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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오른편 십자가 (눅 23: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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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 십자가 (눅 23:33-43)


I. 세 개의 십자가

미국에 「오른편 침례교회」가 있답니다.
교회에서 세족식을 거행하다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어느 쪽 발을 먼저 씻었을까를 두고 언쟁이 있었습니다. 

1) 성경은 항상 오른쪽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으니 오른발을 먼저 씻었을 것이다. 
2) 어느 발을 먼저 씻어도 좋다. 오른쪽, 왼쪽 –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
3) 차라리 왼발부터 먼저 씻자. 

이때 목사님이 재치있게 왼손잡이는 왼발부터 오른잡이는 오른발부터 씻으라고 했답니다. 이 일로 오른 발을 고집하던 사람들이 나가 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 이름이 “오른편 침례교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에 행악자들이 매달렸습니다. 우리는 흔히 왼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했고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행악자 중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라고 되어 있지 왼편, 오른편 이라고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교회 전통상 항상 오른편은 구원의 편이고 왼편은 나쁜 편이라고 생각해서 구원받은 강도를 오른편 강도라고 부른 것뿐입니다. 그렇게 부른다고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설교제목을 「오른편 십자가」라고 정했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뜻이 있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소문인즉슨 예수와 흉악범 두 사람을 처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경거리가 생겼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으로 밀려 왔습니다. 
언덕 위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이 달려 있었고 좌우편으로 흉악범들이 달려있었습니다. 

두 죄수와 함께 예수님을 처형하고 싶은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영웅시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시던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매달았다면 민중들은 필시 예수님을 영웅시했을 것입니다. 두 흉악범과 함께 매달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이런 부류라고 알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잔꾀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성취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악인으로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고 악인들과 함께 매달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죽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 좌우편의 두 사람은 온 인류를 상징하는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흉악범들입니다. 최후의 심판관 앞에서 우리는 좌편에 서든 우편에 서든 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행악자가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분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걸 보니 적어도 이제는 메시야는 아닌가 보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같이 고통받고 죽어 가는 처지에 마지막 말일지도 모르는데 덕담이나 나눌 일이지, 좋은 말을 남길 일이지, 위로가 되는 말을 할 일이지, 이렇게 예수님을 비판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를 실패한 구원자로 인식하고 너 자신도 구원 못하면서 네가 메시야라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입술은 마귀가 하는 말을 대신하는 줄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다른 한편의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0절) 먼저 욕하는 죄수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 라고 합니다.

이 강도는 어떻게 주님을 그 어려운 순간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들과는 다른점을 발견합니다. 죄가 없이 고난당하고 계시는 구나.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서 빌 수 있었고, 이분만 믿으면 건짐 받을 수 있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분이야 말로 메시야구나 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II. 십자가 : 나누어지는 곳

십자가는 멸망 받을자와 구원 얻을 자가 갈라지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분기점으로 구원자와 멸망자가 나누어집니다. 십자가는 분리의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영과 육이 나누어집니다. 하늘과 땅이 나누어집니다. 죄와 구원이 분리되어집니다. 의와 율법이, 옛사람과 새사람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세우고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고 가라지와 알곡이 분리되어집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세우고 천당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구원과 심판이 나누어집니다. 형벌과 상급이 분리되어집니다. 기쁨과 슬픔이 나누어집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인류역사가 두 동강 났습니다. 예수님 이전(B.C), 예수님 이후(A.D)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천국과 지옥은 학벌로 갈라지는 곳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갈라지는 곳이 아닙니다. 미모로 갈라지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하면 멸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십자가의 고난이 나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임을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그 십자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그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 정권의 유태인 학살 집행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지내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한 유태인이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물었을때 아이히만을 쳐다보는 순간 이 사람이 기절해 버렸습니다. 깨어난 사람에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을 한나 아렌트라는 역사학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악이 저토록 평범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망할 사람이 뿔을 달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갈 사람이 사주팔자 관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예수님 거절하면 멸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영접하고 고백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III. 나 같은 죄인도

그러면 천국엔 누가 갑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가는 곳입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305장(구405장)의 찬송가사입니다. 이 찬송을 만든 사람은 “존 뉴턴” 목사님입니다. 40년동안 충성을 다하여 목회를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분이 목회를 하면서 평생토록 그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는 젊었을 적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 시장에 팔았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목회를 하면서도 ‘나처럼 끔찍한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죄도 사함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울며 시를 썼는데 이것이 305장이 된 것입니다. 

그가 82살이 되어 임종하는 순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세 번 놀라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전혀 생각밖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둘째,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셋째, 노예 상인이었던 끔찍한 존 뉴톤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라게 될 것입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오늘 본문의 오른편 강도, 구원받은 이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줍니다.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용기를 줍니다. 나도 구원 받을 수 있겠구나. 나도 구원받았구나.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엄청난 충격적인 이야기를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 곁에 이 소식을 들어야 할 누군가가 없습니까?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 홍 집사 두 자매가 교회를 나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잠자리에 들려는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 임종을 하시려는데 빨리 오셔서 복음을 전해 주십시오.” 다급하게 달려갔지요. 그런데 이미 의식이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진지하게 복음을 제시한 다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물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원하신다면 한번만 입을 열어서 예라고 대답해 주십시요.” 입을 꽉 다물고 있습니다. “눈을 뜰 수 있습니까? 당신이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길 원하신다면 눈을 한번만 떴다 감아 주십시요.” 그래도 눈을 꽉 감고 계십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원하신다면 당신의 자녀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손가락을 한번이라도 움직여 주십시요.” 손가락이 꼼짝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규를 했습니다. “당신이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움직이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요. 발가락이라도 움직여 보십시요.” 그랬더니 엄지발가락이 두 번 까닥 까닥 움직였습니다. 

