 그 대학에 추천을 해줬어요. 그 원로교수가 추천하니까 당연히 됐죠. 그래서 연세대학교 교수로 지방대학 교수가 승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연세대학교 가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황수관이 모르면 간첩이에요. 그 경우가 전도하다가 옆에 앉은 교수님께 전도하다가 그것이 인연이 돼서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고 그 분이 한번 광고모델로 나가면 1억 내지 2억 한번 어디에서 강연을 하면 몇 백만원 이렇게 훌륭한 유명세를 타게 됐어요. 저는 이것을 이야기는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를 하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것저것 요구사항은 많지만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관심 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의 관심 우리 크리스천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혼 상황에 영혼 구원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도를 위해서 우리는 뜻을 정해야 해요. 다니엘서 1장을 보면 다니엘이 내가 이방 땅에 끌려 왔지만 나는 제사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그는 물과 채소만 먹기로 뜻을 정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그는 그 뜻을 관찰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여러분, 뜻을 정하세요. 내가 이제 전도할 것이다. 내가 한 영혼 두 영혼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여러분 뜻을 정하셔야 해요. 그리고 기도하고 사랑을 베푸셔야 해요.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세요. 

아프리카 맛사이 족을 전도하는 한 여성선교사님의 간증의 내용입니다. 이 맛사이 족들을 전도하러 가려면 그 가정을 방문 하잖아요. 그러면 맛사이 족들은 손님이 오면 대접하는 한 가지 음식이 있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유를 발효시켜서 주로 내놓는데 요즘 말로 하면 썩은 우유죠. 발효시킨 우유에다 설탕을 듬뿍 넣어서 그걸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에 새카만 파리 때가 몰려 온데요. 그런데 전도 하러 왔으니 그걸 먹어야 해요. 그래서 그걸 마시다 보면 이에 뭐가 걸린데요. 시커먼 파리가 걸려가지고 뱉어내고 또 마시고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섬김이 없이는 내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전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그 부끄러운 수치를 당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Francis Havergal 목사의 딸이 있었습니다. 22살에 그는 독일에 와서 유학을 했는데 어느 친구의 집을 방문했더니 친구 집 거실에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그림은 유명한 스텐버그라는 화가의 그림입니다. 그 화가의 그림의 제목이 라틴어로 Ecce homo 우리말로 하면 이 사람을 보라. 그런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법정에 섰을 때 ‘이 사람을 보라’ 하고 가리키는 그림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마음에 감동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에 이런 글이 써있어요. ‘나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행하였거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 이런 질문이 쓰여 있었어요.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찬송시를 기록했는데 그 찬송시가 찬송가 311장입니다. 자 가사를 한번 읽어 드리죠.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내어 드릴 수 있습니까? 무엇을 희생할 수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영혼사랑의 뜨거움이 불일 듯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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