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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담대히 나아가셨다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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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담대히 나아가셨다 (요 18:1-11)
 
용기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힘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돈이나 명예, 권력입니까? 아마도 이것들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붙잡으면 결코 놓고 싶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시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 소중한 것을 알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 진정한 소망,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뒤에서 받쳐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이런 말이 생각이 납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약간 잃는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분발해서 재산을 모으면 된다. 명예를 잃는 것은 보다 많이 잃는 것이다. 명성을 찾기 위해 더 많이 노력을 한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다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용기가 곧 전부인 까닭은, 용기가 없이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놓치는 무력증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였던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상황은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적대자들의 음모와 공격은 극에 달했습니다. 정치 세력도, 종교 세력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연합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주도했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역했던 가룟 유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겉과 속이 다른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 중에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계산도 빨랐고, 그 누구보다 상황판단이 빠른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신뢰하셔서 그가 재정을 담당하도록 하시고 공동체의 운영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따랐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더 사모했습니다. 예수님 자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부수적인 이득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그렇게 똑똑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예수님을 바르게 사랑하지 못한 자리에 비겁한 자로 등장합니다. 요샛말로 예수님의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반역자의 모습으로, 대낮이 아닌 어두컴컴한 밤중에, 그것도 무기를 든 로마군대를 앞세우고 나타났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부리는 하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타난 것입니다. 아주 작정하고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다가온 것입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한복음 18:3) 

남자들이 들으면 못 견뎌할 만큼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겁쟁이’라는 말입니다. ‘비겁하다’, ‘비굴하다’는 말입니다. 비겁하다는 말은 사람됨이 옹졸하고 겁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는 짓이 정당하지 못하고 야비하며 이기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는 비겁한 자였습니다. 괴테에 말처럼 이 비겁함 때문에 그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세 가지, 즉 돈, 명예와 권력, 그리고 용기마저 다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으나, 결국 인간으로서의 모든 덕을 다 잃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룟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유다에게 여러 번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 길로 가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을 보면, 더 이상 그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가 나타납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24) 

베드로도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가룟 유다와 대비되는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막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의도적이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획을 세워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기 속에서 충동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 베드로는 펄쩍 뛰었습니다. “말도 안 돼요. 지금까지 잘해 오셨는데 왜 수난을 받으셔야 됩니까?” 그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곧 베드로에게 닥칠 위기를 설명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내가 비록 예수님이 수난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주님이 수난을 받으신다면 나도 함께 수난을 받겠습니다. 내가 죽을 찌언정 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가짜였을까요? 저는 베드로의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놓을 용기를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유대 하인들이 몽치와 횃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예수님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앞장 서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칩니다. 이만큼 베드로는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방어를 하려고 애를 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동을 꾸짖으시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위엄있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은 26:52) 

“내가 만약 칼로 이 시대를 변화시키려 했다면,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를 불러 사람들을 다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힘이나 칼로 모든 일들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길은 그런 길이 아니다. 내 길은 오히려 내가 수난을 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모습은 아주 용기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짝 용기, 즉흥적인 용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체포 당하셨 때, 그렇게 자신 만만했던 베드로도 결국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던 모든 제자들이 흔적도 없이 도망쳐 버린 것처럼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마지막 순간에 어쩌면 그토록 당당하실 수 있었던 걸까요? 어떻게 침착하고 평안하실 수가 있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만 해도 예수님은 놀라고, 번민하셨습니다. ‘이제 죽게 되었구나.’ 탄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담대한 용기를 갖게 되셨을까요?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이 수난의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이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길이 죽음의 길이라도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마음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 말씀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더욱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18:4) 

성경은 예수님이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닥칠 그 모든 십자가의 길을 알고 받아들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몇 장의 스냅사진만이 아니라 당신 인생 전체 필름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로부터의 평안을 경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듭니까? 낙심되고 실망될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두렵고 겁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순간순간이 예측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루의 스냅사진 때문에 울고, 탄식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근심과 걱정으로, 때로는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합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맞이한 아침에 거울을 보면, 스스로 봐도 한심합니다. 눈초리가 사나워져 있습니다. 비겁한 눈망울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한 한심한 모습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감추려고 하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비겁함과 두려움을 감추면 감출수록 사람은 더욱 움츠러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어기제를 통해 두려움을 숨깁니다. 먼저 남을 비난하고 협박하여 내가 두려움을 갖기 전에 남이 먼저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듯 비정상적으로 사나워지는 것, 비정상적으로 사람들을 비난하고 협박하는 것, 거기에는 자기의 두려움을 방어하려는 나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스냅사진이 아니라 전체 필름을 갖고 있다고 믿고 그 분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믿음이란 진정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있기에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내 곁에 계십니다. 

고난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입니다. 욥은 자기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슬펐습니다. 하나님마저 나를 떠나고, 내게 관심이 없는 것같이 여겨져서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자녀들도 자기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대체 어디 있느냐. 당신도 그냥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 말하며 욥을 떠났습니다. 좋은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은 함께 울어주고 위로하더니 곧 욥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이제 모든 것이 귀찮아졌습니다. 사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냥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마음을 이렇게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욥기 3:3∼4)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내가 태어나던 날이 저주를 받아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이 땅에 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고난의 탄식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이러한 고난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욥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욥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린 줄 알았어요. 하나님 나를 지켜보지 않는 줄 알았어요. 하나님은 눈 감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동안 나를 지켜보고 계셨군요.” 그 한 가지 깨달음 때문에 억눌렸던 욥의 마음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욥을 괴롭히던 모든 고난의 질문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전체 필름을 갖고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말씀 앞에 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네 인생의 스냅사진이 아니라 전체 필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너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저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게 한 것, 고통 속에 있는 그를 그냥 그대로 바라보았던 것, 그 모든 것은 바로 너를 향한 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안타까움과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의 자리는, 어쩌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힘든 순간마다 하나님께 조용히 아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18:4) 

당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오히려 당당하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예수다.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나다.” 5절과 8절에서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그들에게 자신을 밝히십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당혹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내가 그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표현하실 때 쓰시는 메시아적 칭호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나다.”라는 의미의 “I am.”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표현으로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고, 당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11절 말씀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잔을 예수님은 사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고난보다 사명을 더 크게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다가올 죽음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컸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대하고 당당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이 마지막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인 사명의식입니다. 사명을 깨달을 때,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섰을 때, 예수님의 눈에는 제자들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들을 향한 넉넉한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요한복음 18:8) 

너희들이 붙잡으려고 한 것은 내가 아니냐? 그러니 이 사람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9절은 이것을 다시 한 번 표현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18:9)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챙기셨습니다. 끝까지 사랑과 배려를 품고 돌봄과 지킴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선한 목자셨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담대해지면, 나 자신이 소중한 것처럼 이웃도 소중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명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힘이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권력과 명예가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하면, 가장 위험한 것은 비겁한 것이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이것이 내게 주신 자리요, 내게 주신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때, 내가 있는 공동체가 축복받고 다시 되살아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필름 전체를 갖고 계신 하나님 앞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를 맡기십시오. 이것이 용기입니다. 용기란 걱정과 근심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인생 전체를 쥐고 계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오늘 내게 주신 이 삶을 당당하고 담대하게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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