두 자매와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면서 “우리 아버님 예수를 영접했다구.” 장례를 마치고 난 다음에도 입만 열면 “우리 목사님 복음 증거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발가락 두번 움직이면서 예수님 영접했다구.”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진작 전도할 일이지. 
좀 진작 믿을 것이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의식이 없을 때 발가락 두 번 까닥이고 돌아가실 게 뭐가 있습니까? 

IV. 오른편 강도의 신앙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오른편 강도를 보십시다.
그가 가진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습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회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40절 말씀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될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심판을 생각할 때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다른 친구 하나를 책망하면서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도,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교회에만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참으로 진실한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했습니다. 

41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당연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결백을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41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지금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라진 예수님을 변호해야 된다면 누가 변호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12제자, 아니 적어도 베드로만은 앞을 가로막으며 이분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변호했어야 옳았을 것 아닙니까? 아니면 울고 있던 여인들과 마리아 어머니만이라도 내 아들은 죄가 없습니다. 고백하고 변호했어야 옳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십자가에 매달리는 한 강도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조롱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들마저 비웃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관원들마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No. 아니요. 
이 사람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하신 일 가운데 옳지 않은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만인간의 죄를 담당하실 구세주이십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고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너희들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인생의 고난의 현장에서 핍박의 현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시인하고 인정하면 하나님 앞에서 나도 너를 인정하고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손해 볼 것 같아서 어려움 당할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부인하면 인정하지 않으면 천군 천사들 앞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서 나도 너를 부인 할 것이다. 나도 너를 인정할 수 없노라.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넷째로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사실은 구원해 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때 동반자 하나가 있다는 것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숨을 거두실 때 함께 숨을 거둔 가련한 인생 하나가 당신 곁에 있었다는 것 기억해 주십시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놀라운 응답을 받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망한 인생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진가를 알려면 위기 상황에 부딪혀 보면 압니다. 지금 오른편 강도는 극한의 상황에서 예수님께 신뢰를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한한 능력을 행하실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도시락 하나로 오천명이 먹고, 죽은 자가 살아날 때에 썩어 냄새가 나는 사람이 몸을 휘감고 있던 붕대를 거둬 치울 때에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메시야 입니다. 고백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때에 하나님다운 능력을 행할 때에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자기처럼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숨을 몰아쉬면서 안타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낙원이 주인이십니다. 이 고백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교가 챨스 스펄전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동반자가 되었고 천국에 함께 들어간 최초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42절)
이것은 간단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네스’라는 성서 신학자는 이 한마디의 고백속에 무한한 신앙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① 그는 영생을 믿었던 사람이다. ② 내세의 심판을 믿었다. 이 사람은 경건한 사람과 회개한 사람이 가는 곳이 있고, 불경건한 자와 회개치 아니한 자가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장소가 있음을 믿었다. 

③ 예수님께서 지금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왕국임을 믿었다. 

사실 이 믿음이 없이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나라가 당신의 나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V. 내가 선택해야 할 십자가

우리가 오른편 강도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십자가 주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입네 하면서도 걸핏하면 신앙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비난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입니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신앙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래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놀라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장소 모든 사건에서 골고다 언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왼편의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요 멸망의 십자가입니다. 
오른편의 십자가는 영생의 십자가입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남미에서 순회 선교를 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또 다른 마을로 옮겨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습니다. 

한 번은 이사를 해야 하는데 가족 간에 언쟁이 생겼습니다. 몇 년을 같이 살던 서울이 그리워 “서울”이라고 부르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갈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거였습니다. 얼마 전 이 개가 정글의 어떤 짐승과 싸우다 두 다리를 다친 겁니다. 어른들은 이 마을에 남겨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아이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8살 막내가 떼를 써 자신이 안고 가기로 한 겁니다. 

선교사 가족이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강 가운데 쯤 왔을 때 막내가 안고 가던 “서울”이라는 이 개가 품에서 빠져나와, 강물로 뛰어 든 겁니다. 남미의 “피라냐”라는 식인 물고기 떼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 “서울”이가 피라냐떼와 싸워 피투성이가 되고 피라냐의 밥이 되는 그 동안 선교사 가족은 서둘러 강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던 겁니다. 막내 아들은 강가에서 이 서울이를 목 놓아 부르며 울었습니다. 선교사 가족은 함께 “서울”이를 부르며 응응대고 울었습니다. 뼈도 찾지 못했지만 강가에 “서울”이의 무덤을 써주고 묘비를 세웠습니다. 

「우리 대신 죽어간 예수님 닮은 서울이의 묘」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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